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짓가랑이 밑을 기어서라도 품은 뜻을 이루리라
부모를 일찍 여읜 한신은 어릴 적부터 무척 가난하여 동가숙 서가식 하며 빌어먹기 일쑤였다.
남창에서 낮은 관직을 맡던 정장亭長의 집에서 신세를 지다가 미운털이 박혀 쫓겨난 한신은 강가에서 낚시로 소일하며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런 한신을 보고 빨래하러 나온 아낙네가 가엾이 여겨 주먹밥을 주곤 하였다.
“훗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밥도 못 먹고 다니는 게 불쌍해서 밥을 좀 준 건데 무슨 보답을 바라겠느냐?”
이런 연유로 표漂 씨 성을 가진 아낙네가 한신에게 먹을 걸 주었다는 표모반신漂母飯信이란 말이 떠돌았다. 그렇듯 성 안의 사람들은 한신을 비렁뱅이이자 무능력한 인물로 여겨 하찮게 대했다.
그런데도 한신은 무신으로서의 큰 뜻을 품고 항상 칼을 지니고 다녔다. 고향 회음의 저잣거리를 거닐 때 칼을 찬 한신이 눈에 거슬렸던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었다.
“비렁뱅이에 겁쟁이가 칼을 차고 다니는 게 눈꼴이 시어 도저히 못 봐주겠구나. 그 칼로 나를 찌를 수 있겠느냐. 칼을 빼지 못하겠다면 내 가랑이 밑을 기어 나와야 네가 몸성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벌어질 사태를 주시했다. 그런데 한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바로 바닥에 엎드려 그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갔다. 맥이 빠져버린 사람들은 한신을 더욱 조롱하며 무시했다.
강태공이나 훗날의 제갈량처럼 명성이 높아 등용되는 신분과는 동떨어진 한신이었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처음 초패왕 항우를 따랐으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 때문에 요직에 중용되지 못했고 한직을 전전했다.
“힘만 셌지,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소인배구나.”
실망한 한신은 한 왕 유방의 진영으로 갔으나 거기서도 역시 미관말직에 머물다가 한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딱 한 사람, 한신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소하는 한신이 떠났다는 보고를 접하고 달밤에 쫓아가 불러 세웠다. 뛰어난 인재는 반드시 붙잡아 내 편에 두어야 했다. 월하추한신月下追韓信이라는 고사의 발단이다.
달빛 아래 한신을 쫓아가서 데려온 소하는 유방에게 중용할 것을 천거했다.
“한신은 한나라에 절대 필요한 인물입니다.”
가장 아끼는 오른팔 소하였지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한 왕 유방이 되물었다.
“여러 장수가 떠났어도 공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소. 한신이 그렇게 대단하오? 내가 보기엔 그저 그런 인물 같은데 말이요.”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으나 한신은 이 나라의 그 누구도 견줄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왕께서 만약 지금 한중의 왕에 만족하신다면 한신이 없어도 되겠지만, 만천하를 취해 황제에 등극하시려면 한신이 없이는 불가능하옵니다.”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안의 선비 중 비견할 자가 없다는 소하의 천거에 따라 한신은 한나라 대장군이 된다. 그 후 한신은 다섯 나라를 평정하고 마침내 항우를 쓰러뜨리며 가장 강력한 초나라까지 흡수하면서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한신은 소하, 장량과 더불어 한나라 초기의 세 영웅을 뜻하는 ‘한초삼걸漢初三傑’로 불린다.
통일 한나라에서 초왕으로 봉해진 한신이 고향을 방문하고는 예전에 인연이 있던 세 사람을 다시 만난다.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토록 어려웠던 나를 쫓아내시었소. 이 돈이면 그때 진 신세에 모자라지 않을 것이요.”
한때 신세를 졌던 정장亭長을 불러 백 전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가랑이 밑을 기게 했던 불량배에게는 일천 전을 주었다.
“그때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너를 죽였다면 나는 죄인으로 쫓기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네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아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라.”
과하지욕의 고사성어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큰 뜻을 지닌 이는 쓸데없이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강가에서 밥을 주었던 표 씨 아낙네에게는 천금의 황금을 하사했다.
“그때의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열정을 잃지 않고 살게 되었소이다.”
밥 한 그릇 주고 천금을 얻는다는 일반천금一饭千金의 고사가 생긴 경위이다. 현재의 초라한 모습만으로 사람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새겨지는 말이기도 하다.
큰 도둑은 작은 물건에 손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작은 욕심을 부려 큰일을 망치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흥분하여 균열을 일으킨 경험을 반성하게 된다.
한 나라의 부처를 책임질 장관에 임명되고도 과거에 저지른 과오로 물러나는 일이 다반사인 요즘 세상에 과하지욕의 의미를 빗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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