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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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컨드 레이디’, 영부인領夫人을 지칭하는 퍼스트레이디에 빗댄 제목. 대통령의 두 번째 여자 혹은 숨겨둔 여자쯤으로 의미를 부여한 제목이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정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나리오로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된 남자, 사랑하는 남자의 신분 변화와 함께 비틀려진 애정, 그런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판단이 듦과 동시에 복수를 택한 여자. 그 여자 세컨드 레이디와 대통령, 두 사람을 둘러싼 권력 상층부, 그리고 정치판의 비리와 음모 사이의 피 말리는 갈등을 기막히게 묘사했다.
전임 대통령 중 누군가를 슬그머니 빗대는 것 같으면서도 현 정권의 부조리를 은근히 파헤치고 있다. 예전 같으면 감히 영화로 만들 꿈도 꾸지 못할 내용이었다.
정민은 시나리오를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고, 동시에 대박을 예감했다. 정민은 즉각 유광진 감독을 불러 ‘세컨드 레이디’의 원고를 건넸다. 유 감독은 JM 시네마의 전속연출자로 있던 터라 그에게 남 교수의 시나리오를 검토시키고자 건넨 것이다.
정민이 시나리오에 대해 호평을 하자 현태가 계약에 대해 언급했다. 의외로 상당히 군침 도는 계약조건을 제시하는 거였다. 계약의 대전제는 흥행에 따른 러닝개런티 조건이었다.
처음엔 극장상영을 통한 총매출액의 20퍼센트를 작품료로 달라는 현태의 말에 정민은 기겁하고 거절했다.
“제작비와 광고비, 출연료 등을 빼면 중박 정도의 흥행을 올리고도 수지가 맞지 않는 게 영화제작의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이익금도 아닌 매출액의 20프로라니, 전 황당했지요. 사실 시나리오만 좋다고 영화가 모두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지금보다 훨씬 앞섰을 겁니다.”
영화 얘기로 들어서자 정민은 스스로 도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규태도 편안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건 수사를 위해 왔다는 걸 잠시 망각하기도 했다.
그 대신 유료 입장객이 1,000만 명에 미치지 않으면 작품료를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1,000만 명을 초과했을 때에 한해 총매출 대비 20퍼센트의 작품료를 달라는 남 교수님의 파격적인 제안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얼추 추산해도 수지가 맞더라고요.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지만, 남현태 교수가 누굽니까. 자신감 가득한 남 교수님한테서 이미 대박을 예감했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막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 유광진 감독이 환한 얼굴로 긍정적 의사를 표시하자 박정민 사장은 주저 없이 남현태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출연료 등의 제작비와 광고비, 일체의 관리비를 제하고도 200만 명만 들어서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판단이 섰지요. 대략 어림잡아 200만 명 정도를 손익분기점으로 잡은 거죠. 영화사 측이 거부할 수 없게끔 제반 조건을 맞춰서 들고 온 남현태 교수의 패키지 딜package deal에 구미가 당겼던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제작뿐 아니라 배급까지 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남 교수의 제안이 맘에 들었던 거지요.
남 교수의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제자인 오수연을 여주인공으로 발탁하자는 것이었다.
오수연은 두 편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경력밖에 없는 무명의 신인이라 할 수 있다. 연기력만 따라준다면 이미 알려진 흔한 얼굴보다 신선한 이미지의 신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주연 여배우로 손색이 없었다. 연기력 또한 남 교수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데다 그의 애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확인 절차가 필요치 않을 정도였기에 정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계약서에 사인했지요,”
‘세컨드 레이디’를 처음 화두로 올리고 불과 일주일 만에 계약이 이루어졌다.
출연자들의 섭외를 마치자 영화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웬만한 영화의 평균치에도 미치지 않는 예산, 생각보다 훨씬 적은 제작비가 소요되었기에 정민은 느긋했다.
더구나 남 교수가 촬영 현장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편집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보수 없이 총연출자의 역할까지 맡은 셈이었다.
규태는 차분하게 정민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제동을 걸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을 다 듣기로 했다. 사건과 관계가 있건 없건 능변인 그의 얘기는 우선 재미가 있었다. 정민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국내 최고의 영화평론가이며 영화에 대한 대중 선호도를 구석구석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남현태 교수의 노하우 덕분에 세컨드 레이디는 시사회부터 들끓기 시작했지요.”
금상첨화로 정치권 특히 여당과 청와대에서 잠시 보였던 민감한 반응이 오히려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작용해 주었다. 영화는 상영과 동시에 문화 이슈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기존의 흥행기록을 속속 깨뜨렸다.
‘세컨드 레이디’를 관람한 다수의 관객은 영화관을 나와서까지 마지막 부분의 삽입곡 레퀴엠requiem의 슬프고도 처절한 선율에, 그러면서도 장중한 음향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남 교수의 요청으로 빠른 박자의 레퀴엠이 다시 느릿하게 바뀌며, 영상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사실주의적인 내재음內在音을 최대한 줄이고 음속의 완급을 적절히 조절한 리듬이 관객들의 정서를 영화 속으로 몰입시켰다.
표현에 적극적이고 상징적 의미들에 주력하는 습성 역시 남 교수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그의 입김이 다분히 배어서 만들어졌다.
