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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 거망산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_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인가

장한림 2022. 4. 1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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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여인의 삶과 이념의 괴리

<황석산, 거망산 - 그녀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인가>

 

 

 

 

여름휴가를 맞춰 몇몇 친구들과 친구의 고향을 방문했다. 남덕유산과 황석산 아래의 함양 서하면이 그곳인데 직접 가보니 나무랄 데 없는 휴양지이자 여름 피서지로 적격인 곳이다.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 등 영남권의 정자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친구의 집이 거연정 지척에 있다.

친구의 고향 집에서 뒷산처럼 가까워 보이는 황석산이 자꾸만 아른거려 산행지도를 검색해보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겠다는 심보다. 

 

"황석산에 다녀올게."

 

다음날 새벽, 친구가 간단한 먹거리를 챙겨 황석산 우전마을 들머리까지 태워다 준다. 용추계곡을 날머리로 하는 산행코스가 얼른 눈에 들어왔기에 행동에 옮기고 말았다. 

 

 

부녀자들의 피맺힌 한이 지금까지도 혈흔으로 남아 

    

우전마을에 들어서자 맑은 하늘이 아주 낮게 황석산 자락을 덮고 몇 점 구름이 산마루 위를 유영하고 있다. 많이 덥지도 않은 쾌청한 날씨다. 그런 날 새벽, 인적 없는 미답지를 예정 없이 탐방한다는 게 그저 어부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황석산 정상까지 5.7km? 짧지 않은 거리군.”

 

경남 거창에서 전북 전주로 통하는 교통 요지에 자리 잡은 황석산黃石山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함양군에 자리 잡고 있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 내린 기백산, 금원산, 거망산으로 이어져 흡사 칼을 꽂은 듯 언저리에 솟구친 봉우리가 황석산이다. 덕유산에 올라 황석산을 가늠하며 속에 넣어두고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었다. 

 

“오늘 거망산까지 갔다가 용추계곡으로 하산하면…”

 

그러면 친구들과 합류하게 된다. 그럴 요량으로 걸음을 빨리한다. 사과가 주렁주렁 먹음직스럽게 달려있다. 거창과 함양의 사과 맛이 일품인 걸 잘 알기에 더욱 탐스러워 보인다. 노송나무가 늘어선 길을 포함해 3km가량 콘크리트 도로를 걸어 사방댐과 효자정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여름엔 이 길로 산행하는 사람들이 없어.”

 

친구가 홀로 산행을 만류하며 했던 말뜻을 알 것 같다. 그늘이 없고 포장도로라 열기가 보통이 아니다. 효자정을 우측으로 두고 너덜 바윗길이 시작되지만, 여기부터는 나무들이 많아 햇빛을 피할 수 있다. 개망초 무리가 고개 치켜들어 환희 미소 짓고 물봉선이 수줍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개망초의 환대를 받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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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물봉선이 낯가림을 하는가보다

 

그리고 보게 되는 불그스름한 큰 바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바위를 보고 또 보면서 이내 숙연해진다.

1597년 정유년(선조 30년)에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5만여 명 중 2만 7천 명이 가또와 구로다 등의 지휘로 이곳 황석산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안의 현감 곽준과 전 함양 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 일곱 개 고을의 주민들을 모아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관민 남녀 혼연일체가 되어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에 맞섰다. 활과 창칼 혹은 투석으로 처절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황석산성을 지켜내지 못한다. 

정유재란 당시의 패전 상황이 ‘피바위’라는 제목의 안내판에 적혀있다. 서술은 좀 더 이어진다.

 

"왜놈들 칼에 내 몸의 피를 묻히기는 싫어."

 

왜구와의 격전이 벌어지면서 부녀자들도 돌을 나르고 부서진 병기를 손질하며 적과의 싸움에 온갖 힘을 다 뽑아냈으나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여인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며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 척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때 많은 부녀자가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그 혈흔이 남아있어 이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다.

이런 내용을 미리 알았다면 술이랑 사과랑 대구포라도 준비해서 간단하게나마 제사라도 드렸을 텐데, 막 올라오면서 혹여 우전마을 주민들이라도 만났더라면 깊이 고개 숙여 공경의 마음을 표했을 텐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의 자손들이 함양 땅에 살고 있으니 조국애와 지조를 상징하는 황석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손들이 대대로 번성하길 묵도하고 피바위에서 조금 더 올라서자 성터가 나타난다. 

