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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18_ 베일

장한림 2022. 5. 17.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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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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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현주는 한강 둔치를 묵묵히 앞서 걷는 정후의 뒤를 죄인이 끌려가듯 힘없이 따라 걸었다. 늦여름 너무 써늘하고 음산한 한강 변에서 정후는 비교적 한적한 벤치를 찾아 앉았다.

 

- 현주는 이 현실을 어떻게 무마할 것인가. 또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아! 참으로엿 같다.

 

 한 가닥 희망으로 여겼던 가능성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현주한테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 위장된 현실에 정당성이 부여될 여지는 전혀 없을 것이다. 물 마시쏟아부은 소주 때문에 심하게 목이 탔지만,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을 깨고 정후는 크게 헛기침을 했다. 절대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 후 현주를 불렀다.

 

 “김현주!”

 

 작고 낮은 정후의 목소리에 묵직하게 힘이 실려 있다.

 

 “김현주의 성격으로 봐서 구차한 변명이나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거로 본다.”

 

 불그스레한 해거름 주변과 달리 현주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모습이다. 꿀꺽, 그녀가 마른침을 삼킨다. 그런 현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후의 속은 참담하기만 했다.

 

 - 현주야! 지금 난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거부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이 현실 앞에서 과연 너는 무엇을 확인해 줄 거. 지금부터 우린 얼마나 모진 얘기들을 나누어야 하는 거니.

 

 “죄송해요. 말씀드리려고 여러 번 기회를 만들고도.”

 “…….”

 “그만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금방이라도 흐느낄 것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깊이 잠겼다가 이어졌다.

 

 “왜 나한테 털어놓으려 했지?”

 “죄짓는 기분이었어요. 속이고 있다는 것이 무척 죄스러웠어요.”

 

 현주의 말이 이어지는가 싶어 정후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멎었는데 현주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제가잘못했어요.”

 “뭘 말하려 했고, 뭐가 잘못된 건지, 제대로 얘기해.”

 

 한참 만에야 단조롭게 표현하는 현주에게 정후는 목소리를 높였다가 말미를 낮추었다. 마치 장교가 양심 불량부하 사병을 대하는 것처럼 현주를 대하는 정후의 태도에 온화함 같은 것은 없었다.

 

 “진작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잘못이었어요.”

 “오 전무가 네 그이였다는 사실을 말이지.”

 

 현주의 말에 간격이 길어지자 정후는 답답함을 가누지 못하고 먼저 화두를 꺼냈다. 정후는 현지처니, 정부니 하는 신문 사회면에서나 나올법한 단어는 애써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실낱같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에 현주에게서 듣고자 기다렸던 말을 정후가 먼저 끄집어냈는데 그녀는 숨죽인 채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정후는 현주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현주의 눈물이 이미 턱밑까지 흐르더니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 씨팔! 울면 어쩌자는 거야. 지금 울고 싶은 건 나라고. 눈물 따위로 이 상황을 땜질하자는 건 아니겠지.

입을 꾹 다문 채 목 울음을 삼키는 현주에게서 고개를 돌린 정후는 담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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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됐니?”

 

 정후는 연기를 뿜으며 나직이 물었다.

 

 “입사하고 2년쯤 지나서

 

 현주가 기어드는 목소리를 간신히 뱉어냈다. 상황은 예측했던 것보다 더 나쁘고, 더 파멸적으로 치닫는다.

 

 - 그렇게 3년이나 보냈단 말이지.

 

 정후의 눈빛이 다시 분노로 이글거렸다.

 

 -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오 전무와 구멍 동서가 되어버렸단 말이지. 크흐흐흐! 고모라고 부르는 사람의 남편과 구멍 동서.

 

 순간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서 나는 건지, 수풀 속에서 풍기는 냄새인지 알 수가 없다. 코를 틀어막고 싶었다. 정후는 담배를 이어 붙이고는 연기와 함께 나직하게 읊조렸다.

 

 “기막히게 잘 짜인 시나리오 한 편을 읽은 기분이다.”

 

 비아냥거린 정후는 다시 정색하고 물었다.

 

 “어떻게 오 전무가 있는데 나랑 관계할 수 있었지?”

