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의 혹한에 화사하게 핀 목화송이, 설산 덕유산 종주
예약한 택시를 타고 내린 남덕유산 들머리, 영각사 진입로에 도착했을 때는 정확히 새벽 5시 50분이다.
이제부터 고행일 수 있는 이 산, 아직 어둠에 덮인 이른 새벽, 대략 27km의 눈길, 이 산 들머리, 영각통제소에 들어서며 코끝 찡하고 가슴 저려오는 건 왜일까.
어젯밤
들어본 적도, 와본 적은 더더욱 없는 한적한 시골
바쁘게 지나간 한 주 잠시 돌아볼 겨를 없이 곧바로
고속버스에 몸 실어
세 시간여 밤길 달려 내린 서상이라는 마을
풍경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자정 무렵
선유장, 이름보다 훨씬 빈약한 여관에서
한림청풍 처음처럼 반 병씩에 객잠 청한다.
언제 잠들었나 싶게 알람 울리고
출정하는 군인처럼 등산화 조여 맨다.
깜깜한 어둠, 세찬 새벽바람, 흩날리는 눈발,
눈 쌓이고 얼어붙어 더욱 길고 더욱 험할 이 산,
우린 왜 빨려가듯 이 산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두 번, 산에 갈 때 두 번 기도하라고 했던가.
하나님! 우리가 원해 온 곳입니다.
우리가 원한 그대로 이 산에 녹여질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저와 제 아우 청풍이 평생 이 산을 그리워할 수 있도록
이 산이 우릴 사랑하게 하소서.
첫 계단을 오를 무렵 동이 트기 시작한다.
마치 목화밭 같은 설경... 저 철계단을 오르면 남덕유산 정상이 좀 가까워지려나.
이 철계단 우리 발자국은 곧 지워지겠지만 눈꽃을 가르고 쭈욱 솟은 이 철계단은 우리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
산정 높이 올라 보게 된 일출이다. 아침나절, 날이 흐리고 눈발이 날려 산보다 더 높은 구름 위로 태양이 솟기 시작한다.
남덕유산 정상이 보인다. 그러나 오르는 것을 거부하듯 더욱 세차게 몰아치는 강풍과 눈발로 인해 걸음을 내딛기가 버겁다.
사진 찍으라고 세우기가 미안할 정도로 혹독한 추위지만, 산세의 조망만큼은 설악을 앞선다는 덕유산인데 춥다고 그냥 지나칠까.
들머리에서 남덕유산 정상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제부턴 능선길, 덕유산 16km 주능선엔 1,000미터 이하로 낮아지는 구간이 없다고 한다. 덕유산 능선은 노고단에서 뻗은 지리산 주능선, 설악산 서북릉, 소백산 주능선과 함께 남한 땅을 대표하는 장쾌한 능선으로 꼽힌다. 동으로 산줄기들이 중첩되면서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남으로 가로로 뻗은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산행 내내 계속되는데 완전히 개이지 않은 기상과 혹한 때문에 그 즐거움이 조금은 감소된 듯하다.
눈안개가 뿌연 능선길을 보고 있으니 산에선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가끔은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덕유산은 사방이 뚜렷하게 다른 조망을 보인다. 지나온 길 남덕유는 굵고 힘찬 산줄기들로, 북쪽 적상산쪽을 바라보면 마치 맹수의 몸짓을 연상시키는 우람한 산봉들로, 서쪽은 광대하고도 아늑한 벌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런 변화무쌍한 조망 때문일까. 얼굴에 동상이 걸릴 만큼 춥지만 종주산행이 그다지 힘들거나 지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덕유산 능선길에 자주 나타나는 눈꽃터널 또한 지친 몸에 에너지를 부어주는 볼거리라 할 수 있다.
삿갓골재 대피소에 이르렀다. 보통 덕유산 1박 2일 종주코스 중 절반 거리쯤 된다는 여기서 1박을 하는 게 보통이다.
‘산그리메’, 산봉우리들의 중첩된 능선의 아름다움을 어느 시인은 그렇게 표현했다. 덕유산에 오르면 이 산그리메가 유별나게 아름다운 것 같다. 앞산 그림자는 어둠처럼 짙고, 그 뒤 감청색에서 남색으로 차차 엷어지다가 종내는 하늘과 합해지고 마는 겹겹 산릉들은 마치 안젤리나 졸리처럼 풍만한 미인의 교태를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파도처럼 펼쳐지던 능선의 어느 지점에서인가 삼각파三角波처럼 격하게 치솟는 봉우리를 보면, 그 섹시한 아름다움은 극에 달한다.
