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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서리산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_ 남이 장군과 유자광의 악연

장한림 2022. 3. 1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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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ookk.co.kr/book/view/134061



남이장군의 요절과 그 죽음의 잔인성에 분노가 인다

<축령산, 서리산 - 남이 장군과 유자광의 악연>

 

 

 

 

경기도 가평은 산과 계곡, 호수뿐 아니라 지역 자체가 하나의 자연생태공원이라 할 만큼 나무와 꽃들로 아름다움을 가꾼 곳이다. 그런 가평의 대표적 명소 중 한 곳인 ‘아침고요 수목원’은 수만 종의 수목을 보유하고 한국적 정서를 담은 최적의 정원으로 꼽는다. 사계절 내내 낮이든 밤이든 아름다움을 찾는 이들로 북적인다.

이러한 가평군과 남양주시 수동면에 접한 축령산祝靈山은 화악산과 명지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한강을 코앞에 두고 멈춘다. 

 

 

영험을 테마로 한 설화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산

 

고려 말 이성계는 이곳에 사냥을 왔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만 돌아가자. 바람이 심해 화살이 자꾸 빗나가는구나.”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산신제를 지내면 백발백중 맞출 것입니다.”   

  

몰이꾼의 말을 들은 이성계가 산신제를 지낸 후 멧돼지를 잡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이때부터 고사를 올린 산이라 하여 축령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행은 축령산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오른쪽으로 축령산 정상까지 2.74km, 왼쪽으로 서리산 정상까지 2.64km의 표시가 되어있다. 

울창한 잣나무 숲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각종 새 이름으로 문패를 단 숲속의 집 열세 동이 있고, 1동 18실의 산림휴양관이 있으며 삼림욕장, 휴게소, 체육시설과 야영장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휴양림이다. 하늘을 찌를 듯 곧고 높이 뻗은 잣나무 숲길에 접어들자 잣 향기가 진동하는 느낌이다. 아늑하고 푸근하다. 가평 8경 중 7경에 속하는 잣나무 숲을 이르는 명칭, 축령백림으로 불리는 곳이다. 

해방 전후 심은 잣나무 묘목들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름드리 잣나무 숲으로 변해 삼림욕장과 자연휴양림으로 편안한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느끼고 반응하게 된다.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덕분에 아무리 걸어도 피로감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다. 잣나무의 피톤치드는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한 효과가 있어 각종 감염질환이나 아토피 질환은 물론 면역력을 좋게 해 줄 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축령백림 위로 뿌연 하늘을 헤치고 해가 드러나는 중이다

 

 

 

이맘때쯤의 가을 잣나무가 가장 늠름하다고 한다. 봄과 여름을 견뎌내고 그 푸름이 절정에 달하면서 실한 잣송이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꽃이 피고도 꼬박 한해를 넘겨 다음 해 가을이 되어야 잣을 수확할 수 있다니 서두른다고 해서 잣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암벽 약수터에 졸졸 흐르는 약수를 보고 바윗길과 너덜 길을 번갈아 지난다.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조선 시대 홍 씨 성을 가진 판서가 늦도록 후세를 잇지 못해 애를 태우던 중 이 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지성으로 기도한 결과 아들을 낳아 자손 대대로 가문이 번창했다는 전설이 깃든 홍구세굴이 있다. 축령산의 신령스러움을 부각하는 또 하나의 설화다. 

 

 

정녕 모나서 정 맞은 남이인가

 

밧줄이 설치된 바윗길을 올라 수동면 일대를 내려다보고 고목 군락을 지나 남이바위에 이르게 된다. 조선 세조 때의 명장이었던 남이장군이 한성의 동북방 요충지인 이곳에 자주 올라 지형지물을 익히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하여 남이바위라고 부른다. 