황석산 정상에서 뻗은 산마루를 따라 골짜기를 감싸며 육십령으로 통하는 요새지에 쌓은 삼국시대의 산성이 여기 황석산성(경상남도 사적 제322호)이다. 이 산성 또한 저 아래 피바위와 함께 왜구의 침략을 막지 못한 한이 서리기는 마찬가지다. 국학자료원 ‘한국 기동학부 주해’에 ‘황석가黃石歌’가 우리말로 해석되어 있다.  

   

황석산성은 산천이 험준하여 천연의 요새로 

험하면서 견고하니 대방과는 다르나 

대소헌과 곽존재는 충성으로 절개 지켜 참되게 죽었구나.

저 녀석 백사렴에게 무슨 일로 서문 막는 일 시켰는가.

이 문 열자 적병 난입하여 나라 망하도다.

이때 창 위에 어머니 보이니 

사렴이 왔으나 어찌할 수 없구나.  

   

여기에서 대소헌은 함양군수 조종도, 곽존재는 안의 현감 곽준, 백사렴은 김해 부사 백사림을 가리킨다. 1597년 8월 17일, 왜장 가토의 병력은 황석산성 남문 쪽으로 돌입했다. 조종도와 곽준 등이 힘껏 싸웠으나 왜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전사했으며 성을 지키던 군사와 백성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코를 잘렸다. 한편 백사림은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처자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 도주했다. 황석가가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 황석산성이 길게 이어진다. 돌과 흙을 섞었거나 혹은 돌로 쌓은 성벽의 전체 길이가 2.75km에 달하는 이 산성은 영호남의 관문에 있는 것으로 보아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를 견제하여 축조한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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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 정상과 북봉이 성큼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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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의 산

얼마 전 갤럽은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 생활 중 으뜸이 등산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주말, 도봉산역이나 수락산역에 내리면 그 결과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많은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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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터를 벗어나니 물봉선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초들이 인적 드문 고지를 환하게 밝혀준다. 그리고 남봉 방향의 암릉 지대로 올라서자 바로 전면에 우뚝하고도 뾰족한 암봉이 정상다운 위용을 갖추고 우뚝 솟아있다. 

정상 너머로 역시 바위 봉우리인 북봉이 보이고 그 뒤로 거망산이 구름을 이고 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기백산과 금원산이 선명한 마루금을 잇고 있어 바라보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황석산 정상(해발 1192m)은 커다란 바윗덩이들을 쌓아 올린 것처럼 좁고 아찔하여 멀리 조망을 즐기기엔 다소 위험스럽다. 그래도 덕유산을 가까이 바라본다는 것이 여간 기쁜 게 아니다. 덕유산의 후덕한 품새가 향적봉으로부터 바람을 타고 실려 와 코로 스미는 것만 같다. 

피라미드 꼭짓점에 선 기분이랄까. 아무도 없는 홀로만의 산정이지만 바람맞으며 내려다보니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 산신으로 변신한 기분이다.

 

산 오르는 이 등짐엔 한 아름

인생의 무게 담겨있네

굵은 동아줄 휘어잡은 손에

역동의 세월 두툼하게 뭉쳐있네

산 까마귀 요란스레 훼치며 날아오더니

등짐 모두 풀어 놓으라, 잡은 줄 다시는 놓치지 마라

수직암벽 맴돌며 떠나지를 않네   

  

북봉으로 향하면서 돌아본 황석산 정상이 더욱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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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면으로는 밧줄이 드리워져 수직에 가까운 암릉 구간이다. 내려와서 올려다보면 황석산의 암릉 급경사면은 일고의 용서라는 게 없을 듯 단호하고도 날카롭다. 오른쪽으로 지붕만 보이는 남봉도 우람한 모습이다. 

북봉 진입지점에 위험한 암릉 구간을 피해 우회하라는 표지판대로 순순히 우회하기로 했는데 그 길도 만만치 않다. 밧줄 구간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을 따갑게 한다. 수고했노라고 노란 미역취가 살그머니 종아리를 쓰다듬는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뎌 산내골 갈림길인 뫼재를 통과하고 황석산 정상에서 2.45km를 내려온 장자벌 삼거리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이미 바닥난 물병을 입에 털어 넣는다. 미지근하고 찝찌름하다.  

 

         

마지막 빨치산, 이념의 희생양 등 다양한 수식어의 주인공, 정순덕의 활동무대였던 거망산으로  

   

다시 거망산 아래 안부에 닿았을 때는 뜨거운 햇볕에 양팔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오면서 드넓은 억새군락을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을이면 여기에서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광활한 억새밭이 장관이라고 한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 햇빛 받은 은빛 억새의 일렁임을 떠올리며 힘을 뽑아낸다. 

