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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 펀치볼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_ 제4땅굴의 암울한 기운

장한림 2022. 3. 27.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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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ookk.co.kr/book/view/134061

 

제2의 한국전쟁, 북한의 침략이  코앞까지 다가왔었다

<도솔산 펀치볼 - 제4땅굴의 암울한 기운>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punch boul 마을은 해발 1100m 이상 고산지대의 분지에 있다. 한국전쟁 때 외국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보니 노을 물든 해안면 지역이 칵테일 유리잔 속의 술 색깔과 흡사하고 마을 형상이 화채 그릇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해안면은 변성암으로 이루어진 세계 3대 침식분지로서 마을을 에워싼 변성암 산지와 산 아래 화강암 지역으로 인해 차별 침식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땅꾼들도 거처를 옮겼을까. 원래 바다 해海자를 썼는데 조선 초, 마을에 뱀이 득실거려 고승 한 분이 뱀은 돼지와 상극이니 바다 해 대신 돼지 해亥 자를 쓰라고 일러주어 지금의 해안면亥安面이 되었다. 그 후 마을 이름을 바꾸고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면서 뱀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념의 온도 차는 환절기의 일교차보다 훨씬 벌어졌다. 

 

막상 펀치볼에 오니 오랜 기간 정전상태이긴 하지만 어렴풋이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한 전황을 의식하게 된다. 이 지역은 현재 3군단 예하 21사단의 위수 담당 지역으로 DMZ를 끼고 대암산, 도솔산 등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숲길 안내인의 인솔에 따라 12.9km 평화의 숲길로 들어선다. 도솔산 지붕은 아직 안개를 걷어내지 못했다. 위로 을지전망대가 보인다. 그 너머가 바로 남방한계선GOP이고 군사분계선GP과 북방한계선이 그 뒤에 가로놓여있다. 숲길 트레킹을 마치고 올라갈 곳이다.

 

  "저 많은 농산물을 누가 다 지은 걸까."

 

여의도의 여섯 배 정도라는 해안면 분지에는 1953년 휴전 후 난민 정착사업의 일환으로 재건촌을 조성하여 100세대씩 입촌했다. 정착 농민들의 부단한 개척으로 현재는 엄청난 규모의 고랭지 채소와 인삼, 더덕, 포도, 멜론, 사과, 오미자, 고추 등을 재배한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한데 농사 규모를 보면 저 많은 농작물을 누가 경작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우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봐도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검정 인삼밭을 포함하여 잘 다듬어진 농경지만 가득 눈에 띈다. 볼수록 깊은 산중의 외딴섬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정경마다 온화하다. 여기선 바무장지대DMZ 인근의 전방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지뢰가 연상되고 가끔 포탄 소리도 들릴 법한 위치인데 마을 분위기만 놓고 볼 때 그런 것들과는 딴판인 세상이다. 이 산 어딘가에 고즈넉한 암자가 있어 아직 봄볕 남은 석양 녘에 풍경 소리 가늘게 들려오거나 검게 그을린 초가 굴뚝 안에서 저녁밥 짓느라 모락모락 군불 연기라도 피어오르면 여긴, 비록 날 서서 냉랭한 최전선이지만 초록과 연홍으로 버무린 한 폭 수채화의 캔버스, 제법 잘 그려진 그림 속이다. 군사분계선이 지척이라는 인식만 지운다면 여기야말로 온화하게 채색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이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해안리 마을은 역시 펀치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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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산

얼마 전 갤럽은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 생활 중 으뜸이 등산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주말, 도봉산역이나 수락산역에 내리면 그 결과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많은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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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너머로 보이는 정중앙의 봉우리가 가칠봉加七峰인데 금강산에 속하는 봉우리로 지금은 우리 지역에 위치해 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일곱 봉우리를 더해야 한다는 산술적 의미의 이름이다. 숲길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가 을지전망대로 올라왔다. 내려다보니 역시 화채 그릇처럼 보인다.

