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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글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15_ 대통령의 여자

장한림 2022. 5. 18.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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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https://www.bookk.co.kr/book/view/133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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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손님들이 없어서인지 조명마저 더 흐릿해 보인다. 수연은 주점의 실내가 자신의 속처럼 침침하다고 생각했다.

 

- 엄마, 미안해.

 

병원에 계신 엄마 보기가 민망하다. 당신의 지병을 숨겨가며 두 남매를 공부시키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논농사 소작일 외에도 남의 과수원을 일구고 뙤약볕에서 고추를 땄다. 자식들만큼은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당신의 몸을 혹사하신 엄마. 그런데도 자신은 도저히 되지 않는 형편에 서울로 유학 와서 4년을 마치는 중이다. 이제는 엄마 고생을 덜어줘야만 할 텐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래도 비교적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었던 건 동생 종민이 덕분이었다. 종민이가 보고 싶다. 제 누나의 학비를 대기 위해 녀석도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장비 기사로 동남아 건설 현장에 나가 뼈 빠지게 고생하는 중이다. 그런 동생에게도 부끄러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종민아! 아아, 내 동생, 종민아. 버는 대로 학비에 보태라며 녀석은 제 누나의 통장에 속속 돈을 입금하고는 했는데 정작 그 돈을 받아 쓴 자신은 졸업이 가까워져 오도록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다.

 

- 이게 뭐야! 오수연, 너 이렇게 무능한 여자였어? 뻔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단 말이야?

 

수연은 무릎에 올려놓은 현수의 시나리오에 눈길이 가자 더욱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처럼 훌륭한 작품을 써가며 열정을 뿜어내고 있기에 상대적 빈곤감이 몰려들어 얼굴을 들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아직도 가을 타는 중?”

 

현수가 자리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대통령의 여자를 읽고 사흘이 지나서야 현수를 만나는 거였다.

 

내가 보기엔 선배가 쓴 작품이라는 게 무색하다 싶을 정도예요. 너무 오래 구상해서 군더더기만 자꾸 입힌 거 아녜요?”

 

사흘간 거푸 현수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까지 보냈었는데 계속 불통인 데다 답신마저 오지 않아 수연은 갑갑하기도 했고 짜증마저 일었었다.

잠시 반감이 생겼던 걸까. 너무나 멋진 작품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주려 했는데 도서관에 틀어박혀 또 다른 작품에 몰입하고 있었을 그를 보자 수연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은근히 약이 올라 꺼낸 말이었는데 현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어깨까지 처지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 실망했어요.”

 

장난기까지 발동한 수연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대통령의 여자를 깎아내렸다. 동시에 현수의 실망한 듯한 반응을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즐겼다.

 

쓰레기통에 버려, 나도 맘에 들지 않았어.”

 

낭패의 기색을 보이는가 싶더니 금세 표정을 푼 현수는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탁자에 놓인 시나리오를 들어 휴지통에 내던지는 것이었다.

, ! 그게 아닌데. 의외의 행동에 수연은 당황했다. 소주잔을 날름 비운 현수는 부끄럽고, 미안하다.”라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가 부끄럽고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혹시라도 네 평가가 괜찮으면 어떻게든 수정을 해보려고 한 나 자신이 부끄럽고, 그런 얄팍한 마음으로 네 시간을 빼앗았으니 미안하지.”

…….”

 

어이가 없다. 황당하다. 수연은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자신만만해서일까. 분명 수작 중의 수작이다. 그런 훌륭한 작품을 내버린 현수의 행동이 자신을 놀리려는 거라고 판단한 수연은 한 번 더 오기를 부렸다.

 

수정하는 노력보다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알았어, 인정했잖아. 그만하고 나가자. 다른 데 가서 한 잔 더 하자.”

 

그렇게 말하더니 현수는 일어서서 카운터로 나가 계산을 마쳤다. 얼떨결에 따라 나온 수연도 휴지통에 처박힌 스크랩북을 그대로 두고 말았다. 현수의 모습이 장난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표정이 무겁고 침울해 보인다.

 

- 도대체.

 

자리를 옮겨서도 현수는 버린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 잘난 체하기는. 그 정도 글쯤은 얼마든지 다시 쓸 수 있다 이거지. 수연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도 휴지통에 처박힌 시나리오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 나한테 그런 어수룩한 행동을 보이는 건 유 선배답지 않아요. 그러면 나 같은 애는 얼마나 비참해지겠어요.