음악평론가인 S 대학의 이숙희 교수는 영화의 줄거리를 묘사하면서 주제음악을 ‘세컨드 레이디’만큼 적절하게 삽입한 예를 본 적이 없다고 호평했다. 여주인공의 소용돌이치는 심리상의 격변과 곧 치닫게 될 비극이 관객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는데 음악이 충분한 역할을 했다면서 박하기로 유명한 영화평론가 오성천 씨도 찬사를 보냈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대다수는 실제로 역대 대통령 중 누군가의 실체를 영화의 내용에서 발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화 밖에서도 자신이 본 영화에 지속해서 몰입하게 되는 건 관객의 심리를염두에두고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게끔 연출한 덕분이었다.
실제로 영화는 근거도 없이 K 전 대통령과 미스코리아 진 출신인 N 씨의 스토리라는 루머로 번져 또 다른 얘깃거리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세컨드 레이디’는 영화 체험의 커다란 심리 요소인 파이 현상과 잔상효과를 톡톡히 담아낸 영화라면서 정민은 어려운 말로 긴 얘기를 마무리했다. 결국, 현재까지 1,800만 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국내 영화사상 초유의 히트를 치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정민과 현태 두 사람은 사업뿐 아니라 골프, 해외여행 등 생활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며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세컨드 레이디엔 오수연 씨가 아니라 현소영 씨가 여주인공이었잖습니까?”
정민의 얘기에 조용히 귀 기울이던 규태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정민은 마신 물컵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랬죠. 세컨드 레이디의 연출을 맡았던 우리 유광진 감독이 오수연을 오디션까지 시켰고 꽤 만족스러워했는데 웬일인지 남 교수님은 촬영 직전에 현소영으로 배역을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하기는 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어요. 작품을 완벽히 하기 위해서라는 데야….”
현소영은 재학 중에 M 방송사의 신인 탤런트로 발탁되기는 했지만, 영화나 방송 출연경력이 전혀 없었다. 간간이 조연급으로 대학가 연극무대에 섰던 게 고작인지라 무명의 신인이기는 오수연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작가의 입김이 크더라도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영화계의 현실에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규태가 물었다. 정민은 빙긋이 웃다가 덧붙였다.
“저도 나중에 알았지만, 현소영은 졸업 전부터 남 교수님과 깊은 관계였더군요.”
“그랬습니까?”
“그런 걸 미리 알았다고 해도 여배우가 교체되는 걸 반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촬영이 시작된 후라면 모르지만요.”
“오수연 씨의 실망이 컸겠는데요.”
규태는 오수연이라는 아가씨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다. 사건 후 얼핏 보았지만, 현소영에게 뒤지지 않는 미모다. 그녀가 여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 규태는 잠시 ‘세컨드 레이디’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엔 그랬지요.”
정민의 대답에 규태는 그녀의 심정이 참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성공했으니 더욱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았다.
“워낙 낙천적이고 착한 아가씨인지라 금세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더군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박 사장님이 오수연 씨를 알게 된 거였군요.”
그녀가 금세 밝은 모습을 되찾는데 박 사장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군요. 그런 뜻으로 규태가 말하기도 했지만, 정민도 그렇게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그게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수연이와 특별한 관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은 특별한 관계? 특별한 관계란 어떤 관계일까. 그러나 규태는 그 관계의 내용을 묻지는 않았다. 물 한 잔을 더 마신 정민이 답변을 보탠다.
“수연이는 배우로서의 재능도 갖췄지만, 시나리오작가가 지녀야 할 잠재력 또한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애가 원하면 배우로든 작가로서든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호감이 가면서 생긴 생각들이지만요.”
정민은 수연과 가까워지면서 그녀가 얼굴이 알려져 스캔들로 인한 구설수의 사정권 내에 있는 배우로 크기보다는 작가로서 우뚝 서기를 원했다.
영화 사업의 성공은 곳곳에 널려 있는 스타보다는 단 한 가지라도 훌륭한 작품만 있다면 성공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배우와 하나의 소중한 작품은 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자의 비중이 크다.
그렇게 비유한 정민의 설득을 수연이가 받아들였고, 지금은 배우의 길을 거의 포기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면서 정민은 오수연과의 관계 설명을 마쳤다.
규태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어졌다. 대략 특별한 관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여자로서 옆에 두고도 싶었지만, 수연이한테 명작을 생산해내게 하고 싶은 욕심이 강했지요. 그 애를 통해 투자 욕구가 동했다고나 할까요. 전, 죽을 때까지 영화인이고 장사꾼이라….”
정민이 묻지 않은 속내까지 털어놓자 규태는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스몄다. 조사나 신문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일개 말단 형사에게 지나칠 정도로 장황하게 배경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자신의 전문분야를 설명하는 자아도취적 언급이 없지 않았으나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 또한 적지 않았다. 중간에 그의 아내가 병실 문을 열기도 했는데, 정민은 오히려 아직 얘기 중이라며 아내를 나가 있게 했다.
“이 형사님께서 이 사건 담당 수사관이시니까 더욱 빠른 해결을 바라는 마음으로 솔직하게 또 소상히 말씀드린 겁니다.”
정민은 다소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서 말을 맺었다.
“박 사장님의 심정, 알고도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요. 네 분의 그 날 여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정민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 주변에선 아무도 모르지만, 다른 세 사람은 어떨는지 알 수 없지요.”
“네, 그렇겠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너무 피곤하게 해드렸습니다.”
규태는 아무렇게나 뻗친 덥수룩한 머리숱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실 앞까지 나온 정민은 규태에게 악수를 청하며 부탁했다.
“수고해 주십시오. 꼭 잡아주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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