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13.
우연 그리고 필연
“오늘도 일하는 거야? 기특한데!”
“서울에 오니까 딱히 갈 곳도 없고…, 그래서 나왔어요.”
“왜 그이가 서울에 있지 않아?”
정후는 현주의 애인을 그이라고 불렀다. 현주는 정후의 말을 흘려 넘기고 “휴가 떠나세요?”하고 물었다.
“응.”
“산에 가시나 봐요?”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로 떠나기 전에 정후는 꼭 한 번 지리산을 종주하고 싶었다. 입대하기 전, 이틀의 시간을 내어 종주했던 지리산의 추억이 생생했다. 유평 대원사에서 구례 화엄사까지의 횡단은 혼자만의 추억으로 남았었다. 이번엔 그때와 역으로 등반로를 잡았다.
이른바 화대종주,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의 산길을 일컫는다.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토요일 오전, 마무리해놓은 서류를 동남아 각 지사에 전송하고 출발할 요량으로 사무실에 들렀는데 부산공장에서 막 발령받아 올라온 김현주 대리가 나와 있었다.
“차장님!”
현주가 빠른 걸음으로 정후에게 다가오면서 부른다.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
“따라가다니, 어딜 말이야?”
“지리산 가신다면서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느닷없이 덤벼드는 현주의 말을 장난처럼 받아들인 정후는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김 대리는 지리산 무릎까지도 못 올라가.”
“저도 산 잘 타거든요. 혼자 가시면 심심하잖아요.”
“하나도 심심하지 않아. 원래 수행은 고독한 거거든.”
“저도 따라갈래요. 저도 수행하고 싶어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현주는 애교를 부리며 졸라댔다.
“내일 새벽부터 산행해서 다음 날까지 걷는 거야.”
“그게 어때서요? 금방 준비하고 올게요.”
본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원룸을 얻은 현주는 잠깐 사이에 등산준비를 하고 다시 사무실로 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변화에 정후는 당혹스러웠지만 결국 현주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산행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함께 등반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우연하고도 돌발적으로 현주와의 지리산행이 이루어졌다.
어둑해질 무렵에야 구례에 도착했다. 구례에서 성삼재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있었지만, 정후는 처음 예정했던 대로 화엄사에서 산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예전과 달리 등산로 입구의 민박집들이 아담한 양옥으로 변해있었다.
“방 한 개 값은 현주가 내.”
“무슨 말씀이세요. 방을 왜 두 개씩이나 얻어요? 돈이 남아돌아요?”
현주는 펄쩍 뛰면서 방을 하나만 얻으라고 했다.
“방을 같이 쓴단 말이야?”
“같이 있으면 절 어떻게 하시려구요?”
“뭐? 허 참.”
정후는 무어라 대꾸할 말을 잊고 말았다. 사실 방 두 개를 얻어 따로 쓴다는 것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일 거였다. 현주는 쌀을 씻어 밥을 했고 몇 가지 반찬도 만들었다. 오래 자취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손놀림이 빠르고 야무졌다. 산에서의 먹을거리들을 준비하며 환하게 웃었다.
“종주하려면 먹을 게 충분해야 해요.”
정후는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산에 많이 다녀봤어?”
“몇 번 가본 정도죠, 뭐.”
“너 같은 막무가내는 첨이다.”
“무대포적인 면이 있긴 해요. 호호호!”
정후와 현주는 산행할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여름인데도 밤이 되니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후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현주와 한방에 있기가 껄끄러웠다. 혼자 오리라고 맘먹었기 때문에 책을 가지고 왔지만 혼자서 책을 읽고 있는 것도 그럴듯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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