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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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밤 아홉 시가 막 넘었을 거예요.”
소영은 거실의 벽시계를 가리키며 그날 사건 직전의 시간을 말했다. 규태는 그런 소영을 편안하게 바라보았다.
지방도로에서 왼편으로 강을 끼고 30여 분쯤 지나자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로등도 없는 유난히 한적한 길이었는데, RV차량 한 대가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길을 막고 세워져 있었다.
길이 막히자 박정민 사장이 상향등을 깜박여 비켜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사내 한 사람이 허겁지겁 양팔을 흔들며 뛰어오더니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챙이 없는 검정 털모자를 썼던 것 같아요. 너무 추워서인지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어요.”
상황을 설명하는 소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박 사장님이 윈도를 내렸지요. 그 남자가 도와달라더군요. 카오디오 음악 때문에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배터리니, 방전이니 하는 소릴 얼핏 들었어요. 아무튼, 차가 고장 났다는 말 같았어요.”
규태의 풀렸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소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므렸다 벌어지기를 반복하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더더욱 흥미를 돋웠다.
박 사장님이 귀찮다는 푸념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비스듬하게 그 차 옆으로 주차했어요. 그리고는 트렁크를 열고 차에서 내렸지요. 잠깐, 아주 잠깐 사이였던 것 같아요. 쾅, 하고 트렁크 닫히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하면서 소영은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규태는 그녀의 숨소리가 가느다란 휘파람처럼 들렸다.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규태는 안쓰러운 눈빛을 지었다.
차 안에 그대로 앉아있던 세 사람이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도움을 청했던 사내가 검은색 넥게이터를 코까지 올린 채 운전석 문을 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또 다른 복면의 사내가 세차게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면서 남 교수에게 흉기로 보이는 무언가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뒷자리의 두 여자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고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고개를 숙였다. 조수석으로 침입한 사내와 남 교수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자 운전석 쪽으로 몸을 들이민 사내가 합세해 남 교수의 목을 꺾었다.
그리고 남 교수의 억억거리는 신음이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되는 순간 오수연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운전석 쪽의 사내를 밀쳤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가녀린 여자의 힘으로는 억센 강도한테 별 충격을 주지 못했다.
사내가 팔을 휘두르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현소영은 오수연을 끌어안으며 더욱 겁에 질린 채 몸을 웅크렸다. 얼핏 빨간 핏물이 남 교수의 상체를 물들이는 것 같았다.
현소영은 거의 혼이 나가 비명만 지르고 있었는데 정신을 가다듬은 오수연이 자기 쪽의 문을 열더니 내리면서 현소영을 잡아끌었다.
앞 좌석의 소란한 틈을 타서 승용차 밖으로 뛰쳐나온 두 여자는 오던 쪽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미끄러워 몇 번을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뛰고 또 뛰었다.
강도들은 남 교수와 엉켜있어 끝내 그녀들을 쫓아오지 못한 것 같았다. 한참을 달려와 파출소를 찾았을 때 두 여자는 그제야 반쯤 실신하고 말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오수연의 입술이 찢어져 있었다. 파출소에서 대충 치료하고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순경들과 다시 현장에 왔다.
조수석에서 운전석 쪽으로 비스듬히 고꾸라져있는 남현태 교수의 낭자한 피를 보고 현소영은 그예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들의 차는 온데간데없고 박정민 사장이 트렁크 속에서 몸을 쭈그린 채 떨고 있었다.
규태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가라앉아서인지 영화 속 대사를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혹시 차종은 모르십니까? RV 차라면 그다지 많지는 않은 편인데요.”
규태는 나직이 물으면서 소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모르겠어요, 도무지. 차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어서 번호판도 볼 수 없었어요.”
규태는 소영에게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보충 얘기가 없을까 하고 물었지만, 소영은 고개만 저었다.
“범인들 목소리의 특징 같은 건 없었나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어서 뒷좌석의 저희는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얼굴을 가리려는 수작이었지요. 목소리까지 변형시키는 방법이었고요.”
규태는 두 사람의 범인이 이들 네 사람 중 누군가를 아는 면식범일 소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했다.
들을수록 놈들의 범행은 주도면밀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다. 목표물을 무작위로 택한 단순 강도의 소행이라면 그렇게까지 세심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번호판을 가리고 얼굴과 목소리를 숨기려는 놈들의 행동 양태를 볼 때 단순한 강도의 소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남 교수의 지갑과 시계, 여자들의 가방을 훔쳐간 것은 단순 강도로 보이기 위한 위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사건이 발생하고 나흘째 접어들었지만, 소영과 수연이 도난당한 카드를 사용한 흔적은 없다. 물론 현금인출도 없었다. 모든 증거를 없애가며 세심하고도 대범하게 범행을 저지른 놈들의 스타일로 볼 때 계획된 범행이 분명했다.
사건 현장에 세웠던 자기들 차의 타이어 자국까지 뭉개고 갈 정도로 여유만만한 자들이다. 돈을 강탈할 목적이었다면 트렁크에 가둔 박정민의 지갑도 챙겨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자들은 다시 트렁크를 열고도 정민의 입과 양손에 테이프를 감기만 하고 도주했다.
무슨 뜻일까. 아무리 반항했다 하더라도 남 교수를 죽여야 했을까. 이미 중년에 접어든 남 교수를 제압하기 위해 그토록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골몰하게 사건을 짚어보던 규태는 다시 소영에게 물었다.
