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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글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14_ 대통령의 여자

장한림 2022. 5. 1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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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https://www.bookk.co.kr/book/view/133094

 

14.

 



수연이의 스타일상 누군가를 유혹하는 따위의 행동을 할 리도 없겠지만 만일 그녀가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면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공상을 한 적이 있었다. 역으로 그녀에게 먼저 속마음을 털어놓고 정식으로 사귀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을 미루고 있는 터였다.

우선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수연에게 제대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현수는 소주병이 빈 것을 보고 카운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병뚜껑을 열어 잔에 채우자마자 입에 털어 넣은 현수는 가방을 열더니 스크랩북 한 권을 꺼냈다. 시나리오였다.

 

어제 최종 탈고한 원고야.”

 

수연은 얼떨결에 현수가 건넨 스크랩북을 받아 앞부분 서너 페이지를 펼쳤다가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겸연쩍게 눈웃음을 짓는다. 막상 탈고는 했지만 뭔가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한다. 수연은 그가 부러웠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어쩜, 선배는 그렇게 힘도 안 들이고 뚝딱 시나리오를 쓸 수 있죠?”

힘이 왜 안 들어. 졸작 만드느라 아직 머릿속에 피멍이 남아 있는 기분이다.”

 

수연은 그가 자신의 침울한 기분을 달래려고 하는 말임을 느낄 수 있었다. 직접 집필한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읽어보기를 권하는 것도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요량임을 수연은 잘 알고 있었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첨 공개하는 거야. 수연이, 네 준엄한 평가를 받아보자.”

어머! 선배, 내가 평가할 능력이 되나요? 공부 삼아 읽어볼게요. 아무튼, 기대가 커요.”

 

졸업반 마지막 학기, 가을도 속절없이 지나고 있을 때 현수는 그렇게 수연에게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건넸다.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를 동반자로서, 허물없이 가까운 선후배로서 건넨 것이겠지만 수연은 자꾸 그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수연은 빙긋 미소를 띠고 현수를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창의력의 귀재라고 불리는 유현수 선배가 자기 작품을 평가받겠다며 시나리오 원본을 건네준 것만도 고마운데, 더구나 처음으로 공개한다는 것이다. 수연은 뭉클한 감동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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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가 읽어보고 형편없다고 생각되면 그냥 쓰레기통에 처넣어.”

 

소주 한 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는 그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어요? 선배 글인데.”

그렇지 않아. 내가 써놓고도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찾지 못하고 있어.”

 

현수는 손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미진한 듯 생각되는데도 그 부족한 부분이 딱히 잡히지 않아 수정을 못 하던 중에 재능이 만만치 않은 수연이한테 내민 것이다.

숱하게 구상하고 수도 없이 상황만 설정하며 질질 끌어오다가 어제 겨우 탈고했다. 그렇게 완성한 원고에 애착이 가기는 했지만, 시 읽어봐도 어딘가 덜 채워진 느낌이다.

한 차례, 시나리오에서 의도했던 바와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황당해했었다. 그때 대본과 영화적 구성의 연결고리에 산소를 공급해야만 살아 숨 쉬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시나리오가 비록 영화의 기초공사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그 뼈대가 탄탄하지 않으면 완성품은 더더욱 골격을 유지하지 못한다. 또다시 다른 결과물로 만들어질 것을 우려해 많은 고심을 하며 심혈을 기울였다.

현수는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성을 지녔더라도 그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상업 논리에 동조했다. 예술과 상업이 적절히 버무려질 때, 아니 모두 충족시킬 때 영화는 생물처럼 생명을 지니는 거라고 믿었다.

보편적 다수의 진지한 관객들이 저절로 수긍하는 영화.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입장의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는 영화. 현수는 그런 영화를 소망했고 그런 소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혼을 담아내려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완성도가 떨어지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수연이마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고 아쉬움이 남는 평가를 한다면 그건 작가의 죽은 혼이 서린 작품이라는 게 현수의 판단이었다. 작가의 주관만 담긴 작품에 작가 혼자 집착하는 꼴이다.

 

- 내가 너무 욕심이 과한 건 아닐까.

 

그러나 수연에게서 보완의 여지를 기대하는 마음이 작지 않았다. 대학원 과정의 마무리와 M&B 기획사에서 청탁받은 단편 드라마를 완성하려면 당분간 새 작품구상마저도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수연이가 다듬어 채워주기를 바랐다.

 

- 아아, 그렇게만 된다면

 

 

 

수연이가 시나리오에 진정 살아있는 혼을, 생명을 부어 넣어 주기를 내심 소망하는 건 그녀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수는 그렇게까지 욕심을 냈다.

 

오수연! 너한테 꼭 후배라는 생각만 드는 건 아니야.”

 

현수는 수연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가 놓으며 저만치 뛰어갔다. 수연은 현수의 시나리오를 꼭 쥔 채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돌아섰다. 그는 울적해서 미칠 것 같던 기분을 말끔하게 풀어주더니 다시 어린애처럼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수연은 이틀이 지난 휴일 오후가 되어서야 그의 시나리오를 읽어볼 수 있었다. 이틀 동안 엄마의 병세가 악화하는 기미가 보여 내내 병원에서 병간호했었다. 부족한 수면 탓에 약간 피곤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책꽂이에 꽂힌 현수의 작품을 꺼내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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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여자

 

처음 다소 지루할 것 같았던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수연의 표정이 대여섯 쪽을 넘기면서 상기되는가 싶더니 몇 쪽을 더 넘기면서는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완벽한 배경설정에 캐릭터가 뚜렷한 등장인물들, 권력의 최상층부와 두 남녀주인공을 중심으로 미궁에 빠진 의혹을 파헤치는 상황전개, 은밀하게 깔린 복선은 돌발적이지 않으면서도 긴박하게 이어진다. 다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반전이 읽는 이로 하여금 야릇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정치권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처럼 전개되기는 하지만 내면에는 두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이 깔린 로맨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수연은 시나리오를 다시 읽으면서는 처음 읽을 때보다 더 흥분하고 말았다. 가슴에 꽉 들어찬 감동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유현수 선배의 감각과 재능을 십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대단하다. 자신이 접했던 그 어떤 시나리오보다 완벽했고 흥미로웠다. 시나리오를 덮은 후에도 그 배경 속에 존재하는 느낌이 든다.

수연은 작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환상에 젖어 들었. 벅차고 환희로운 여운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전화를 들었다. 현수에게 걸려는 거였다. 무어라고 칭찬을 해줘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가 더욱 존경스러웠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 도서관 같은 데 있으면서 휴대전화기를 꺼놓은 모양이다. 수연은 대통령의 여자라고 제목이 붙은 시나리오의 표지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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