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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에서 거듭 깨닫다 1_ 관포지교管鮑之交

장한림 2022. 4. 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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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rA4tKby6y8 

 

 

부모님이 날 낳았으되 나를 알아주는 건 친구다

 

 

제나라 환공桓公은 지혜롭고 포용력이 큰 인물이다. 

 

“그대가 몹시 위중해 내 마음이 편치 않구려. 병중이지만 그대의 조언을 듣지 않을 수가 없어서 묻는 거니 너무 노여워 마시오. 만일 그대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그대 후임으로 적합하겠소?”

 

관중이 병상에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문안을 온 환공이 수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관중이 되물었다.

 

“전하께서는 마음에 두고 계신 사람이 있으신가요?”

“포숙아가 어떨까 싶소만.”

“포숙아는 청렴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적합하지 않습니다.” 

“뜻밖의 대답이구려. 포숙아는 그대와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가 아니오. 과인은 그대가 적극 천거할 줄 알았는데 말이오.”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포숙아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가벼이 여기고 상대의 잘못에 대해 뒤끝이 길다는 게 흠입니다. 만일 그가 국가 대사를 맡게 된다면 전하의 뜻과 맞지 않는 행정을 펼 것이고 따라서 민심에 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환공이 정색을 하고 다시 묻는다.

 

“포숙아가 아니면 더 나은 사람이라도 있소?”

 

“성인은 사람들과 두루 어울리며 덕을 나누고 현인은 재능을 나눕니다.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가정은 물론 국가 대사를 맡겨도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습붕이라고 판단합니다. 습붕은 윗사람 눈치에 급급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을 가벼이 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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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아자 부모生我者父母, 지아자 포숙아知我者鮑叔也.”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 사람 관중과 포숙아는 어려서부터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포숙아는 관중의 뛰어난 재주를 존중하며 감싸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장사를 했는데 관중이 더 많은 이익을 챙겨갔다. 

 

“왜 이윤을 똑같이 분배하지 않고 관중이 더 많이 가져가는가? 그런 욕심꾸러기 친구와 어울리는 자네가 이해되지 않네.”

 

주위에서 의아해하며 포숙아에게 묻자 포숙아가 이렇게 답했다.


“관중은 나보다 가난하기 때문에 그가 이익을 더 갖는 것뿐일세. 관중을 함부로 헐뜯지 말게.”

 

그 후 관직에 등용된 관중은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섰으나 매번 패하고 돌아왔다. 제나라 관리들이 관중을 비난했다.

 

“관중은 겁쟁이야. 번번이 싸우지도 못하고 매번 도망쳐오잖아.”

“관중은 겁쟁이가 아니오. 그에게는 보살펴야 할 늙은 어머님이 계셔서 목숨을 아끼는 것이오. 곧 그의 본 모습을 보게 될 것이오.”

 

친구가 손가락질을 받을 때마다 포숙아는 관중을 감싸주고 변호했다.  

그럴 즈음 제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 B.C. 686년 제나라 왕인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 무지에게 시해되자 관중은 양공의 장남인 공자 규를 보호하고 이웃 노나라로 피신했다. 

포숙아도 규의 이복동생이자 둘째 왕자인 소백을 모시고 거나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 이듬해 공손 무지가 살해되며 반란이 평정되자 규와 소백, 두 왕자가 왕권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관중과 포숙아는 어쩔 수 없이 적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장자인 규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관중은 둘째 왕자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포숙아가 모시던 소백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제나라 환공(桓公, B.C. 685∼643)이다. 환공은 자신을 노린 관중을 압송하여 처형시키려 했다. 

 

“관중은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재 중의 인재입니다. 전하께서 제나라만 다스리시겠다면 모르지만 앞으로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시려면 반드시 관중을 곁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옛 친구인 포숙아가 환공에게 아뢰자 그의 말을 경청하던 환공이 관중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중용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가 기사회생한 관중은 나라 행정에 탁월한 잠재력을 발휘해 이윽고 재상이 되어서는 대정치가로서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추진하는 일마다 결실을 맺어 제나라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제나라 국왕인 환공과 함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음은 물론 역사상 훌륭한 정치가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훗날, 관중은 친구 포숙아에 대해 이렇게 극찬했다.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가져갔으나 그는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나를 배려했기 때문에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장사가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렸었지만 포숙아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믿어줬기 때문이다. 또 세 번씩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시는 나를 무능하다고 평가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라며 오히려 나를 위안하고 용기를 북돋어 주었다. 

