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https://www.bookk.co.kr/book/view/133247
3.
주식회사 태화물산
“여보세요.”
“오늘은 전화가 조금 빨랐나. 단잠을 깨운 거 같네.”
전화벨 소리에 막 잠에서 깬 듯한 현주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표정이 선하게 그려진다. 함께 있을 때도 아침에 부스스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웃음을 짓던 그녀다.
“아녜요,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정태는 매일 아침 모닝콜 하듯 현주에게 전화를 거는 게 일상처럼 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그녀와 통화하는 것은 맑은 산소를 마시는 양 신선하기 그지없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얼굴을 대할 수 없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더없이 싱그럽다.
-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이뤄지고 있거든. 곧 서울로 불러올릴게. 그때는….
오늘은 현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려고 좀 더 일찍 전화를 걸었다.
“오늘쯤 공문이 내려갈 거야. 승진 축하해.”
“고마워요. 전무님 덕분이에요.”
“내 덕은 무슨, 현주가 잘했기 때문이지. 승진대상자 연수교육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야. 본사에 집결해서 출발하니까…”
“이번 주말에 서울로 올라오라는 거죠?”
“하하하! 딱 맞췄어.”
“호호! 알았어요.”
현주와 통화를 마친 정태는 눕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달려들 것만 같다. 더할 것도, 뺄 것도, 바꿀 것도 없으면 완벽한 거라고 했던가. 현주가 그랬다. 현주의 미모, 특히 빼어난 몸매는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었다.
- 아아, 처음이었다니.
이제 그녀가 없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첫 관계 후 현주는 급속하게 자신의 한쪽이 되었다. 작년 겨울, 부산공장에 출장을 갔다가 업무보조를 해주던 현주한테 저녁을 사주겠다면서 함께 간 곳이 광안리였다.
“열여덟 살은 극복할 수 있는 나이 차 아니야? 하하하!”
횟집에서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랐을 때 나이는 아무런 의미도, 장애도 되지 않는 숫자일 뿐이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자리를 옮겨서 한잔 더할까?”
현주가 부하직원이라는 생각이 점점 사라졌다. 자리를 옮겨서도 그녀와 함께 양주 한 병을 거뜬히 비웠다.
“마셔, 한잔 쭉 들이키면 기분이 훨씬 편안해질 거야.”
세 번째 와인을 마실 때는 예약해두었던 호텔에 함께 들어온 후였다.
“전무님! 저, 아직…”
현주의 옷을 벗기려 했을 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한 말을 듣고 마신 술이 일시에 깨는 것 같았다.
“뭐, 아직 처녀라고?”
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예정 없이 무너지고 싶지 않아요. 전무님과 이러리라곤 전혀….”
현주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올려보면서 하소연했다. 동화 속 토끼가 허기진 호랑이 앞에서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었다. 가슴의 울렁거림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가겠다는 현주를 붙들었다. 몸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 늦었어.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눈을 붙여.”
“그냥 주무시는 거예요. 분명히 약속하실 수 있죠?”
그러나 그런 약속은 지키자고 한 게 아니었다.
“전무님! 이러지 않기로…”
현주가 소리를 질렀으나 입술로 그녀의 입을 덮었다.
“현주야! 너무 아름다워. 너를… 사랑하게 될 거 같아.”
질풍에 솟구친 파도가 아주 느릿하게 추락하며 흔들리는 돛단배를 감싸 안는다. 무리에서 이탈해 지쳐버린 한 마리 양을 푸근히 끌어안았다. 시트의 붉은 선혈을 확인하고 현주를 뒤에서 끌어안았다가 몸을 돌려 눕게 하고는 부서질 듯 포옹했다.
정태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삼키던 현주의 젖은 숨소리가 지금도 생생했다. 이미 아내와 부부관계를 갖지 않은 지 여러 해가 지나고 있었다.
아들 선규를 낳은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부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내, 경화도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남편의 몸에 손길도 주지 못하는 그녀가 가끔은 가여울 때도 없지 않았지만, 그 또한 그녀의 자업자득이었다.
그런 동정심이 생길 때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건 오로지 아내 때문이라며 움트는 연민을 자르고 외면했다.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할 마음마저 사라지면서 껍데기뿐인 부부가 되고 만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 정작 저 자신의 문제일 때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으로 작용한다.
더러 겉만 부부인 사람들의 실례를 들어온 바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남의 일로만 여겼었다. 이 회사 태화물산에서 조경화를 만났을 때, 그리고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녀는 나무랄 데 없는 배우자감이었다. 회사 오너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라는 게 그녀의 많은 장점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처음에 그녀는 오빠의 사업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며 결혼을 망설였으나 진심이 통했다. 거듭된 청혼으로 그녀와 가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랬는데 달콤한 신혼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아내의 노트북에서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와 주고받은 쪽지 대화를 보게 되었다.
그자한테서 선물로 받은 장신구를 장롱 구석에서 발견했다. 설마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로 믿었는데, 그 믿음조차 일순간에 깨져버렸다. 넘겨짚고 추궁하자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자와 관계가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모든 게 끝났다. 그러나 이혼을 할 수는 없었다.
결혼하자마자 아내와 헤어지는 건 견고해지기 시작한 회사에서의 입지까지 포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추잡한 스캔들로 인해 승승장구할 수 있는 장래에 흠을 낼 수는 없었다. 아내도 오빠인 조현욱 사장을 염두에 두고 이혼만은 말아 달라고 했다. 겉으로는 일단 그대로 가기로 했다.
외부에는 일절 아무 일도 있지 않은 것처럼 지내기로 했다. 당연히 허울뿐인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신혼의 침실에서 안락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어야 할 피앙세가 다른 남자를 느끼고 있다는 인식이 든 후로는 그나마 빳빳하게 섰던 남성이 푹 수그러들기 일쑤였다.
어쩌다 술기운에 아내의 몸에 오르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룸살롱이나 클럽에서 만났던 그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매춘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 아직도 충분히 젊은 본능을 구태여 참지 않아도 된다. 현주를 만났다.
아내, 조경화를 만나 심한 번뇌에 휩쓸리지 않게끔 현주는 더 일찍 나타났어야 했다. 현주는 사업적 측면, 다시 말해 내 미래에도 도움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젠 내 속에 꽉 들어차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다. 아니 여자다.
'창작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5_ 주식회사 태화물산 (0) | 2022.03.20 |
---|---|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4_ 주식회사 태화물산 (0) | 2022.03.20 |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2_ 연쇄납치 (0) | 2022.03.20 |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1_ 연쇄납치 (0) | 2022.03.20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7_ 5·17 쿠데타 (0) | 2022.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