“박 사장님이 차 밖으로 나갔을 때 무슨 소리를 듣지 못하셨나요? 범인들이 하는 말이라던가.”
“윈도가 모두 닫혀 있었어요.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차 안에 음악이 틀어져 있었고요. 트렁크가 닫히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규태는 소영이 좀 더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면 했지만, 그녀의 기억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현소영 씨가 볼 때 말입니다. 범인들이 아는 사람일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글쎄요, 누가…, 그런 데까지 따라와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시죠. 특히 남 교수님에 대해 원한을 지닐만한 사람….”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소영의 반응을 살폈으나 그녀는 머리가 아픈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규태는 반복해서 물었다.
“두 명의 범인들 체구나 움직임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나요?”
“특별한… 느낌이요?”
“어디서 본 것 같다던가….”
소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일어서서 물을 마셨다. 물컵을 쥔 오른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규태는 놓치지 않았다.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시 또 방과 거실을 들락거리던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소영에게 시선을 박은 규태는 단전 깊이 숨을 모았다. 서성거림을 멈춘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가 가늘게 눈을 뜨고 다시 앉았다.
그러나 금세라도 입을 열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다가는 멈추고 만다. 그런 소영의 행동이 답답했으나 규태는 그녀의 다음 행동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멈칫거렸다.
- 틀림없이 뭔가 생각해 냈어.
그녀의 생각과 관계없이 그 말을 들어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단서라도 필요하다. 소영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빨아들일 듯 큰 눈으로 마주 앉은 형사를 쳐다보다가 팔을 바꿔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다시 한번 그 순간을 되뇌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양평경찰서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보내고 형사들이 시켜준 곰탕 국물을 마시면서 수연이와 나눈 말들.
“수연아! 그 범인 중 한 사람 말이야. 네가 대들었을 때 운전석에서 널 친 사람 있잖아.”
“그 사람이 왜?”
“난 자꾸…”
“경진아, 너?”
경진은 소영의 본명이다. M 방송사 탤런트응시에 합격한 후 소영으로 예명을 지었지만, 수연은 경진이가 스타가 된 뒤에도 친구의 본래 이름을 불렀다. 누가 들을세라,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영을 빤히 쳐다보다가 수연은 국물이 담긴 숟가락을 놓치고 말았었다.
“너, 혹시…”
어떤 확신이 있지 않고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대상. 그 대상에 대해 서로의 느낌이 일치한다고 느끼자 수연은 소스라칠 정도로 전율을 느낀 것 같았다.
“너도…, 너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구나.”
서로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수연이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때부터 소영은 범인의 모습에서 학과 선배였던 유현수의 실루엣을 떠올렸다.
키와 체형, 구부정하게 오른쪽 어깨가 기울어진 차창 밖의 그 모습.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두 사람은 자꾸만 하나로 포개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불확실해서 입에 올릴 수가 없었어요.”
소영은 변명처럼 말했지만, 규태는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공감합니다. 이해하고말고요.”
가뭄에 단비다. 유현수라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자 풀려있던 규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유현수에 대한 현소영의 개략적인 언급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할 듯싶었다.
규태는 “그 유현수라는 친구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시지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꾹 참고 간단한 프로필만 메모하고 일어섰다. 그녀의 안색이 처음보다 훨씬 창백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쯤 나서서 본서로 들어가야 오수연을 기다리지 않게 한다. 오수연 역시 현소영과 J 대학의 연극영화과 동기생이므로 부족한 건 그녀에게 물어보면 된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빨리 쾌차하셔서 또 좋은 연기 볼 수 있기를 기대할게요.”
규태는 정중히 인사하고 일어서려다가 수첩과 펜을 소영에게 건네며 겸연쩍게 웃었다. 사건을 메모할 때와 달리 어린애처럼 순박한 웃음을 짓고 수줍어하는 형사를 보고 소영은 모처럼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차린 소영이 수첩과 펜을 건네받고는 사인을 한다.
“고맙습니다.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생겼네요.”
규태는 도움을 준 참고인의 기분을 살짝 부풀려주고 구두를 신었다. 문밖으로 나오기 전에 다시 본 그녀는 영화에서처럼 흠잡을 데 없는 미인이었다.
아파트 현관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기자가 현소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데 T 신문사의 김성균 기자가 따라붙는다. 다른 기자들과 달리 늘 말끔한 정장 차림의 김 기자는 오늘도 짙은 브라운의 싱글을 차려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이 형사님! 안에서 꽤 오래 계시더군요.”
“아, 내가 그랬나요.”
“뭔가 있죠?”
“뭐가 있겠어요. 상대가 미인 중의 미인이라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더라구요.”
“힌트 좀 줘요.”
“그럴만한 게 없어서 나도 맥이 빠지고 말았어요.”
규태가 그렇게 얼버무리며 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자 따라오던 김 기자는 걸음을 멈추더니 “좋은 신붓감을 봐놓았단 말입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기다려봐요. 특종감하고 바꿉시다.”
김성균 기자가 계단 위에서 다시 무어라 소리를 치는 것 같았지만 그저 벽에 부딪힌 울림만 들릴 뿐이었다. 손목시계를 쳐다본 규태는 더 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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