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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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북 괴산, 맑은 계류가 힘차게 굽이쳐 흐르는 화양구곡 자락에 자리 잡은 M연수원.
본관 지붕 너머로는 꽤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쳐있다. 청정 옥수와 초록의 대자연 속에 초현대식 건물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그 앞으로 펼쳐진 넓은 운동장에는 파릇한 잔디가 보기 좋게 깔려있다.
월요일 오전, 막 승급한 태화물산의 초급간부 스물두 명이 5박 6일간 일정의 연수교육을 받기 위해 입소했다. 생동감 넘치는 젊은 직원들과 그들을 앉혀놓고 워크숍을 진행하는 이정후 차장을 보면서 조현욱 사장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 역시 학생 때부터 범상치 않더니….
정후는 경영학과 무역실무를 복수로 전공하면서 이미 대학 3학년 때 공인회계사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대학재학 중에 학비라도 충당하게 할 요량으로 인턴사원으로 일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정후는 단시간에 회계 및 관리를 비롯한 회사 내부규정을 완벽하게 시스템화시켜놓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국제마케팅에도 해박한 식견을 지녀 그때까지 동남아지역 수출에만 의존했던 태화물산의 단순 무역구조를 폭넓게 일신시켰다. 정후는 졸업과 동시에 국내 굴지의 재벌업체이자 세계적으로도 손꼽는 L전자에 특채됐다. 역시 거기서도 빠르게 앞서 나가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 휴우, 정후가 아니었다면 다시 구멍가게 수준으로 돌아갔을지도….
현욱은 연수원 건물 뒤편의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오르다가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뱉었다. 몇 년간 계속 이어진 경기침체로 태화물산도 한동안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전을 거듭했다. 그러자 현욱은 정후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정후에게 술을 따라주며 속을 드러내고 말았다.
“지금 큰 고비를 맞고 있어. 많이 힘들군.”
술잔을 입에 대고 고개를 돌린 정후의 낯빛이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어두워졌다.
“요즘 들어 네 생각이 절실하구나.”
“과찬이십니다, 사장님!”
“같이 일해보자고 하면 내 욕심만 차리는 거겠지?”
시간을 달라던 정후는 결국 L전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현욱은 정후가 아무런 조건제시도 없이 아직 중소업체에 불과한 태화물산으로 오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이미 L전자 무역부서에서 경륜을 쌓은 정후는 해외시장의 현실을 꿰뚫다시피 했다.
대만과 싱가포르 등 주요 거래국가에 현지법인을 설립하여 더욱 적극적인 글로벌마케팅 체제를 도입하게끔 기획했다. 가전 부품의 중소생산업체인 태화물산은 산업용 전기 분야와 전자부품까지 종목을 늘렸는데 역시 정후의 기획력과 리더십에 의한 시장개척이 주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의성 넘치는 그의 추진력으로 말미암아 태화물산은 명실상부한 다국적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독일과 스웨덴 IT업체와에 수출계약을 성사시켜 유럽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했다. 겨우 3년 남짓한 시간에 그는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회사가 외형적으로 크게 신장했고 예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닌 엄청난 순이익을 올려 탄탄한 내실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래은행의 태도가 달라졌음은 물론이고 시도 때도 없이 협력을 원하는 업체의 방문이 이어졌다.
- 이대로 가면 우리 태화물산도 상장할 수 있을 거야.
올 초에는 증자를 통해 자본을 늘렸다. 몇 해 안에 상장만 하게 된다면 일선에서 물러나 원해왔던 제2의 인생을 살 것이다.
- 고맙구나, 정후야.
현욱은 증자하면서 정후 명의로 회사 자본의 10%를 등록해 놓았다. 보답의 의미도 있지만 진작 태화물산의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기 때문이다.
- 넌, 충분히 자격이 있어.
아들이 없는 현욱은 정후가 친아들이었으면 하고 아쉬워할 때가 많았다. 정후를 좋아하는 건 단순히 일에서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고난 품성이 선한 정후는 고등학생 때 고아가 됐음에도 참으로 반듯하게 성장했다.
정의가 뭔지, 제대로 된 길이 어딘지 아는 청년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정후한테 안타까움이 일 때가 없지 않았다.
- 내가 너한테 해준 건 별것이 아녔는데.
대기업에서의 확실하게 보장된 출세까지 젖혀두고 태화물산으로 온 것도 정후는 나에게 부채의식 같은 게 있어서일 거로 생각했다. 그때마다 현욱은 정후의 인생을 굴절시켰다는 자책감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곤 했다.
