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어머니의 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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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과 여행의 모든 것

창작 글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10_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장한림 2022. 5. 15.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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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https://www.bookk.co.kr/book/view/133094

 

 

 

10.



북한산은 곳곳에 잔설이 있었고 그늘진 곳에는 얼음이 얼어있었다.

겁을 상실한 막무가내 베팅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상대의 행운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망연자실하던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여치는 맨 꼭대기, 백운대에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묵연히 내던진 시선이 머무는 허공에 그날 울산에서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여치는 마담 네 장이 아니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었다. 돈 때문에, 돈이 없어서 사람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날 울산의 하우스 포커판에 여치는 그런 다짐을 하며 앉았었다. 마지막 판에서 마도로스 최의 패가 에이스 타이틀임을 확인했을 때 크윽, 하고 자신의 목에서 난 울림이 누군가의 호흡이 멎는 소리처럼 들렸었다.

온몸이 굳어버렸다. 돈이 없어 죽은 이의 싸늘한 시신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날의 판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람의 생사가 달려있었으므로 억지에 가까운 심정으로 하우스에서 하루를 보냈다.

마지막 판, 마지막 패, 그 결과는 얼마나 절묘했던가. 그때의 승부를 떠올리던 여치는 내딛는 길만이 이길 확률이 크다고 되뇌었다. 멈추느냐, 나아가느냐의 갈림길에 섰을 때 여치는 대개 나아가는 쪽을 취했다.

내디디고 전진하는 쪽으로 결정했을 때 매번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행운이 따랐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담 포커가 떠준 것처럼.

 

- 한 번 더 내디뎌야 할 일이 생긴 거 같아.

 

자신에게 닥친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 또다시 그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 . 역시 내딛는 방법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물러서거나 멈추면 엉망이 되고 만다. 들어왔던 행운은 소극적 선택을 취하는 순간, 다른 것들까지 챙겨서 빠져나갈 수가 있다. 여치는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다시 한번 선택해야만 해. 그날 울산에서 겨우 요행에 불과한 마담 포커를 마냥 앉아서 기대할 수만은 없어. 지금은 일어서서 적극적으로 마담 한 장을 찾아 나서야 해. 그래야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어.

여치는 그래서 인위적인 그 뭔가가 필요하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카이저, 카이저 선배. 이럴 때 왜 그가 떠오르는 걸까.

그 역시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을 감행했었다. 그러나 자신과 달리 카이저 선배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여치는 자신의 인생 항로를 뒤바꾼 다섯 살 위의 고향 선배이자 고등학교 선배, 카이저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삶의 중차대한 갈림길에 늘 그가 있었다. 포커의 귀재라는 의미로 붙여진 별명. 카드 기술에 관한 한 최고라고 인정하여 홍사진이 붙여준 닉네임이 카이저였다.

그가 생각나면 그의 오른 손목이 먼저 떠오른다. 잘려 나간 그의 손목은 마치 도살장에서 썰어진 우족 같기도 했고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도 느껴졌다.

북한산 도선사 아래, 산에서 내려와 주점에 혼자 앉아 소주를 홀짝이는 여치의 뇌리에 제멋대로 펄쩍거리는 그의 손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그의 손목은 내 인생에도 커다란 획을 긋고 말았었지.

 

반만 마시고 꺾으려던 잔을 그대로 부어 넣은 여치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이 친구는 절대 몰랐어요. 저 혼자 저지른 범행입니다. 이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따라왔을 뿐이라니까요.”

 

경찰과 검찰에서도, 법정 최후진술에서도 카이저는 초지일관 그렇게 말했다.

 

무기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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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후배를 지켜주려 했던 카이저 선배는 최종 선고 공판에서 판사의 선고가 떨어지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흘깃 쳐다본 그의 모습은 마치 석고 조각상 같았다. 자신은 영원히 갇히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후배인 여치가 1년 형의 선고를 받자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머금었었다.

살인방조죄의 죄목은 무혐의 처리되었지만, 범인은닉의 혐의까지 벗을 수는 없었다. 카이저는 항소하지 않았다. 여치 역시 1년의 형을 달게 받았다. 1년을 살고 나온 여치는 제일 먼저 카이저를 찾아갔으나 그는 끝내 면회를 거절했다.

한 병의 소주를 비운 여치는 한 병을 더 시켰다. 안주엔 손도 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손목이 사라지지 않아 입맛을 잃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산자락 너머로 시선을 박는다. 그 위로 또 다른 한 사람이 파스텔톤 하늘에서 말간 미소를 짓는다. 돈 버는 방법은 몸 파는 것밖에는 모른다던 여자, 그 여자 이름이.

얼굴은 생생한데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해준 그녀, 동정을 주었었다. 그때 아주 우연히, 그리고 느닷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대뜸 말했다.

혹시, 같이 잘 수도 있어요? 돈만 주면요. 그래요? 만납시다. 호호호! 모처럼 재미난 사람을 만난 거 같은데요. 그렇게 그녀를 만났었다.

만나서 무작정 강원도로 향했고 오대산 소금강 자락의 민박집에서 계곡에 철철 넘치는 물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스무 살쯤이나 되었겠다 싶었는데 그녀는 스물한 살, 동갑이었다. 유난히 웃음이 많았다. 계곡물처럼 맑게 소리 내어 웃을 때는 그녀가 외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팬티를 내리고 브래지어마저 집어 던지며 싱긋 윙크했을 때 그녀의 삶이 서러울 거라는 느낌은 사라졌었다.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였지만 군살 하나 없이 탄력적인 몸매였다.