 

백두산의 바위 돌은 칼을 갈아 모두 없애 버리고  白頭山石 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말려버리리라.  豆滿江水 飮馬無 

남아 이십 대에 나라를 평화롭게 하지 못하면  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後世誰稱 大丈夫 

 

속이려 사력을 다하는 자에게 어찌 속지 않을 수 있으랴. 남이장군은 북방 정벌 때 지은 이 북정가北征歌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조선 3대 왕 태종의 외손자로 태어나 지혜와 용맹을 갖춘 건장한 청년 남이는 무관으로 급제하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공신으로 승승장구하며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죄에 몰리고 만다.

역모죄의 단초는 북정가의 셋째 행, 남아 이십 미평국의 ‘平’ 자를 얻을 ‘得’ 자로 바꾸어 ‘남아 20세에 이르러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 고함으로써 역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남이장군의 한이 가득 담겼을지도 모를 남이바위가 불현듯 모난 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남이는 모나서 정 맞은 돌에 비유할 수 없는 인물이다. 열등감과 시샘에 의한 억울한 희생자이다. 

무릉도원과 지옥은 같은 곳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거기가 어디든 욕심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살면 무릉도원이고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탐욕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는 순간 이미 그곳은 지옥이 되고 만다.

거열형車裂刑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어떤 형벌인지 가늠할 수 있도록 맛보기 장면만 보여주는 비주얼.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아니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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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형轘刑, 환열형轘裂刑이라고도 하는데 처형자의 사지를 소나 말, 수레 등에 묶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진시켜 온몸을 찢어 죽이는 극단의 형벌이다. 전혀 죽을죄를 짓지 않은 남이가 그런 형벌을 받고 그의 어머니까지 똑같은 형벌로 죽임을 당했다는 게 분통이 터지고 숨을 거칠게 한다. 

남이는 순조가 왕위에 있던 1818년이 되어서야 생전의 관직이 복구되었으며 순종 때인 1910년에 '충무'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그의 묘소가 있고 강원도 춘천시 남이섬에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안고 무예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한 남이바위가 갑자기 지옥처럼 느껴져 얼른 자리를 뜨고 싶어진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축령산 정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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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

얼마 전 갤럽은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 생활 중 으뜸이 등산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주말, 도봉산역이나 수락산역에 내리면 그 결과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많은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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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축령백림

지날 때도 잠잠하다가

남이바위 올라서니

횡으로 몸통 늘린 구름안개

오수에 푹 빠진듯한데

운무 비켜 비추는 한줄 햇살과 함께 

살갗에 닿는 실바람은

아아, 가을!

아직 멀었다싶은 가을이구나.     

 

사면이 직벽 낭떠러지인 남이바위를 지나고 헬기장을 또 지나니 바로 축령산 정상(해발 886,2m)의 돌탑과 태극기를 보게 된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로 주금산, 천마산, 용문산, 운악산과 경기도에서 으뜸 버금가는 화악산과 명지산을 조망한다. 또 저 아래로 잔잔한 청평호를 내려다보고는 서리산으로 향한다. 능선 오른쪽 아래로도 잣나무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탐욕의 끝은 잣나무 숲과는 전혀 다른 암울한 터널로 남고 만다. 역사도 그걸 입증하려는지 남이의 죽음을 그냥 남이의 한으로만 남게끔 하지 않았나 보다. 

속임수와 모함으로 조작된 거짓은 영속성이 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한 반복에 의해서라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유자광은 뛰어난 기개와 용력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두 차례나 일등 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조선 7대 왕 세조부터 11대 중종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사림으로부터 남이의 옥사를 고변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킨 희대의 간신으로 규정되어 비참한 최후를 당했고 조선왕조 내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전해지는 유자광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짓누르다 결국은 자신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간신쯤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을 것이다.

