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어머니의 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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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과 여행의 모든 것

창작 글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12_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장한림 2022. 5. 1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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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https://www.bookk.co.kr/book/view/133094

 

 

 

12.



운전하면서도 여치는 그날 문상호 사장과 김태산 사장의 마지막 판에 대한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입을 앙다물고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에 날계란을 문지르던 카이저는 아까부터 조수석에서 졸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끝내는 그때, 그 판 때문에 손목이 잘린 그에게 어떻게 그런 실수를 했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카이저 선배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일 때였다.

여치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의 얼굴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시퍼렇던 멍 자국이 지금은 검게 보였다. 그저께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혼자 나간 그는 어디서 맞았는지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서 돌아왔다. 얼굴뿐 아니라 목과 가슴에도 피멍이 들었고, 허벅지가 퉁퉁 부어올랐다.

놀란 여치가 다그쳤으나 카이저는 묵묵부답이었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지만 때가 되면 말하겠거니 하고 여치는 길게 캐묻지 않았었다.

자신을 친동생처럼 여기던 그가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비밀처럼 숨긴 적이 없었다. 여치가 휴게소에서 커피 두 잔을 들고 오자 카이저는 눈을 떴다. 커피를 다 마신 카이저가 입을 연다. 울산으로 가기로 하고 차에 탄 후 처음으로 말문을 연 것이다.

 

여치야! 왜 묻지 않니?”

?”

난 실수한 게 아니었어.”

 

마치 여치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카이저는 혼잣말을 내뱉듯 뇌까렸다.

 

그럼?”

너나 나는 조폭 깍두기론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놈들이야.”

…….”

조직에서 밥 먹으려면 가족쯤은 안중에 두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야.”

무슨 소리야, 도대체.”

 

여치는 두서없는 카이저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휴게소에 들어서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차들이 길게 정체되자 카이저는 담배를 물고 시가 잭을 눌렀다.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도통.”

너한테까지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조수석 창문을 내린 카이저는 담배 연기와 함께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께 김태산을 만나고 왔다.”

뭐라고? 그 사람을 왜?”

 

여치는 하마터면 앞차를 들이받을 뻔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간신히 접촉을 면했다.

 

한쪽에선 손목 잘리고 다른 쪽에선 피멍이 들도록 얻어터지고, 하하하!”

 

손목을 잘리고 처음으로 웃는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자조적인 한탄에 가까웠다.

 

김태산을 왜 만났어? 거기서 당한 거야?”

 

카이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왼손으로 핸들을 쥐지 않은 여치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너한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카이저의 손에 힘이 실리면서 부르르 경련이 일었다.

 

 


 

카이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로 그날, 마지막 승부가 끝난 그 저녁때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의 승부에서 문상호에게 크게 패한 김태산은 세 번째 승부가 있기 이틀 전에 카이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묵직하고 굵은 톤이지만 억양을 높일 때는 쇳조각으로 유리판을 긁는 듯 심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목소리였다.

 

카이저라고 했지. 자네 카드 실력만큼은 카이저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더군.”

 

음울한 기분 탓이었을까. 휴대전화로 듣는 김태산의 음성은 카드 판에서 들었을 때와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 진검만 다루는 사람이야.”

 

목소리를 살짝 높인 김태산의 말에 카이저는 바로 주눅이 들었다.

 

자네가 탄을 써서 날 두 번이나 패배시켰으니 이번엔 날 위해 탄을 한 번 써줘야겠어.”

김 사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알아듣게끔 쉽게 말하고 있네. 난 사설을 무척 싫어해.”

 

태산은 카이저의 말을 차단했다.

 

사장님! 오해이십니다.”

자네가 홍사진의 참모인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문상호의 바지 역할을 한 것도 말이야.”

…….”

 

카이저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끝까지 진검승부를 했으면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난 말이야, 누가 날 속이면 못 견뎌. 한없이 서글퍼지거든.”

사장님! 절대

자네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있네.”

?”

내일모레 다시 판을 벌일 걸세. 문 사장과 이미 약속했네. 지난 두 번의 게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큰 승부가 될 거야. 거기서 자네가 하기에 따라 자네 부모님의 생사가 달려있다는 걸 명심하게.”

사장님!”

판단력도 카이저다웠으면 좋겠군. 내일 다시 한번 전화를 하지.

 

카이저는 김태산과의 통화를 마친 즉시 집으로 달려갔다. 한창 하우스 농사에 여념이 없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검정 세단이 와서 정중히 모셔갔다는 이웃의 말을 들었을 뿐이다. 방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TS’, 김태산의 머리글자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의미, 그가 한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암시. 카이저는 눈앞이 캄캄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카이저로서도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오야붕인 홍사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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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과 단양 일대의 나이트클럽에 거의 세력을 미치고 있는 사진파의 우두머리. 그런 홍사진에게 껄끄럽고도 거추장스러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김태산이었다.

