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어머니의 품이다

등산과 여행은 과거와 미래에서 지금으로 복귀하는 움직임이다

등산과 여행의 모든 것

창작 글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20_ 낯선 만남

장한림 2022. 5. 17. 23:32
반응형
728x170
SMALL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https://www.bookk.co.kr/search?keyword=%EC%9E%A5%EC%88%9C%EC%98%81 

 

온라인출판플랫폼 :: 부크크

온라인출판플랫폼, 온라인서점, 책만들기, 에세이, 자서전,무료 출판

www.bookk.co.kr

 

 

20.

 

 

낯선 만남

 

 

 

부장님!

 서울엔 가을비답지 않게 제법 많은 비가 내렸어요. 지금도 무언가를 재촉하듯 창문을 두들기는 빗줄기가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네요. 주말 오후, 모처럼 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머리를 흔들어도 상념에서 떠나지 않는 부장님께 글을 찍어내고 있습니다.

 이 편 가 만일 부장님께 전해진다면 다섯 번째 만에 저는 용기를 내는 셈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얼마나 당황하실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저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감정을 표현만이라도 하고 싶은  순수함으로 받아주시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부장님이 유럽으로 떠나기 전부터 부장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가 생겼었습니다. 저 자신도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스스로 많이 당황했습니다. 직원들이 부장님과 일하면서, 부장님을 지켜보면서 경외심과 호감을 느낄 때 저는 감히 사모하는 마음까지 생기고 말았습니다. 사소함에 호기롭고 위기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시는 부장님의 처세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기도 하지만 연정까지 강하게 따라붙는 걸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부장님은 소리 내지 않고 주변에 탄성을 자아내게 하십니다.

 부장님!

 부장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부장님은 마주 대하고 있어도 왈칵 눈물이 솟을 것 같은 반가운 분입니다. 부장님으로 말미암아 생활이 밝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이글로 인해 황당한 혼돈을 느끼셨겠지만, 잠시 후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지니게 됩니다. 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가끔 글로서나마 부장님과 단둘이 있고 싶습니다. 그건 저에게도 큰 힘과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늘 건강하세요.

                                    프리지아 올림

 

 

반응형

 

유럽지사를 맡아 독일에 지 두 달여 만에 해외 우편으로 발송된 편지다. 워드로 타이핑된 글의 겉봉에도 본사 주소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 누굴까! 누구지?

 

 다시 꺼내 읽어도 단순한 장난기의 글은 아니다. 프리지아라고? 주로 문어체로 쓴 글에서 프리지아의 존재를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본사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서른 명이 넘는다. 대다수가 미혼의 젊은 여성들이다. 출국 직, 지리산을 다녀와 현주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현주는 아니다.

 그외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연 적이 없었다. 사흘 혹은 나흘 간격으로 같은 봉투, 같은 서체의 편지가 속속 배달되었다. 숙소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이정후 부장은 가방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어제 도착한 프리지아의 편지다.

 편지봉투를 불빛에 비춰보다가 정후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문이라도 채취하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스쳤기 때문이다. 펼친 편지가 오랜 연인이 보낸 것처럼 애틋하게 느껴진다.

 

 

 「부장님!

 밤이 무척 깊었습니다. 담장의 한 그루, 은행나무의 노란 색깔조차 검정 어둠에 덮였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감을 지닌 줄은 그때까지 전혀 몰랐거든요. 제 기억 속에서 사랑은 하프의 선율보다 아름다웠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목마르게 갈구했고 애잔하게 소유하고 싶었던 그 첫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날개 찢기어진 비둘기처럼 처절하게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저는 누구에게도 사랑의 감정을 갖지 못할 거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다시부장님한테서 하프의 선율을 듣게 됩니다. 제 감정의 움직임대로 이렇게 부장님과 대화하는 것에 행복을 느낍니다. 부장님과의 대화에 가식이나 숨김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더더욱 솔직한 제 감정을 드러냅니다. 너그러운 아량으로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처음 부장님을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구석구석 회상하며 혼자서 웃기도 하고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습니다.

 첫사랑의 모래알 같은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얼굴과 살갗이 달아오름을 느끼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억제하려 애써도 망울진 봄꽃처럼 사이사이 피어오르는 감정을 현실적이 아니라고 해서 막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기통제력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강하다고 자부해온 저였지만 통제 자체가 불가능한 현실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처음보다 더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소리 없이 앓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장님!

 부장님이 대상을 좁혀 저를 찾아내시더라도 저는 부끄러워하거나 겁내지 않겠습니다. 다만, 분수처럼 다시 샘솟는 제 진심이 그로 인해 그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부장님과 이렇게나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멈추게 된다면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래도록 부장님께 향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장님! 건강 잘 챙기세요.

                                    프리지아 올림

 

 

 

 여전히 당찬 프리지아의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점점 그녀와 친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에게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나 처음의 당혹스러움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직선적인 표현방식이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글에 순수함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 솔직한 건 순수하기 때문일 거야.

 

 정후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만 빼면 프리지아의 감정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든 존중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 이번 출장길에도 그녀는 본사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겠지.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유럽에서 머무는 13개월여의 기간 동안 프리지아로부터 무려 6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받기만 해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솔한 속마음을 전달받기만 한 사실이 마음 한구석 부담처럼 작용했다. 그동안 프리지아가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에 대해 확실히 파악한 건 총명하고, 순수하며 지성적이라는 것이었다.

 

 “정후야! 난 네가 가정을 꾸리는 게 가장 큰 소원이야.”

 

 경화 고모는 친조카처럼 여기는 정후의 결혼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결혼문제를 고모는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입에 올렸다. 언제부턴가 가정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의식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족 없이 홀로 지낸 세월이 15년째다. 진작 익숙해진 혼자만의 삶을 벗어난다는 게 실감 나않았지만, 가정이라는 걸 의식할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 프리지아? 프리지아가 나랑?

 

 정후는 프리지아와 가정을 꾸린다는 데까지 상상이 미치자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상체를 일으켜 오늘 오전에 도착한 프리지아의 편지를 개봉했다.

 

 「…… 본사에 출장 오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저한테 이처럼 저돌적인 면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끝내 인내하지 못하고 부장님을 뵙기로 용기를 냈습니다. …… 부장님을 만나면 저는 부장님의 연인처럼 굴고 싶습니다. ……」

 

 - 도대체 누굴까!

 

 만나게 되면 직원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연인처럼 굴고 싶다고 한다. 구름 위로 여러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본사로 출장 오는 기내에서 정후는 내내 정체가 묘연한 그녀를 떨쳐내지 못했다.

 

 

SMALL

 

반응형
그리드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