어머, 처음인가 봐요. . 호호! 이리 와요, 내가 알아서 해줄게요. 그녀의 작은 몸에서 그처럼 뜨거운 열이 발산한다는 게 신비스러웠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녀를 떠올리다가 여치는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멍하게 눈길 머문 먼 하늘에는 조각조각의 구름이 양 떼처럼 펼쳐져 떠오르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푸른 공간을 유영하고 있었다.

 

 

 

형님! 큰형님! 제발.”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여치의 얼굴에 날아온 건 사정없이 내지른 구둣발이었다. 구두 밑창에 정통으로 맞고 나동그라진 여치의 얼굴에서 뜨거운 핏물이 흘렀다.

코에서 흐른 건지, 입에서 터진 건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른 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우족 같은 게 툭 하고 여치의 몸 옆으로 떨어졌다.

살아있는 황소의 다리에 힘껏 도끼질을 가했을 때 떨어져 나간 발목, 피투성이가 된 채 고무공처럼 반동을 일으키는 마지막 움직임. 생물에서 분리된 몸 일부가 여치의 옆에서 툭툭 튀다가 구르더니 이내 푸줏간의 썰린 고기처럼 축 늘어졌다. 여치는 자신도 모르게 썰린 고기를 움켜잡았다.

 

아아악!”

 

카이저 선배의 비명이었다. 여치는 그 소리가 자신이 내지른 비명인 줄 알았다. 아팠다. 너무 쓰리고 아팠다. 손목 하나 잘리는 게 그토록 아픈 줄 몰랐다. 남의 손이 잘렸는데 그처럼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될 줄이야.

 

여치! 네놈 의리가 가상하다. 예외적으로 이쯤에서 끝내마.”

 

오야붕은 혼이 나간 카이저에게 고개를 돌려 다시 말했다. 굵은 저음이었다.

 

카이저, 다시는 이곳에 모습을 보이지 마라. 여치, 너도.”

 

오야붕이 한 말처럼 예외였다. 여치는 그가 내뱉는 싸늘한 경고가 마치 부처님의 자비로운 용서처럼 들렸다. 설사 홍사진이 목을 동강 내더라도 미간조차 함부로 꾸기지 못할 거로 생각했었다.

달리 할 말이 있을 수도 없었거니와 절반 이상은 죽은 목숨이라 각오하고 무릎을 꿇는 중이었다. 음으로 죽음을 마주한 상태에서 넋을 빼앗긴 채, 숨이 붙어있는 잠깐의 시간을 그렇게 숨조차 죽이고 버티는 중이었다.

죽음의 문턱은, 삶과 죽음의 개념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이후 최악의 가설로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적응하기 어려웠다. 온몸에서 땀이 흘렀고 쥐가 났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죽음, 그깟 죽음. 그저, 별거 아닐 수도 있다고 인식했었다. 그랬었는데. 막상 죽음을 거울처럼 마주하고 보니 이처럼 정신조차 가눌 수 없다는 게 부끄러웠다. 참으로 쪽팔렸다.

고등학생 때였지만 어쨌거나 또래의 세계를 평정한 바 있던 여치였다. 그래서 조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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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진, 충북 단양과 제천 일대를 한 손아귀에 움켜쥔 사진파의 보스. 고등학교 2학년을 막 마친 겨울방학 때, 말로만 들어왔던 그를 처음 보게 되었다.

2학년 배지를 달고 단양의 고등학교 세 곳을 깡다구와 주먹으로 제압한 여치였지만 막상 그에게 처음 인사를 하면서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가 누구인가. 주먹세계를 동경하던 그 지역 학생들에게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고교 대선배이기도 한 그가 너무도 큰 바위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학생이건, 건달이건, 양아치들이건 간에 적어도 주먹깨나 쓰거나 욕지거리라도 내뱉을 줄 아는 무리 사이에서 그는 충청북도 땅에서만큼은 하늘과 동렬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의 평소 모습은 하늘 같은 카리스마로 인식해왔던 사진파 보스의 명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목화솜처럼 부드럽게 조직을 배려하며 챙겼다. 때로는 부하들의 어려움을 살갑게 어우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치의 눈에 어림짐작으로만 느껴왔던 조직의 그것과 달리 그의 조직에는 상하 간에 각이나 선이 선명하지 않은 듯 보이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홍사진은 일단 맞서야 할 일이 생길라치면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그의 눈에 핏기가 돌면 움직이던 모든 것이 멈추었다. 적에게, 특히 배신자에게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그였다.

그런 그가 예외적으로 배신한 부하의 병원을 방문했다. 게다가 봉투까지 건네준다.

 

큰형님! 고맙습니다.”

 

여치는 병원 현관까지 쫓아나가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널 보고 저놈을 살려주는 거다. 네 놈이 가상해서 말이다. 카이저가 퇴원하는 대로 여길 떠나라. 다신 마주치지 말자.”

큰형님! 잘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다. 사진의 차가 병원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여치는 그의 말을 꾹꾹 눌러 담으며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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