어려웠던 시절 친구에게 이익을 양보하고 내재된 능력을 알아주었던 포숙아의 적극적인 배려가 없었다면 관중은 진작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관중은 그런 포숙아의 우정을 늘 가슴에 품고 고마워하며 살아왔다. 

사기 관안열전에 관중과 포숙아의 두터운 우정을 비유하며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표현했다. 

관포지교는 사기史記의 관중열전管仲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그처럼 친구인 포숙아에게 진솔한 우정과 고마움을 지닌 관중이 병든 자신을 대신해 포숙아를 기용하고자 하는 환공의 뜻에 반대한 것이다. 적극 나서서 포숙아를 천거하는 게 당연했을 관중의 처세는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관중에게 있어서 포숙아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은인이지만 국정을 이끄는 재상의 재목은 아니라고 여겼다. 인재 적소의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짐이 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훌륭한 인사는 인재를 제대로 기용하여 가장 적합한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재목이 되지 않는 사람인데도 친분을 내세워 나라의 대사를 맡기면 일도 그르칠 뿐 아니라 시행 당사자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당장의 출세에 급급하는 건 천거한 사람이나 중용된 사람 모두 허망한 욕심에 사로잡혀 머잖아 크게 상하고 만다. 

이를 잘 아는 관중으로서는 나라와 친구를 모두 지키는 선택을 취한 것이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하며 충성과 우의를 온전히 지키고자 한 관중의 처세는 어진 정치를 구현하여 백성의 안녕을 우선시하려는 현인의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관중은 백성의 경제적 풍요와 안정된 삶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할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다.

제나라의 번성은 제후인 환공의 관용과 재상인 관중의 재능이 지혜롭게 조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한결같은 우정에 기인하고 있다. 포숙아로부터 삶의 참다운 처세를 익혔기에 관중의 재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깝고도 진솔한 친구의 우정을 묘사하는 비슷한 한자숙어들이 꽤 있다. 문경지우刎頸之友,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之, 막역지우莫逆之友 등이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데 이쯤 나이를 먹고 보니 그런 의미가 담긴 진정한 친구가 하나만 있어도 그 사람은 잘 산 인생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관포지교나 수어지교의 교분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 것이므로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고대 왕조 주周나라는 왕이 각 지역을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하는 봉건 제도를 실시했다. 대신 제후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BC 770년, 주나라가 동쪽 뤄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이 관계에 금이 가면서 이때부터 전국 7웅이라 불리는 진·조·위· 한·제·연·초나라가 합종연회하며 약육강식의 전쟁을 일삼던 춘추시대가 열렸다.

이때 수많은 제후국 가운데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의 춘추 5패라 불리는 다섯 제후국이 차례로 패권을 차지했다.

주나라의 뤄양 천도 이전의 시대를 서주시대라 하고 그 이후를 동주시대라 일컫는다. 동주시대는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나뉘어 구분한다.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제후국들은 국운이 쇠약해지기 시작한 주나라 왕실을 받들었다. 하지만 전국시대로 들어서면서 주나라 왕실을 무시하고 오로지 제후국들끼리 힘과 힘으로 대결하는 시대가 온다.

춘추시대(BC 770~BC 403년)는 주왕조가 도읍을 옮긴 시점부터 진秦나라의 대부인 한·위·조 3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하며,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이다.

즉 주나라 왕실로부터 제후 공인을 받은 진나라는 다른 제후국들보다 세력을 키우면서 BC 221년, 진시황 때에 이르러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바로 이때까지의 시기인 BC 770년부터 BC 221년까지의 550년간을 통털어 춘추전국시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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