- 정후야, 최대한 보상하마.
정후를 처음 본 건 녀석이 중학생일 때였다. 퇴근 무렵 정후는 회사 계단에 쭈그려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몇 번인가 볼 때마다 녀석은 또랑또랑한 눈을 책에서 떼지 않았다. 알고 보니 건물청소용역을 하는 엄마가 일 마치기를 기다리며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동생인 경화가 맡은 재무부서에 녀석의 책상을 내주도록 했다. 한 번은 부서의 회계처리업무를 돕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보통 빠르고 꼼꼼한 게 아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오빠! 야무지기도 하지만 애답지 않게 책임감 강하고 참 올바르더라고요.”
경화는 정후를 친조카처럼 아끼며 보살폈다. 정후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방학 때마다 회사 잡무를 맡겼다. 정후는 어떤 일을 시켜도 실수를 하거나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경화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정후를 제대로 교육 받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한 머리를 지닌 게 분명해 보이는 정후에게 학비 명목으로 보조를 해주었다.
정후는 “사장님! 그리고 고모님! 열심히 노력해서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경화는 정후에게 고모라고 부르도록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친고모와 조카처럼 친숙해졌다. 정후는 그때도 그랬지만 그 후로 단 한 번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 오히려 내가 너를 통해 깨달은 게 있었지.
현욱은 그때 남을 돕는 게 커다란 보람이고 행복인 걸 알았다. 그때까지는 오로지 사업을 키우려는 욕심뿐이었는데 되새겨보니 그 욕심의 끝은 별것이 아녔다. 그저 가족과 함께 잘살아보고픈 본능, 사내로서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고픈 성취욕. 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거래처에 쓰는 접대비에도 못 미치는 작은 성의를 정후는 은혜로 여겼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정후의 홀어머니와 정후는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월급과 용돈을 쪼개 인근의 독거노인들을 돕고 있었다. 우연히 산동네 홀몸인 노인들에게 줄 연탄을 실어 나르는 그들 모자를 보고 사업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뚜렷한 이유가 정해졌다. 돈을 벌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쓰리라. 이 사회의 그늘진 곳에 환원하리라.
인생관이 변하자 더더욱 열심히 사업을 키우려는 욕구가 강해지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정후는 그때부터 늘 혼자가 되고 말았다. 성치 않은 몸 상태를 숨기고 정후를 공부시키려 힘든 일을 마다치 않던 정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이미 오정태 부장과 결혼한 경화가 아이를 갖게 되어 집에서 쉬게 되자 정후에게 더더욱 쓸쓸한 고독감이 묻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후야! 네가 학업을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니?”
안타까운 마음에 정후의 의향을 물었으나 녀석은 “지금도 불편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주신 장학금도 모두 저축해서 돈도 충분한걸요.”라며 오히려 걱정을 덜어주려 했다. 정후는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해오던 복싱체육관에서 아예 숙식을 해결하며 생활과 학업을 병행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잠시 그늘졌던 정후는 곧 활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되지 않는 학비를 대주며 불편한 게 없는지, 아픈 건 아닌지 관심을 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사장님! 군대에 갔다 올게요.”
녀석은 입대하는 걸 마치 옆 동네에 마실 다녀오는 것처럼 말했다.
“지금?”
“지금이 적기일 것 같아요.”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 대학 3학년 때 제일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가 입대하겠다고 했다.
“사장님이 보살펴주신 덕분에 편안히 입대할 수 있게 됐어요. 고맙습니다.”
정후는 경화한테도 깍듯이 큰절을 올렸다.
“고모님! 늠름한 군인이 돼서 찾아뵐게요.”
정후는 잠시 편안하게 군대에서 쉬다가 나오겠다며 싱긋 웃었다.
- 정후야, 이 차장! 그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너도 벌써 서른 살을 넘기고 있구나. 결혼도 해야지.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해서 인근의 도명산을 등반하고 내려와 시작하는 하루의 일과는 저녁 6시까지 자체적으로 준비한 교육프로그램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고, 저녁 식사 후 9시까지 분임토의 및 레크리에이션 등으로 이어졌다. 이틀간의 교육을 마치고 배정된 방에 누운 현주는 뿌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들뜬 기분으로 입소했지만, 마음 한구석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꿈틀거렸는데 지금은 그마저 해소되었다. 오늘 교육을 마친 후, 간단한 독려 인사를 마치고 강단을 내려가는 그가 살짝 눈길을 건넨다. 여전히 부드럽고 푸근하다. 한 지붕 밑의 다른 방에서 그와 떨어져 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약간은 허전한 느낌도 든다.