 

 정후의 목소리가 쇳조각으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긁힘이 현주의 귓속을 차갑게 후볐다. 현주가 가장 두려워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현주가 넘어야 할 험한 장애물이었다.

 

 “사랑하게되었어요.”

 “뭐라고 했지?”

 “사랑한다구요. 차장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철썩! 현주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정후의 손이 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아악!”

 

 깜짝 놀란 현주의 비명과 함께 긴 생머리가 산발로 흩어졌다.

 

 

 

 

 “고모의 남편과 삼각관계를 만든 게 사랑이라고?”

 

 구멍 동서라고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던 정후는 주저앉은 현주에게 더욱 강하게 쏘아붙였다.

 

 “내 상식으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오 전무와 너는 나뿐 아니라 회사까지 농락했어.”

 

 현주는 정후의 허리를 부여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잘못했어요. 흑흑, 제가잘못했어요.”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런 모멸감은 처음이야.”

 

 정후는 창자까지 뒤틀리는 쓰라림으로 신물이 넘어왔다. 먹지 못할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속이 거북스러웠다.

 

  - 오 전무는 도대체 왜 얘를 본사로 불러올린 거지. 자기 정부를 불러들여 같이 일해야 할 정도로 갈급해 하는 게 뭐지?

 

 무얼 밝혀낼 만큼 정신이 맑지 못했다. 그저 황당하고 침통했다. 그 이유가 무어든 가까운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대해 정후는 속이 비틀려졌다.

 

 “줄곧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현주는 흐느낌을 늦추더니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건 거짓말이야. 죄책감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야 해.”

 

 현주는 정후의 탁한 저음에 분노로 인한 핏덩어리가 고여 있다고 느꼈다. 그의 입술에 핏물이 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현주는 어렵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의 형상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차장님을곧 유럽으로 파견하실 거라서.”

 

 현주는 고인 눈물을 훔치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그런데그만 제가 차장님을

 

 정후는 현주를 쏘아보다가 조현욱 사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 차장 아니면 겨우 일궈놓은 유럽시장을 살릴 사람이 없어. 오 전무가 적극적으로 추천하긴 했지만 내 생각도 그래. 이번에도 수고 좀 해줘.

 

 “그게 결국은 오 전무의 생각이었군. 너를 안전하게 곁에 두려고.”

 “오 전무님도 유럽을 중요한 시장으로 여겼기 때문에

 “시끄러워.”

 

 신음처럼 힘겹게 새어 나오는 현주의 목소리를 몰아친 돌풍이 삼켜버렸다

 

 - 그런 자가 사장님의 매제라니. 그처럼 착한 고모의 남편이라니.

 

 정후는 시집가는 날, 홀로 남겨진 조카가 안쓰러워 눈물짓던 경화 고모가 떠올랐다. 고모가 가엾다는 생각이 몰려들었다.

 

 “차장님! 제가 잘못했어요.”

 

 팔을 붙들고 울먹이는 현주를 뿌리친 정후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 씨팔! 어쨌든 나는 제삼자야. 제삼자 같지 않은 제삼자. 이 추하고 혐오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련다.

 

 잠시 생각에 젖던 정후가 벌떡 일어서자 현주도 엉거주춤 정후를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정후는 빠른 걸음으로 혼자 둔치를 빠져나갔다. 원수의 주검을 문상하고 돌아서는 기분이 들어 정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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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주는 이대로 그를 보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견뎌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내내 마음속에 들어찬 공허감에 시달리다가 현주는 공항으로 향하는 정후를 쫓아갔다. 공항버스에서 내린 정후는 현주를 보고 깜짝 놀랐다. 논현동 회사 앞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온 현주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

 

 “어떻게 아셨어요?”

 

 대합실로 들어서는 정후의 뒤에서 현주가 물었다.

 

 “그게 궁금해?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왔어?”

 “말씀드리려 했는데, 먼저 아셔서 당황했어요.”

 “너한테 들어서 알게 되었더라도 배신감이 생기기는 마찬가지야.”

 “죄송해요.”

 “지난 일이.”