유자광은 홍길동처럼 당시 커다란 아킬레스건인 서자였다. 사견이지만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홍길동이 반란과 저항의 길을 택했다면 유자광은 그런 세상, 그런 제도를 인정하고 적극 녹아듦으로써 그 장애를 뛰어넘은 인물이라 하겠다.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두 차례나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실제 합당한 관직에는 임명되지 못한다. 서얼이라는 약점을 주변에서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세조에게 커다란 골칫덩어리였던 이시애의 난은 결과적으로 유자광이 올린 상소와 진압을 위한 계책을 제시함으로써 석 달만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유자광이 몇 계단 껑충 뛰어 중용되는 인사가 단행되었다. 

     

“이 세상에 태양이 둘일 수는 없어. 남이, 네가 저무는 해가 되어줘야겠다.”    

 

든든한 버팀목이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유자광은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는데 바로 남이를 디딤돌로 삼은 ‘남이 옥사’ 사건이다. 

예종이 즉위하고 한 달 뒤, 유자광은 남이가 한명회, 김국광 등을 죽이고 임금을 바꾸려 한다고 고변함으로써 앞서 서술했듯 남이를 비롯해 그의 수족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것이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이등공신으로 올랐다가 남이의 옥사를 발판 삼아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무령군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그 후 성종, 연산군, 중종을 임금으로 모시면서 유배와 재기를 반복하게 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중종반정이 거듭되는 풍전등화의 시국을 넘긴 그의 처세는 가히 경이롭기까지 하다. 

    

“원통하고 또 원통하옵니다.”

 

유자광은 정적들의 질시와 음해로 자신이 행했던 것과 똑같이 고변을 당함으로써 5년의 유배 생활을 하다가 원통함을 가누지 못하고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배된 뒤 눈이 멀어 갔다고 한다. 73년에 걸친 파란 많은 인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무와 풀이 한데 어우러지고 바위가 소나무의 뿌리를 뻗을 수 있게끔 그 경직성을 풀어주는 대자연의 너그러움을 산에서 보게 된다. 

대자연의 위대한 시스템을 인식하는 후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남이와 유자광 당대의 두 천재가 의기투합해 힘을 합쳤으면 조선이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두 개의 태양이 같이 비추면 인간 세상은 더 밝아지기보다 그늘이 짙어지는 모양이다.

 

축령산에서 이곳 절고개를 넘어 서리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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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고개 가까이 풍성하게 자란 억새들이 소소히 부는 산바람에도 요란스레 몸을 흔들어댄다. 절고개를 지나면 한결 편한 길이 이어지면서 헬기장을 지나 휴양림 주차장으로 하산할 수 있는 억새밭 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축령산을 뒤돌아보고 짧은 바윗길과 완만한 오르막 언덕을 넘어 서리산(해발 832m)에 닿는다. 

바위가 많은 축령산에 비해 육산인 서리산은 느낌도 여성적인 면이 짙어 보인다. 여기서도 조망은 여전히 시원하게 뚫려있다. 서리가 내려도 쉽게 녹지 않아 늘 서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서리산은 축령산과 함께 자연휴양림을 분지처럼 쓸어안고 있다. 

 

서리산 내리막길에서의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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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철쭉 철이 되면 정상에서 화채봉까지 700여 m에 달하는 한반도 지형과 흡사한 철쭉동산이 있어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가지만 앙상한 철쭉 터널을 지나 전망대에서 한숨 돌리며 가평 일대를 내려다본다. 

화채봉은 휴양림과 연결되지 않아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힘차게 뻗은 잣나무 숲길을 통과하여 내려서면 중간에 너덜지대가 있긴 하지만 내리막 걸음에 큰 불편함은 없다. 간이 목교를 지나 평지를 걸어 휴양림 제1 주차장에 닿을 때까지 남이와 유자광의 악연에 대한 안타까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때 / 초가을

곳 / 축령산 자연휴양림 - 잣나무 숲 - 수리바위 - 남이바위 - 축령산 - 절고개 - 서리산 - 화채봉 삼거리 - 간이 목교 – 원점회귀

 

 

 

 

https://www.youtube.com/watch?v=HhmOcDC5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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