뇌리에 박힌 그와의 대다수 장소가 호텔이었고, 흠뻑 땀에 젖어 서로의 벗은 몸을 애무하는 일이 기억 대부분이었다. 그로 인해 섹스가 얼마나 서로를 가깝게 이어주는 매개체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풍족하게 쓸 수 있는 돈과 선물들. 예전에는 그다지 달갑게 여겨지지 않던 자본주의가 지금 현주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사회구조라고 생각되었다.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어렵사리 고학해서 대학을 마쳤었다. 중소기업체이긴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취업할 수 있었다. 입사 초기에는 보다 나은 직장으로의 전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오정태 전무를 만나면서, 그와 밀접해지면서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머잖아 내가 이 회사의 대표가 될 거야.”
현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확신하는 오정태 전무에게 유능하고 멋들어진 기업가의 모습이 새겨지면서 동시에 그와의 첫 밤이 떠오른다. 빨간 선혈, 그리고 하얀 눈이 동시에 보이는가 싶었는데 다시 노란 개나리가 보였다. 그때 일시적으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순결이 안겨준 반대급부는 노랗게 핀 개나리였다.
이젠 노란 꽃잎을 활짝 젖혀 온기 가득한 세상을 한껏 품는 일만 남았다. 열여섯 명의 입사 동기 중에 조윤아와 문세희, 그리고 자신만이 승진 연수교육을 받고 있다. 오정태 전무가 인사고과에서 힘을 써주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현주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아늑하고 편안하기만 했다.
이정후 차장은 워크숍을 주관하는 사회자처럼 토론과 질문 및 응답을 병행해가면서 교육을 진행했다. 딱딱하게 흐를 수 있는 전문분야의 업무를 주제별로 설정해 일상의 실제 현실과 비교해가면서 연수생들의 창의력을 도출해내게끔 했다. 교육에 열중하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연수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따라붙었던 일말의 조바심이 이정후 차장으로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차장이 집사람을 친 고모처럼 여겨. 집사람도 그렇고 말이야.”
정태가 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강조했는데 그건 서로의 관계를 이정후 차장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우리 회사는 수십 종이 넘는 전기·전자제품들을 취급하고 있지만 거의 부품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젠 우리 태화물산을 상징하는 완제품 브랜드를 개발할 때입니다.”
정후가 연수생들을 한 번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손색없는 우리 브랜드의 제품이 개발되어야만 막 자리 잡기 시작한 국제시장에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연구개발팀에서 오신 분들한테 책임감이 막중합니다.”
강사인 정후가 세 명의 연구개발팀 승급자들을 둘러보며 강의를 마치자 연수생들이 손뼉을 쳤다. 정후는 화이트보드를 지우고는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라며 연수생들을 둘러봤다.
“사적인 질문도 괜찮을까요?”
기획팀의 조윤아 대리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사적인 질문?”
정후가 의외라는 듯 질문을 받았다.
“해봐요.”
“차장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세요? 마케팅기획, 회계 관리, 영업현장 개척… 가리는 것 없이 우리 회사를 독보적으로 이끌어오셨잖아요. 그런데도 사적인 건 별로 들은 게 없어서요.”
그러자 주로 여성 연수생들이 와아, 하고 윤아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사적으로 내세울 만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노코멘트 하겠어요.”
“차장니임!”
앞자리의 여직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정후의 답변을 재촉했다. 정후는 어색해하다가 “솔직히 말해야겠지요?”하고 선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우리 회사의 신화 같은 존재이신데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인천물류센터에서 대리로 승진한 임수미가 또박또박 대꾸하자 또 한 차례 함성이 터진다.
“한마디로 아주 못된 사람입니다. 성질 사납고, 속 좁고, 직선적인 사람의 전형이죠. 여러분들은 교육을 마치는 대로 그런 사람과 더욱 가까이 접하며 근무하게 되는 겁니다. 엄청 피곤할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차장님은 늘 편안했거든요. 저희 모두 같은 생각일 거예요.”
다른 연수생들도 모두 박수를 치며 “맞아요. 차장님!”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후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생겼다.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큰 오판인지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겁니다. 더 질문 없으면 오늘 교육은 이 정도에서 마칩니다. 수고들 많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연수생들의 표정이 매우 부드러워졌다. 교육에도 흥미가 붙는 것 같았고 교육 후 초급간부로서의 근무에도 점차 자신감을 얻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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