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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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흘째 교육을 마치고 나서야 현주는 처음 부담스럽게만 여겨졌던 이정후 차장한테 친근감이 드는 걸 느꼈다. 오정태 전무의 조바심으로 인해 생긴 선입견, 교육 중 드문드문 팽팽히 조여오기도 했던 그 선입견 때문에 이정후 차장의 표정 변화가 변화 이상으로 감지되곤 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조심스럽기만 한 감정은 서서히 사라졌고 그의 진지한 열의와 순박하게 보이는 웃음, 가끔 표현하는 재치와 유머에 점차 친숙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일행은 8시가 되어 레크리에이션실에 모였다. 연수생들뿐 아니라 교육지원을 위해 입소한 직원 모두가 참석했다.
길게 이어붙인 탁자에는 소주, 맥주와 와인 등이 놓여있었고 각종 음료수와 연수원 외부에서 배달시킨 음식과 다과들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여러분들의 교육 자세에서 우리 태화물산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한 가지도 나무랄 데 없이 진지해서 좋았어요. 그래서 예정에는 없었지만, 오늘 저녁 타임은 다소나마 편한 시간을 갖고자 조촐하게 회식준비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 떠나서 많이 지쳤을 줄로 압니다. 잠시 피로도 풀고 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떨쳐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현욱 사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연수생들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마치 수학여행 온 학생들처럼 수선스러웠다. 조현욱 사장과 오정태 전무는 모든 참석자에게 원하는 술을 한 잔씩 채워주었다. 현주에게 술을 따라주며 정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교육받기 힘들지 않아? 아픈 데는 없고?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한다고 현주는 생각했다.
더없이 편안했다. 그가 이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함께 교육받는 연수생들도 모남이 없어 좋았고 까칠했던 이정후 차장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는 지워져 편안할 수 있었다.
“몹시 어렵게 자랐다던데 어쩜 그렇게 멋질 수 있지?”
연수원 퇴소 직전, 현주는 커피 두 잔을 뽑아 한 잔을 윤아에게 건네며 뜬금없이 말했다.
“몹시 어렵게? 누굴 말하는 거야?”
“이정후 차장님 말이야. 일찍 고아가 되었다더라.”
“그래?”
입사 동기인 현주와 윤아는 신입사원 때부터 유달리 친했다. 현주가 부산공장의 원가관리팀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자주 통화하면서 허물없는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회사를 이만큼이나 올려놨잖아. 우리 입사할 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잖니. 대단하지 않아?”
대단했다. 윤아는 현주의 감탄이 아니더라도 그의 초인적인 감각과 열정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내에서도, 거래처에서도 그의 평판은 무척이나 우호적이었다. 고모가 특히 그랬지만 아빠도 그를 무척이나 아꼈다. 아끼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때는 자식 이상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아빠는 이정후 차장 말이라면 콩으로 팥죽을 만든다고 해도 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하하하! 그렇게 보였니?”
“제가 알기론 한 번도 그 사람 제안을 물리치신 적이 없었어요.”
“호호호! 한 번도 틀린 제안을 한 적이 없었거든. 그렇죠? 오빠.”
고모가 거들었고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 차장은 나이나 경험을 떠나 배울 점이 많은 친구야. 너도 알다시피 그 친구는 벤치마킹이랍시고 남의 장점을 흉내 내는 게 없이 오로지 순수한 창의력과 열정으로 승부하고 있어. 또 매번 승리하는 중이고.”
아빠는 덧붙여 이 차장을 추켜세웠다.
“윤아야! 너도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잘하고 있지만, 이 차장한테 많은 걸 배워야 할 거야.”
“관심 갖는 건 어때요? 호호호”
“하하하!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 친구는 그런 면에 통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만.”
아빠도 그 이상은 이정후 차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윤아는 자신이 태화물산 대표의 딸이라는 걸 공개하지 않았다. 순전히 스스로 독립하고자 했고, 조현욱 사장도 딸의 그런 의사를 존중했기에 고모부인 오정태 전무를 빼고는 아무도 두 사람이 부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정후 차장에 대해 많은 게 궁금하고 은근히 호기심이 동했으나 아빠에게 그의 사생활을 캐묻는 것도 어색했다. 차장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세요? 그래서 손을 번쩍 치켜들고 물은 거였다. 현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이정후 차장을 화제 삼는다.