거망산擧網山도 함양군에 소재한 산으로 용추사가 있는 기백산(해발 1331m)을 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백두대간이 덕유산과 남덕유산을 치솟게 했다가 다시 뻗어내려 월봉산, 기백산과 금원산을 거쳐 거망산을 추켜세우며 황석산으로 이어진다. 이들 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저 아래 용추계곡을 충분히 적시면서 용추폭포를 비롯한 많은 폭포가 시원스레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다.

거망산은 6·25 한국전쟁 때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의 활동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정순덕에게 잡힌 국군 1개 소대가 무기를 탈취당하고 목숨만 건져 하산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진 바 있다. 황석산 정상부터 거리상 4km가 조금 넘는 거망산 정상(해발 1184m)에도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정순덕, 대체 어떤 여자일까. 아무도 없는 거망산에서 소소히 이는 바람결에 그녀의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1개 소대 병력을 포로로 붙잡아 무장해제시켰다는 여자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피아彼我 혹은 이념을 떠나 마구 궁금해진다. 

 

“나는 1933년 음력 6월 20일 아버지 정주삼 씨와 어머니 진도원 씨의 1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에서 아홉 가구가 살던 곳,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이다.”

 

1950년 10대 후반의 정순덕은 한국전쟁 중 이 지역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부역했던 남편 성석근이 국군을 피해 조선인민유격대에 입대하면서 결혼 몇 달 만에 헤어지게 된다.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난 신부는 그해 12월, 신랑의 겨울 옷가지를 챙겨 산으로 들어갔다. 겨우 20여 일 동안 같이 지낸 남편이 사망하자 유격대에 합류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하게 된다. 남편을 잃은 정순덕은 13년이란 세월 동안 지리산을 누비고 다녔다. 

 

"마치 짐승처럼 누볐어."

 

함께 활동했던 빨치산 대원이 한 말이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더 지난 1963년 11월 12일 새벽,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생가 근방인 지리산 내원골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함께 있던 남성 대원 이홍이는 사살되었다. 정순덕은 체포 당시 총상 입은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23년간 수용되었다가 전향하여 1985년 석방되었다.

 

"봉제공장에서 5년간 시다를 했지. 그러다가 봉천동 만남의 집에 밥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갔던 거야."

 

그녀는 봉제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만남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했다.

 

“나는 고문과 강요에 의한 남한 측의 전향 공작에 따라 전향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었을 뿐이다. 따라서 전향을 무효로 하고 북조선으로의 송환을 요구한다.”

 

정순덕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한으로 송환될 때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고향이 경남이고 전향서를 쓴 적이 있다는 이유로 북으로의 송환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렇게 남한에 남아 살다가 71세가 되던 2004년, 인천 길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만다. 

 

“같은 민족끼리 이념 갈등으로 아팠던 사람이 이 땅에 어디 당신뿐이었겠는가.”

 

거망산 앞으로 길게 펼쳐진 산그리메

 

덕유산과 지리산의 연봉들에 망연한 시선을 두고 서글펐던 과거의 흔적을 거둬낸다. 막 지나온 황석산 정상 아래까지 이어진 능선에서 온통 참억새로 뒤덮인 억새 대평원의 장관을 상상하자 머잖은 가을이 기다려진다. 용추사 방면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정상에서 140m 아래의 지장골 삼거리로 다시 내려서니 보라색 투구꽃과 물봉선이 고개 숙여 배웅해주는데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걸음을 빨리하게 된다.

더 내려와 지장골 암반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담그면서 지친 기운을 끌어낸다. 3km가량 내려온 지장골 입구에서 조금 더 내려서면 용추계곡이다.

정순덕에게 잡혔다가 생환한 기분이 든다. 먹거리와 물이 떨어져 진작부터 가붓해진 배낭이 그녀에게 무장해제를 당한 느낌이다. 오후 한 시가 지나 친구들과 만나 축축한 땀을 씻어내고 갈증도 해소하고 허기도 채우니 황석산에서 거망산으로의 갑작스러운 산행이 아스라하기만 하다. 

 

용추폭포에 이르자 벼락 산행의 피로가 가시는 듯하다

                   

 

 

때 / 여름

곳 / 거연정 입구 - 우전마을 - 피바위 - 황석산성 - 황석산 - 거북바위 - 북봉 - 지장골 갈림길 - 거망산 - 지장골 갈림길 - 지장골 - 용추계곡 – 용추사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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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역사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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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전설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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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영의 부크크 커뮤니티

장순영은 이러한 책들을 집필, 발행하였습니다. <장편 소설>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야베스,2004년) 대통령의 여자 1, 2권(중명출판사, 2007년) 아수라의 칼 1, 2, 3권(도서출판 발칙한 상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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