전망대 안보전시관 창밖으로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바로 코앞이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능선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마을과 달리 금세라도 총성이 울리고 포화가 날아들 것처럼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을지전망대에서 보니 북녘땅이 바로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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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길게 누운 대암산 능선이 보인다. 대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을 바라보았었는데 그때 보지 못했던 상반된 이념의 서슬 퍼런 모습을 지금 직접 대하고 몸소 체득하는 중이다.

여기는 태양마저 외면하나 보다. 구름 뒤로 숨은 건지 아니면 구름이 가린 건지 따사로이 봄볕 뿌리던 해는 자취를 감추었다. 서로 다른 이념의 온도 차는 환절기의 일교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벌어져 있다.

 

“여기서 내려가 제4땅굴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격차는 땅속에서 더더욱 벌어져 언젠가 좁혀질 거란 생각을 아예 거둬간다. 안내에 따라 을지전망대에서 내려와 찾은 곳이 제4땅굴. 1990년 3월 3일에 발견된 땅굴이다. 북한이 파 들어온 땅굴 중 네 번째로 발견되어 제4땅굴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북한은 10년에 걸쳐 이 땅굴을 파 들어왔는데 귀순한 북한 병사의 증언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육군 소위 헌트'

 

육군 제21보병사단 소속 수색탐지견 헌트HUNT는 수색팀 선두에서 폭발물 탐지 중 화약 냄새를 맡고 북한군이 설치해둔 목함지뢰로 달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헌트의 희생으로 1개 분대원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인헌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소위로 추서 된 헌트는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제4땅굴 옆에 동상으로 세워졌다.

지하 145m 깊이에 폭 2m, 전체 길이가 2052m로 군사분계선에서 1502m나 남쪽으로 내려와 발견되었다. 제4땅굴은 제2땅굴이나 제3땅굴에 비해 규모도 작고 허름한 편이라 제1땅굴과 비슷한 시기에 파 들어온 초기의 땅굴로 추정하기도 한다. 발견시기가 늦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땅굴을 파 들어오는 중에 발견했는데 제4땅굴의 발견으로 북한은 동서로 늘어선 군사분계선 전 지역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팠다는 게 입증되었다.

땅굴 입구로 들어오면서 어깨가 움츠러든다. 굴 안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기가 가득하다. 땅굴을 네 개씩이나 팠다는 것도 경이롭지만 온통 화강암 덩어리를 파낸 노력이 가상하고도 가련하다. 우리가 역으로 판 370m를 걸어 들어가 전동차를 타고 북한군이 파고 들어온 DMZ 라인까지 구경하게 된다.

남한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여기 제4땅굴까지 총 네 개다. 대한민국 육군은 지금도 매년 병사들을 차출해 DMZ에서 땅굴 조사작업을 벌이고 의심 가는 지역을 탐사하고 있으나 이후로 확인된 땅굴은 현재까지 나오지 않았다. 더 있을지는 아직도 두고 볼 일이다. 그중 세 개의 땅굴은 관광 자원화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구경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죽 쒀서 개 줄 일 있습네까?"

 

북한군들의 불평불만이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땅속을 파 들어가며 땀을 쏟을 때마 남한에는 부가가치 높은 관광명소가 늘어나는 셈이다.

 

얼었다 녹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산중 협곡 최전방 마을

들쭉날쭉 할퀴는 꽃샘바람에 

몰골 더 고약해졌으나

연분홍 참꽃 흐드러지게 피워냈구려.

     

어둠보다 무서운 고독 이겨내려

추위보다 힘든 갈증 씻어내려

꽃 이파리 하나 살금 따서

마른침 바른 입술에

슬그머니 문지르오.

 

어둠보다, 추위보다

독한 시련 견뎌내며

가야 할 길 저만치 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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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저들의 침략 야욕

 

"선임하사님! 저기 이상한 연기 같은 게 새 나오고 있습니다."

 

군사분계선 남측을 순찰하던 이상록 일병이 땅에서 수증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선임하사에게 보고했다.

 

"분명히 뭔가 있다. 저길 파라."