“그런데 이 차장님은 좀처럼 캐릭터가 잡히지 않아. 유순한 것 같으면서도 강해 보이고 어렵게 느껴지는가 싶으면 또 편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윤아도 그랬다. 업무상으로 접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일 이외에는 범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이정후 차장에 대한 호기심이 점차 관심으로 변하는 걸 느끼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다. 윤아는 입을 오므려 커피잔을 훅, 불고는 현주를 바라보았다.
“현주야! 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유형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봐. 상대를 머리로 대하는 사람과 가슴으로 대하는 사람.”
윤아의 모습이 자못 진지 하자 현주가 흥미 가득한 눈빛을 짓는다.
“머리로 대하는 사람은 대체로 상대를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서는 말을 많이 듣게 되지. 가슴으로 대하는 사람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그 사람은 상대에게 잔잔한 느낌을 전달하거든. 이 차장님은 전형적인 후자의 타입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왼손으로 오른손가락을 지압하듯 자근자근 누르며 윤아는 은은하게 웃었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지 않거든. 흔치 않기 때문에 쉽게 캐릭터가 잡히지 않을 거야. 좀 어렵다, 그지?”
“남자들한테 꽤나 냉소적인 너까지 극찬하니까 이 차장님이 더 멋지게 느껴진다, 얘.”
“일단 강자에게 약하지 않고, 아랫사람한테 군림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최소한 비겁자는 아니야. 이 세상엔 그런 걸 수단으로 삼는 비겁자가 수두룩한데 말이야.”
“결국, 네 견해는 이 차장님이 사내로서의 기본기까지 충분히 갖추었다는 거지? 호호호!”
윤아가 한두 번 눈을 깜박이더니 현주를 따라 웃었다.
다른 연수생들과 헤어진 윤아와 현주, 세희는 회사 뒤편에 있는 주점으로 들어섰다. 마루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에도 막 자리를 잡은 듯 보이는 사내 두 명이 앉아있었다. 갓 서른을 넘었음 직한 두 남자가 양복저고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주문을 한다.
“소주파인 네가 어쩐 일로 갑자기 동동주야?”
세희가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 털벅 앉으면서 의아하다는 양 윤아에게 물었다.
“며칠 동안이었지만 피교육생 신분을 벗어나니까 한잔 생각이 나지 뭐니. 오늘따라 유난히 이 집 동동주 맛이 떠오르는 거 있지. 모처럼 우리 동기들만의 시간도 갖고 말이야.”
세희와 현주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윤아는 옆자리 손님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준수한 외모의 두 남자가 편안한 표정으로 간간이 웃어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남자가 앉은 자리에 동동주와 굴전이 나왔다.
“저희는 동동주하고 녹두 부침을 주세요.”
윤아의 주문을 받은 키다리종업원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10여 분쯤 지나자 옆자리의 남자들이 현관 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어머! 이 차장님이잖아. 차장님 친구분들이셨나 봐.”
현관에서 걸어 들어오는 이정후 차장을 본 세희가 호들갑을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정후는 친구들과 환한 웃음으로 악수를 하고는 자리에 앉으려다 윤아와 현주, 세희를 보았다.
“피곤할 텐데, 바로 안 가고….”
“어머! 차장님! 반가워요. 이런 데서 다시 만나다니. 호호호!”
윤아가 입을 가리면서도 환히 웃었다.
“친구들이야. 여기 동동주 맛이 괜찮았었대. 그런데 이 넓은 데서 왜 이렇게 가까이 앉게 된 거야? 나야 괜찮지만 세 사람은 좀 불편할 텐데.”
“저희한테 자리를 옮기라고요? 그럴 순 없어요.”
세희는 입술 왼쪽으로 길게 주름을 만들면서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당연히 그러시면 안 되죠. 저희가 이쪽으로 오면 어떻겠습니까? 저희는 이 차장과 가까운 친구들입니다.”
푸른 와이셔츠 차림의 박진호가 상황을 파악하고 순발력을 발동한다.
“저희는 괜찮지만… 오늘 차장님과 나눌 말씀도 있으셔서 만났을 텐데.”
윤아는 수줍은 표정을 애써 만들어가며 더듬거렸다.
“저흰 특별히 할 얘기 없습니다. 그저 동동주 생각나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너도 달리 할 말 없지?”
진호는 정후의 등을 툭툭 치더니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정후의 팔을 끌어당겼다. 옆에서 최태익이 미소를 머금고 진호의 하는 짓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자리를 옮겨 앉는다. 졸지에 여섯 명이 일행처럼 한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윤아야! 술값은 자동으로 굳었다고 봐야겠지?”
