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지 않은 일에 큰 힘을 쏟다 보니
한신은 초나라 항우 밑에서 집극랑중이라는 낮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 직책에 딱 맞는 그릇이야.”
항우는 한신을 하찮은 인물로 여겨 중책을 맡기지 않았다. 항우에게 실망한 한신은 한 왕 유방한테 가서 한나라 대장군에 오르게 된다.
항우는 자기가 업신여겨 떠나보낸 한신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항우가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인재를 제대로 쓰지 못한 데 있었다. 자기 힘과 용맹을 과신해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황제가 된 유방은 낙양 궁궐에서 연회를 열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하게 된 것과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연유가 무엇인지 것은 그대들은 숨김없이 말해보시오.”
왕릉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사람을 업신여기시고 항우는 인자하여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는 그 공적이 있는 자에게 성지를 나누어주어 천하와 더불어 그 이로움을 같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고 의심하며 공이 있는 사람에게도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공을 모두 자기의 것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잃은 까닭이라 생각하옵니다.”
유방은 술잔을 비우고는 왕릉의 말에 답했다.
“그대 말도 일리가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를 뻬먹었소.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초왕 항우와 달리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중용했기 때문이오. 전투에서의 전략은 장량이, 나라 살림은 소하가 한치 빈틈없이 일처리를 해주었고 실전에 임해서는 한신이라는 뛰어난 장수까지 셋이나 내 곁에 있었소. 하지만 항우는 범증이라는 인재를 곁에 두고도 제대로 쓰지 못한 게 결정적 패인이오. 그대들은 항우를 어찌 생각하오?”
이에 한신이 항우를 평했다.
“항우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용맹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가 성난 얼굴로 호령하면 군사 천여 명이 놀라 쓰러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부리는 데에는 서툴러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니 이는 ‘필부지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인정이 많아 군사가 병에 걸리면 흐느껴 울며 자기가 먹을 음식까지도 나눠 줍니다. 그러나 공을 세운 부하에게 벼슬을 내릴 때면 그것이 아까워 며칠을 망설이니 이는 부인지인婦人之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신은 항우의 정을 아녀자가 지니는 좁은 소견의 인정으로 폄하했다.
한낱 보잘것없는 남자 필부의 하찮은 용기를 뜻하는 필부지용은 앞뒤 분별없이 자기 힘만 믿고 함부로 날뛰는 행동을 빗댄 고사이다.
필부지용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마음을 열어 놓고 남들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입보다 귀가 열려있어야 한다.
한신은 이렇게 항우가 필부의 용기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며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이제 대왕께서는 참으로 초왕 항우가 했던 바와 달리 천하의 인재를 두루 등용하여 믿고 쓰신다면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천하에 널린 성과 고을을 공신들에게 봉지封地로 주시면 심복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필부지용은 본래 맹자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선왕과의 대화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혼란스럽던 춘추전국시대 상황 하에서 제나라의 부국강병을 꿈꾸던 선왕이 맹자에게 이웃 나라들과 화평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어짊仁과 슬기로움智을 바탕으로 한 신뢰성 있는 교류가 최상의 방책입니다.”
그러나 선왕은 맹자가 내놓은 방안에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직 어진 왕이어야만 큰 나라의 입장에서도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고 오직 지혜 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대국의 입장에서 소국을 섬기는 왕은 하늘을 즐거워하는 사람이고, 소국의 입장에서 대국을 섬기는 왕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하늘을 즐거워하는 자는 하늘의 위엄에 겸허할 수밖에 없으므로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나라를 보전합니다.”
선왕은 맹자의 견해와 달리 작은 나라를 받들기보다는 아예 합병하여 나라를 키우고 싶었고, 큰 나라와 싸워 이김으로써 제후의 맹주가 되고 싶어 했다.
“나한테 있는 한 가지 결점은 인과 지보다 용기에 더 호감이 간다는 것이지요.”
선왕의 말을 들은 맹자가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작은 용기에 연연하는 건 겨우 한 사람만을 대적할 수 있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큰 용기를 지니십시오.”
맹자가 선왕의 분별없는 용기를 점잖게 꾸짖기 위해 쓴 말이 바로 필부지용이다. 한 마디로 필부지용은 사려 분별없이 혈기만 믿고 날뛰는 소인들의 경솔한 용기를 일컫는 것이다. 이와 상반되는 의미로 ‘장수지용將帥之勇’이 있지만 이 보다는 공명정대하여 어떤 사람을 대하여도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를 일컫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대조되는 성어라 할 수 있겠다.
맹자는 용기를 좋아하는 선왕의 마음을 근거로 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행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남에게 지기 싫어하여 무용을 겨루는 건 작은 용기로서, 혈기에 차서 남을 제압하려는 것에 불과하지만, 맹자가 말하는 큰 용기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자 하는 왕도정치 실행의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서 ‘필부지용’이란 말이 유래하였으며, ‘혈기에서 오는 소인의 용기’라는 뜻의 ‘소인지용小人之勇’과 같은 말이다.
언제부턴가 현실의 우열을 놓고 갑과 을로 비유하는 많은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해득실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힘센 자의 권위가 과연 필부지용인지 호연지기인지를 떠나 미래적 안목에서도 득실을 고려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사람을 잃는 건 미래까지 잃는 게 아닐까. 덕이 부족함에도 모은 재물로 혼자 배불리 살 수는 있겠지만 더불어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파트 층간소음을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숱한 사례에서 과연 필부지용으로 약자를 누름으로써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에 숙고해보는 여유를 지녔으면 싶다.
이제 위층에서 조용하니까 마냥 편안하신가 말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우리네 세상이랑 이빨 날타로운 야수가 왕인 정글이랑 다를 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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