제천 최대의 나이트클럽을 직접 소유하고 만만치 않은 조직까지 갖춘 태산파 보스 김태산은 홍사진에게 있어서 넘어야 할 산이었다. 김태산만 없으면 제천은 무풍지대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김태산은 최고학부까지 공부한 인텔리다. 밑바닥 조직 생활을 하며 거칠게 오야붕까지 오른 자신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역 민심도 상당히 얻고 있다. 다음 총선에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그가 이 지역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력까지 갖추게 되면 홍사진의 사진파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존재로 전락할 가능성이 컸다. 홍사진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고심을 하던 홍사진은 H 호텔의 문상호 사장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유난히 포커 게임을 좋아하는 김태산은 종종 호텔 업주들과 만나 포커를 즐겼다. 단순히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도박이라고 할 만큼 판을 크게 벌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상호 또한 골프와 바둑, 포커에 푹 빠져있었다. 그는 모든 걸 내기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욕심도 많고 이해타산에도 능했다.

홍사진은 계획대로 이루어지면 문 사장에게 김태산이 소유한 L 나이트클럽의 소유권을 주겠다고 했다. 홍사진의 구체적 계획을 들은 문상호는 쾌재를 불렀다. 문상호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판을 벌이겠다고 했다.

일이 성사된 후에는 L 나이트클럽의 영업 관리만 사진파에서 맡겠다는 홍사진의 뜻에 흔쾌히 동조했다. 바야흐로 윈윈WIN-WIN, 한 사람은 호텔을 거저 얻고, 또 하나는 세력을 확장하면서 명실상부한 그 지역 보스로 우뚝 서려는 욕심의 합치. 홍사진은 문상호와의 의견을 맞춘 후 카이저를 불렀다.

카이저에게 단양에 있는 네 개의 하우스를 모두 맡긴 건 카이저가 머리도 뛰어났고 언변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포커 실력과 신뢰감 때문이었다. 전투력도 뛰어나 조직의 핵심 참모로 곁에 두고 싶었으나 딱 한 가지 결점이라면 카이저는 행동대원으로서의 잔인성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싸움 실력을 지녔고 의리도 있었으나 마음이 여려 생선회 칼이며 도끼를 휘두를 수도 있는 물리적 패싸움에는 부적합했다.

폭력과 꽤 동떨어진 성격의 카이저에게 어울리는 건 하우스의 운영이란 판단이 들어 단양지역의 하우스 관리를 맡겼는데, 역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그가 맡은 이후로 하우스 수입이 세 배나 뛰었다.

아직 제천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카이저에게 문상호의 바지 역할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의 능란한 기술을 총동원해서라도 김태산이 문상호의 호구가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아주 좋습니다. 만족합니다. 하하하!”

 

카이저를 소개받은 문상호는 더욱 흡족해했다. 든든하기 이를 데 없는 홍사진의 제안에 구체적인 계획까지 그럴싸했다. 사진파와 현재보다 훨씬 더 밀착할 수 있으며 언덕처럼 기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계획에 차질이 없을 것을 확신한 건 홍사진의 부하 카이저를 만나고 나서였다.

카이저의 감쪽같은 기술에 문상호는 감탄했다. 두 번의 게임에서 김태산의 자존심을 짓밟은 문상호가 김태산의 나이트클럽을 가져오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기분 좋게 떠벌렸다.

 

하하하! 사장님이 만족하시니 일이 잘 풀릴 것 같습니다.”

 

홍사진도 문상호가 카이저를 입이 닳도록 칭찬하자 흡족해하며 반은 성공이라고 맞장구쳤다.

김태산에게 있어서 L 나이트클럽은 중추적인 활동 구역이자 돈줄이다. 그것만 빼앗으면 그는 날개 꺾인 독수리에 불과하다. 차기 출마도 물 건너갈 게 뻔하다. 잘하면 그의 휘하조직도 손쉽게 흡수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훨씬 큰물로 진출할 수 있다. 그야말로 충청권 일대를 거머쥐는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홍사진과 문상호, 카이저는 그날 거나하게 취하면서 행복감에 물씬 빠져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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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영은 이러한 책들을 집필, 발행하였습니다. <장편 소설>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야베스,2004년) 대통령의 여자 1, 2권(중명출판사, 2007년) 아수라의 칼 1, 2, 3권(도서출판 발칙한 상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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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거꾸로 문 사장과 큰형님을 엿 먹인 거였단 말이야?”

 

여치는 카이저의 말을 다 듣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까지 벌어졌던 일들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부모님과 형 목숨을 맞바꾸려 했다 이거지.”

 

여치가 카이저의 오른팔을 보고는 후후! 역시 형답군. 나였어도 형처럼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라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래도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로 엮은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너무 드러났어.”

그것도 김태산의 지시였어.”

확실하게 먹겠다는 거였군. 엄청난 판돈이었으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진 형님과 문 사장의 자존심까지 무참하게 짓밟아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하지.”

 

여치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김태산한테 떡이 되도록 터지고 온 거야?”

…….”