세희가 키득거리자 정후가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야? 세 사람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먹을 텐데.”
“어머! 차장님! 친구분들 계신다고 이렇게 달라지실 수 있는 거예요? 성별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저희가 계산하는 건 경제 논리에 안 맞죠. 호호호!”
“좋아, 그 대신 적당히 마시기야!”
“친구분들이 흉보겠어요. 저희를 술꾼처럼 보시겠어요.”
윤아가 진호와 태익의 눈치를 살폈다.
“신경 쓰시지 말고 맘껏 편하게 드십시오. 저희도 미인들과 합석하게 돼서 기분 좋습니다. 하하하!”
진호는 작은 표주박에 술을 떠서 각각의 잔에 채웠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서너 순배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사이에 약간의 껄끄러움마저 사라졌다. 윤아가 한 잔을 날름 비우고는 정후에게 권했다. 사실 세희와 현주를 데리고 이리로 온 건 의도적인 거였다.
연수원을 나오면서 버스 앞자리에 앉은 정후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친구들과 회사 부근의 주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것 같았다. 호기심도 발동했고 잘하면 합석해서 그의 사적인 부분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계획대로 돼주었다.
“차장님 친구분들도 우리 차장님하고 분위기가 많이 비슷하신 거 같아요.”
윤아가 태익에게 술을 따르며 말하자 정후는 친구들을 향해 한마디 툭 던졌다.
“조윤아씨가 지금 너희들을 욕하는 거야.”
“칭찬하시는 거 같은데?”
태익은 윤아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맞아요. 우리 차장님, 친구분들한테도 늘 저렇게 비틀어서 말씀하시나요?”
“말도 마십쇼. 언어 수준이 거의 폭력적이거든요. 이 친구하고 같이 일하시느라 고생들 많겠습니다.”
진호는 혀를 내둘러가며 이죽거렸다.
“고생 정도가 아녜요. 이기적이고, 강압적이고, 성질 사납고… 윤아야! 또 뭐 있지?”
세희가 끼어들어 장단을 맞추었다. 윤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속 좁고, 직선적이고….”라며 깔깔거렸다.
“취중 진담이라더니 벌써 취했군.”
정후가 술잔을 비우며 투덜거렸다.
“우리 회사직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차장님을 진심으로 따르거든요. 능력 있고, 포용력 있고 정의로우세요. 여직원들한테도 인기 짱이에요.”
현주가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워 말하자 정후는 현주를 보면서 “김현주씨는 술이 바로 깼네.”하고 환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그럴 겁니다. 이 친구는 우리 친구들 간에도 으뜸이거든요. 아마 함께 일하시면서 좋은 느낌 많이 갖게 될 겁니다. 실력과 인간미를 겸비한 친구니까요.”
어색해진 정후는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섰다. 진호와 태익은 말을 이어가면서 그들의 친구를 추켜세웠다. 정후는 탁월한 지능에 다재다능한 재주를 갖추었고 따뜻한 배려를 지녔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제 형편도 어려우면서 주변의 어려운 친구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면 더 어려운 친구를 도왔죠.”
“회사에서도 힘든 일을 혼자 다 도맡아 처리하시면서도 결과에 대한 공은 모두 부하직원들에게 돌리세요.”
윤아의 말에 두 친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후의 친구들은 외롭게 살아온 정후가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며 세 사람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도통 여자한텐 관심이 없으신 거 같던데요?”
윤아가 말했고 세희와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나타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좀처럼 속을 내비치는 친구가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두 친구는 손을 저어가며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학생 때는 공부에만 매달렸을 범생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스포츠도 만능에 가까울 정도로 동적인 면을 두루 갖추었다는 친구들의 말에 그가 새롭게 보였다.
“아무리 도드라진 장점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걸 보이려 애쓰는 사람은 그가 지도자이건 말단사원이건 그 조직에 흠을 낼 위험이 있는 거란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그렇지 않게 보일지라도 자신의 지혜로 그가 속한 조직을 일으켜 세우지. 마찬가지로 진정한 충신은 절대 충성스러움을 나타내려 하지 않는단다. 오로지 나라를 일으키는 데만 해도 시간이 짧기 때문이지.”
윤아는 아빠가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고사에 빗대 이정후 차장을 칭찬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 흉, 다 본 거지?”
다시 자리로 돌아오며 웃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다. 휨 없이 뻗은 대나무에 죽순이 돋는 것처럼 파릇한 기운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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