덕유산 능선을 하염없이 걷다 보니 그간 사랑했던 이들이 하나 둘 떠오르더라. 십 수년, 단 한 번도 생각나지 않던 이들까지 주마등처럼 펼쳐지곤 한다. 그다지 많지 않았던 시간들, 참으로 편하게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USB에서 꺼낸 파일처럼 열리더니 그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울리곤 하는 것이다.
우리, 이 산 능선 한편에 묵묵히 자리 잡고 눈꽃 가득 피었지만 지저귈 새들 기다리노라
우리, 지금 비록 다 헐벗어 얼음옷 껴입었으나 진초록 울창한 수림 기약하노라
여기, 다시 돋을 무성한 잎새들로 천손만객 쉼터를 형성하리
그늘져 핏기 잃은 이들, 이곳에서 역동의 대기를 담고 다시 힘차게 내딛으리
힘은 들어도 경관을 이루는 설목들이 피로를 덜어주네
지나온 곳은 멀고 갈 곳도 아직 멀더라. 내려다보면 더더욱 가슴을 여미게 하는 곳, 거기가 바로 산이다.
보이는 곳마다 산과 눈뿐이다.
무룡산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도 향적봉까지는 8.4km나 되는 머나먼 길이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천불동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덕유산에서 지리산과 적상산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들이 더 멋지다고 느껴지는 건 아마 한눈에 들어오지만 원근이 명확한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쭉 걸어오며 느꼈지만 덕유산에서는 산과 산의 거리 간격이 거의 적당한 고도에서 유지되기 때문에 능선을 지나고 봉우리를 넘을 때 느끼는 감회가 여느 산보다 새롭고 아름답다.
덕유산의 능선과 골들은 갈수록 그 경관이 수려하고 호방해서 눈을 뗄 수 없는 대하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려오는 이들이 부러운 시점이다. 오르막에서 기어가 잘 안 먹혀 끙끙대며 중봉을 향해 힘든 걸음을 옮긴다.
참으로 숨 가쁜 하루
미끄러질 새라 한 손으로 돌팍 움켜쥐고
덜 젖은 한 손으론 얼어 굳어지는 볼과 턱 비벼가며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향적봉으로.
내리막이 결코 반갑지 않다.
그만큼의 오르막이 오늘처럼 부담스러운 적이 또 있을까 싶다.
겨우 3, 40 센티 정도의 좁은 폭
벗어나면 여지없이 무릎까지 푹 빠지는 눈밭
열 시 방향에 보이던 삿갓봉이 어느새 두시 방향에
세 개의 산, 숱하게 이어지는 령, 봉, 재 그리고 골
가도 가도 새로 생기는 팻말
그다지 줄지 않는 이정표 거리
끌리듯 쫓기듯 중봉 지나니
아아, 드디어 오래전 그 겨울 그 향적봉이 저기 보인다.
덕유산은 한반도 남부의 한복판을 남북으로 꿰차 군사적 자연장벽이다. 역사적으로 신라와 백제가 각축을 벌이던 국경선이 여기였고 영호남을 가르는 장벽 가운데서도 가장 험한 경계선 중 하나였다. 아마도 이 향적봉이 백제와 신라 최고도의 GP쯤 되지 않았을까.
은은한 향기가 그득히 쌓여 있는 봉우리라 하여 향적봉이다. 표지판과 함께 3남을 살펴보니 북으로 가깝게 적상산이 보이고 멀리 황악산. 계룡산이 희끗하다. 서쪽으로 운장산, 대둔산, 남쪽은 오늘 들머리 길로 삼은 남덕유산이 있다. 그리고 지리산 반야봉과 동쪽으로는 가야산, 금오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향적봉에서 표고차 100m 아래에 있는 설천봉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곤돌라를 타고 하산하면서 덕유산 설산 산행을 마무리한다.
때 / 겨울
곳 / 영각매표소 - 남덕유산 - 월성재 - 삿갓봉 - 삿갓골재 대피소 – 무룡산 - 동엽령 - 백암봉 - 중봉 - 향적봉 – 설천봉 - 무주리조트
https://www.youtube.com/watch?v=UZhW1bN55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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