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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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규태는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왔다. 참고인을 만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곧바로 느낌을 정리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그러나 오늘은 ‘세컨드 레이디’의 장면들만 그득하게 머리를 채운다. ‘세컨드 레이디’를 포함해서 남 교수가 만든 영화들, 정확히는 그가 각본을 쓴 서너 편의 영화들이 방화의 장르를 선도하는 경향이 일기 시작했다.
‘남현태 브랜드’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중에 그가 죽고 말았다. 문득 누군가가 그의 영광을 시기해서 생긴 일처럼 느껴진다.
- 죽어서 그의 이름은 더욱 빛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처럼 훌륭한 영화인의 죽음은 당사자한테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규태는 막 박정민 사장한테서 영화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나자 마치 전문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웠다.
1층 로비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정현숙이 보였다. 그냥 가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규태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모님! 오래 나와 계시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말씀 충분히 나누셨나요?”
“예, 덕분에 수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현숙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병실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40대 초반 여성의 걸음치고는 무척 경쾌하다고 생각하면서 규태는 병원 현관의 회전문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그녀가 출연했던 그 영화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라의 샤워 장면 후에 이어진 정사 장면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최고의 남자배우였던 황세현과 정현숙의 베드신은 실연實演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기까지 했었다.
밖으로 나와 잠시 멈칫한 규태는 병원을 다시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정현숙을 처음 볼 때부터 들기 시작한 의구심이었다. 결과적으로 외도를 하다가 발각된 남편의 아내가 아닌가. 그런 아내치고는 얼굴에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고 세상이 들먹거릴 조짐까지 보이는데.
- 그 정도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건가. 그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걸까.
미심쩍기는 했어도 사건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여긴 규태는 병원 쪽을 한 번 뒤돌아보았다. 정현숙의 뒷모습이 막 모퉁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 그래도 속은 전혀 그렇지 않겠지.
규태는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수연과 통화를 하며 올려다본 잿빛 하늘에서 다시 눈발이 흩날린다. 오수연과 통화를 마친 규태는 미리 입력해둔 현소영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30분이면 충분합니다.”
병원에서 나와 오수연을 먼저 만나보기로 작정했던 규태는 계획을 바꿔 현소영의 아파트가 위치한 신림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화를 받은 오수연이 자기가 경찰서로 직접 출두하겠으니 시간만 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시원시원한 사내를 연인으로 둔 여자답게 그녀도 이를 데 없이 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수연에게 오후 5시까지 강남서 강력팀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규태는 현소영과 방문 약속을 했다.
현소영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목소리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아직 환자라는 사실도 잊고 규태의 입에서 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온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노총각을 마냥 달뜨게 한 것이다.
- 이렇게라도 해서 팔자에 없는 여복을 충족시켜야지, 어쩌겠어. …제기랄.
현소영의 아파트 주변에는 이미 각 신문, 방송사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녀의 사설 경호원처럼 보이는 검정 양복의 건장한 사내 둘이 규태를 제지했으나 신분을 확인하고는 바로 706호의 문을 열었다.
P 아파트는 대기업에서 막 지은 아파트답게 초현대식이었고 나무랄 데 없이 깨끗했다. 가사도우미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현관에 들어서는 규태를 맞았다.
거실의 소파에 잠시 앉아있자 소영이 방에서 나오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규태는 가슴의 박동이 가파르게 뛰는 것을 의식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민얼굴인데도 저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세컨드 레이디’에서 세컨드 레이디로서의 명연기를 펼쳤던 그녀의 모습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주홍색 스웨터를 걸치고 나온 그녀가 너저분한 차림의 형사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아주머니가 음료수를 내오고 자리를 비켜줄 때까지 가벼이 그녀의 건강을 묻던 규태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미 박정민 사장으로부터 네 사람 동승자의 관계를 충분히 들은지라 그녀에게는 주로 현장 상황을 중심으로 물었다.
당시의 악몽 같은 순간을 떠올리기조차 싫은지 소영은 상을 찡그리고 주저했다. 몇 차례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점차 기억을 떠올려 비교적 소상하게 말해준다.
양수대교를 건너 청평 쪽 지방도로로 좌회전한 벤츠는 차량의 주인인 박정민 사장이 처음부터 운전하고 있었고, 조수석에는 남현태 교수가 앉아있었다. 소영과 수연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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