 

수연은 그가 속을 보일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현수는 별말 없이 물 마시듯 생맥주 두 잔을 비우더니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자.”라면서 일어섰다. 수연도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 가려던 참이라 더 길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도 평소와 다르게 다소 무거워진 표정을 풀지 않았고 시나리오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정쩡하게 현수를 먼저 보낸 수연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스크랩북을 찾아야 할 것만 같았다. 읽을수록 감동이 일던 대통령의 여자를 버려둔 채 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주점의 휴지통에 그대로 스크랩북이 있었다. 약간의 물기가 겉장에 묻어있을 뿐이었다. 툭툭, 털어내고 가방에 넣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서늘하다고 느껴져 수연은 옷깃을 여미고 다시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도 현수는 수연에게 더는 통령의 여자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쩌나 보려고 끝까지 두고 보기로 한 수연은 오히려 답답했다.

도무지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판단한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그런 스타일로 따질 일이 아니다.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아무리 유심히 살펴도 그는 대통령의 여자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유 선배, 대통령의 여자 말예요.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다시 손보면 꽤 괜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연이가 다시 대통령의 여자를 입에 올리자 현수는 얼른 몸을 내밀어 수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 자꾸 놀릴래. 아픈데 건드릴 거야?”

그게 아니고

너도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야. 그렇다면 농이라도 상대의 자존심쯤은 지켜줘 가면서 해야지. 한 번 더 그 얘기 꺼내면 너, 나중에 네 작품을 두고두고 깎아내릴 거다.”

 

정색까지 하면서 설교하듯 말하는 현수에게 수연은 놀란 표정만 짓고 말았다. 현수는 한동안 별 얘기 없이 소주를 홀짝였다. 수연은 현수의 뺨이 붉은 석류 같다고 생각했다.

 

수연아, 난 말이다.”

 

수연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꼭 너 닮은 주인공을 탄생시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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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동그란 눈에 호기심이 가득 고인다. 현수는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그런 수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수연의 맑은 눈이 투명한 유리알처럼 보인다.

현수는 수연을 염두에 두고 대통령의 여자의 여주인공 캐릭터를 만든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주인공 조혜수의 이미지는 내면과 겉모습 모두 수연을 모델로 해서 만든 인물이었다. 그랬는데 수연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원고를 다른 사람이 읽고 양에 차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고쳐볼 수도 있었다. 시나리오의 구성과 전개 등 줄거리만큼이나 여주인공 조혜수의 캐릭터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최대한 오수연과 빼닮은 여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조각가의 심정으로 여주인공의 실체를 다듬고 또 다듬었는데 수연은 거기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건 실패한 작품이라는 증거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자신의 무능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기까지 했지만, 오수연의 탄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다른 작품에서 꼭 오수연을 탄생시키리라. 그렇지 않고는 원래의 인물과 어긋나게 복제한 죄스러움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나 닮은 주인공을 탄생시키려면 날 더 알아야 하는 거 아녜요?”

 

오수연 닮은 주인공을 탄생시키고 싶다는 현수의 말에 한동안 멍했던 수연은 쑥스러운 기분을 무마하려고 깔깔거리며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내 딴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까지 더듬으며 어색해하는 현수의 모습에서 평소와 달리 취기가 빨리 오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보며 모성애 짙은 감정이 막 들어차는 것이다. 수연은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나를 더 알고 싶어요?”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 수연은 현수를 유혹하고 싶은 의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은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현수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선배.”

 

수연은 현수의 손을 잡았다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시 현수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을 포갰다. 현수의 뜨거운 입김이 속으로 깊이 들어찬다.

그의 가슴에서 울리는 박동이 마치 북소리처럼 들린다. 수연의 팔이 현수의 등을 감쌌다. 수연은 온 힘이 탈진되는 느낌이더니 다시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들었다.

 

선배, 나를 맘껏 파악해요. 그래서 날 더 자세히 써봐요.”

 

가늘고 낮은 수연의 목소리가 천사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현수는 수연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아!”

 

마주 포갠 수연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수연의 뜨거운 혀가 현수의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우웅, 멀리서 이명처럼 울리는 소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감긴 눈과 긴 속눈썹 외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현수는 키스가 전신을 마비시킬 정도로 짜릿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짝사랑처럼 속으로 꾹꾹 눌러 숨겨두기만 했던 여자, 생채기라도 날까 가슴 깊이 늘 품고만 있었던 여자. 그 여자와의 키스가 황홀한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다.

 

나가요, 우리.”

 

수연은 입을 떼고 불그스레한 얼굴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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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영의 부크크 커뮤니티

장순영은 이러한 책들을 집필, 발행하였습니다. <장편 소설>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야베스,2004년) 대통령의 여자 1, 2권(중명출판사, 2007년) 아수라의 칼 1, 2, 3권(도서출판 발칙한 상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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