 

 과연 다 지난 일일까. 현주는 정후가 지난 일로 넘길 수만 있다면 모든 고리를 풀어버리겠다고 마음먹어왔다. 그의 복잡한 심사가 낯선 이국에서도 이어질 것 같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흙더미가 풀어져도 금세 정화되는 계곡물처럼 어지간한 나쁜 일에도 빠른 속도로 자정력을 보여주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이번만큼은 쉽게 앙금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은 비장함이 엿보여 현주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잊어버리실 수는 없나요,”

 

 정후는 죄스러움을 떨쳐내지 못한 현주의 눈이 사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했다며 오열하던 현주의 모습이 야수를 피해 이리저리 쫓기는 새끼사슴 같다고 생각했다.

 

 “잊을 수밖에. 너희 두 사람의 관계에 의미를 두면 나만 더 초라해질 뿐이지.”

 

 현주는 너희 두 사람이라고 부러 골라 표현한 정후의 어휘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연상되었다.

 

 “제가 몹쓸 짓 한 건 두고두고 씻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차장님 상처가 빨리 아물었으면 좋겠어요.”

 “네 말은, 다 묻어두고 모른 척 넘어가자뜻인가?”

 “안 좋은 일이잖아요. 좋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차장님이 잊어버리셨으면 해요.”

 

 정후는 이미 풍랑이 지난 후 고요를 맞은 것처럼 말하는 현주가 맹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편리한 이론이야. 제삼자니까 빠지란 소리처럼 들리는군.”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잘 아시잖아요. 저는 차장님 아픔이 빨리 치유되었으면 하는 맘뿐이에요.”

 “치유될 아픔이 아니.”

 

 뭉친 침을 삼키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무거운 짐일 수도 있어. 너한텐 아무렇지 않은 게 다른 사람한테는 죽음 같은 고통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정후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네가 할 일까지 신경 쓸 만큼 내가 여유로운 줄 알아? 화가 났어도 그렇게 말하는 게 결코 옳은 반응은 아닐 것 같았다.

 

 “내가 네 처신을 지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 충분히요.”

 “흐흐흐! 왜 그렇다고 생각하지?”

 “사랑하니까요.”

 “누가? 네가 날? 내가 널?”

 “…….”

 “후후! 제발, 엿 같은 소리 좀 작작해라. , 널 사랑하지 않아. 앞으로도 널 사랑하는 일 따윈 눈곱만큼도 없을 거고.”

 

 정후는 심한 갈증을 느껴 글라스의 냉수 한 컵을 순식간에 들이켰다. 이 와중에 사랑 타령이라. , 뻔뻔스럽고도 웃기는 계집이다. 정후는 풀린 눈으로 현주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풀어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야. 너는 너대로 네 인생을 사는 거고, 나는 나대로 내 뜻을 따르면 되는 거야.”

 

 차분한 말투였지만 막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정후는 현주가 오염구덩이를 벗어나 맑은 모습을 되찾았으면 했다. 정후는 나름대로 정태와 현주의 관계를 되짚어보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이성적이고 치밀한 판단에 따른 처세와는 많이 동떨어진 현주였다.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교감한다는 걸 정후는 잘 알고 있었다. 하나의 눈가림이 비밀로 변질되어 거짓을 생활처럼 하게끔 했다는 생각이 들자 정후는 현주에 대한 적개심이 다소 누그러지는 걸 의식했다.

 

 - 나를 위로하려는 너야말로 가장 가련한 희생자이고 슬픔의 표상일지도.

 

 누구를 질기도록 미워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이 이때만큼은 한심스레 여겨지면서도 정후는 현주가 측은해지는 것이었다.

 

 - 너 역시 나처럼 오랫동안 홀로 생활해온 탓에 외로움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겠지.

 

 그래서 유부남이자 상사의 호의를 사랑인 양 착각에 빠져 살을 섞는 깊은 관계로 이어졌을지도. 20대 중반의 3년간, 여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사랑과 불륜을 혼동하며 보낸 현주야말로 어쩌면 이 화두의 최대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상대적으로 정태에 대해서는 좀처럼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현주야, 너한테는 슬픈 흔적이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정후는 서러운 상처만 남게 될지도 모를 현주의 끝자락이 불현듯 안타까웠다.

 

 - 나는 다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정후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현주는 출국장으로 들어서는 정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도 주지 않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가 사라지자 다시 시린 공허가 몰려들었다. 영원히 맞닿을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평행선이 현주의 눈앞에 가로놓였다.

 현주는 대합실에 그대로 앉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무릎으로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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