 

카이저는 부르튼 입술을 앙다물었다. 카이저의 눈에 핏발이 서더니 눈자위가 가늘게 떨린다.

 

김태산이 당근을 주기로 했었지.”

당근?”

부모님 목숨 외에 별도로독립자금 조5억 원을 준다고 했거든.”

그런데 오히려 채찍질만 당하고 왔다?”

그 돈을 받으면 내가 문상호만이 아니라 사진파까지 배신하는 게 된다면서, 조직 물을 먹는 놈이 오야붕한테 뒤통수를 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며, 같잖은 이유를 붙이더군.”

죽일 놈, 김태산도 결국 깡패 새끼에 불과한 놈이었군.”

그냥 물러설 순 없었어. 매달리며 사정도 했는데 놈들한테 몽둥이세례만 받고 말았어.”

 

카이저는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시 한참을 침묵하던 카이저가 고개를 돌리더니 여치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네놈 의리에 내가 감동먹었다, 인마!”

형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여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날의 일이 다시 떠오르자 쓴 미소마저 가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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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와 여치는 김태산이 엄청난 액수의 돈과 문상호의 호텔 지분을 가지고 돌아간 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홍사진에게 끌려갔다. 흥분을 가누지 못한 문상호가 홍사진의 곁에서 저놈을 죽이라고 악다구니를 해댔다.

 

말해, 어떻게 된 건지.”

 

홍사진은 무릎을 꿇은 카이저를 노려보았다.

 

실수했습니다. 형님! 제가 착각했습니다.”

그걸 믿으란 말이냐? 나보고.”

 

여치는 얼른 무릎을 꿇으며 홍사진을 향해 말했다.

 

큰형님! 제 잘못입니다. 제가 카드를 엮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허어, 이 자식들 보게. 나를 갖고 놀기로 작정했구만.”

 

홍사진은 책상에 꽂힌 손도끼를 빼더니 날 쪽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그의 눈에 진작부터 살기가 서려 있었.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형님!”

 

카이저가 사정했다.

 

넌 내 희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렸어. 김태산이 다시 붙을 거로 보나.”

죽여 버려요, 저 새낀 김태산과 한패인 게 틀림없어요.”

 

문상호가 길길이 날뛰자 홍사진이 그를 노려보았다. 부하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문상호의 표현이 거슬렸다.

 

저놈은 날 배신할 놈이 아니오.”

큰형님! 카이저 형님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곁에서 보조를 맞추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여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진은 고개를 쳐들고 눈을 감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저런 모습을 보였었다. 실내에 적막이 흐르며 싸늘한 긴장이 감돌았다.

카이저와 여치는 둘 다 고등학교 후배다. 학교 내에서 알아주는 싸움꾼 후배들을 여럿, 조직에 끌어들인 바 있다. 후배들은 한 번도 자신을 배신하거나 속인 적이 없다. 사진은 그런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카이저와 여치는 의리와 신뢰로 똘똘 뭉친 놈들이다. 지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더구나 김태산과 이놈들은 아무런 끈이 있지 않다. 그건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게 수포가 되었다.

옆에서 화를 가누지 못하는 문상호 사장도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애당초 자신이 꾸민 계획이다. 실패로 돌아간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죽일 수는 없다. 많은 부하가 보고 있다.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 명분 없이 목숨을 빼앗는다면 누가 자신을 믿고 목숨 걸 일에 나서겠는가. 잘못되면 부하를 죽인 살인자의 오명까지 짊어질지도 모른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될 수 있다. 이제까지 조직을 꾸려오면서 오야붕으로서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사진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떴다. 다시 날카롭게 허공을 주시했다. 여치는 그가 다시 숨을 내뱉을 때까지의 시간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사진은 카이저의 곁에 서 있는 가물치에게 눈길을 고정하더니 손도끼를 건넸다. 우람한 근육질의 가물치가 손도끼를 받아 쥐고는 사진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가물치가 카이저의 오른 소매를 걷어 올렸다.

 

큰형님! 제발, 카이저 형님은 오른손이 생명입니다. 제 팔을 잘라 주십시오, 제 잘못입니다.”

 

여치는 상체를 곧추세워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가물치의 구둣발이 여치의 면상을 갈겼다. 고꾸라진 여치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순간 가물치의 손도끼가 머리 뒤에서부터 길게 현을 긋는 게 보였다. , 바람을 가르는 시린 소리가 들렸다. 카이저의 손목이 여치 쪽으로 날아와 핏물과 함께 떨어졌다.

당시의 쓰디쓴 기억을 떨쳐내고자 여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휴게소로 차를 몰았다. 세수라도 하고 싶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가물치의 구둣발에 맞은 안면 근육이 아직도 뻐근하게 느껴진다.

참으로 더러운 팔자다. 여치는 카이저나 자기 자신이나 아직 창창한 나이에 똥구덩이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자 속까지 뒤틀렸다.

카악. 화장실로 가면서 여치는 목에 뭉친 침을 거칠게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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