 

구정섭 중사가 굴토작업을 명령했다. 월남 파병 경험이 있는 구 중사는 직감적으로 땅굴임을 의심했다. 아군의 수색작업이 시작되자 북한 초소에서 연속으로 기관총을 쏘아댔다. 약 1시간 15분 동안 아군과 북한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아군 세 명이 전사하고 다섯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땅굴에서 노획한 반합에는 먹던 밥과 반찬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했다. 갱도작업 중 아군에게 들키게 되자 전선, 갱도 차와 레일 등도 그대로 두고 도망쳤다.

구정섭 중사에게는 을지무공훈장, 이상록 일병에게 충무무공훈장, 분대원 7명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계급 특진 등의 포상이 주어졌다.

1974년 11월 5일, 처음으로 그들이 판 땅굴이 발견된다.육군 제25 보병사단의 위수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에서 동북방으로 8km 떨어진 비무장지대 안에서였다. 너비 90cm, 높이 1.2m에 약 3.5km 길이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서울에서 불과 65km 지점이다. 한 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의 땅굴이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800m 남겨놓은 최전선에 위치한 데다 그 후에 발견된 다른 땅굴들과 달리 심도가 얕아 안전성이 여의치 않아 공식 발견된 땅굴들 중 유일하게 안보관광지로서 개방되지 못하고 있다.

1975년 3월 19일, 강원도 철원군 북방 13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인 육군 제6보병사단 관할지역에서 발견된 제2땅굴은 제1땅굴보다 그 규모가 훨씬 컸다. 현대식 굴착장비를 이용해 지표 45m 아래의 단단한 화강암을 뚫고 들어왔다.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남쪽 출구는 세 갈래로 나뉘어 뚫었으니 남침을 위해 세밀하고도 구체적으로 굴착된 땅굴이었다. 지하 50~160m에서 너비와 높이 2m, 길이 3.5km로 한 시간에 1만 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차량, 야포, 전차까지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이니 가히 터널 수준이라 하겠다.

그리고 3년 반이 지나 또 다른 땅굴이 발견된다. 1978년 10월 17일, 제2땅굴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제3땅굴이다. 판문점 남방 4km 지점의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지하 73m 깊이에 너비와 높이 2m, 길이 1635m의 아치형 터널로 한 시간에 3만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이다. 충격적인 건 서울에서 불과 44km 거리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제3땅굴은 1974년 남파간첩 김부성이 자수하면서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개성 근처에 머물면서 직접 땅굴을 팠다는 증언을 한 것이다. 당시 이 지역을 위수하던 제1보병사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이 땅굴을 사단 관할지역에서 발견함으로써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영전할 수 있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는데 실제 전두환 사단장은 현장에서 땅굴 발견을 진두지휘했었다고 한다.

 

“이건 관람이라기보다 우리 현실의 통증을 체험하는 거라고 밖에는…….”

 

제4땅굴에 들어가서 같이 동행하게 된 일행의 한마디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역시 입맛 씁쓸하게 하는 땅속이다. 땅덩어리가 분단된 것만 해도 서글픈데 땅속에서 느끼는 이념의 골, 갈라져서 그대로 굳어진 체념의 한반도는 여기 제4땅굴의 분위기 그대로인 듯해서 답답하고 암울하기만 하다.

 

"더 봐야 할 이유도, 의미도 없는... 그저 땅 밑일 뿐이야."

 

얼른 나와 하늘을 올려보았는데 이념의 틀에 엮이기 싫다는 듯 구름 뒤로 숨은 태양은 아예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

 

 

때 / 봄

곳 / 양구 해안면 펀치볼 마을 - 양구 통일관 - 평화의 숲길 - 을지전망대 - 제4땅굴

 

 

https://www.youtube.com/watch?v=kEkx6PYrf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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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영의 부크크 커뮤니티

장순영은 이러한 책들을 집필, 발행하였습니다. <장편 소설>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야베스,2004년) 대통령의 여자 1, 2권(중명출판사, 2007년) 아수라의 칼 1, 2, 3권(도서출판 발칙한 상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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