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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전망대에서 봉우재 부근으로도 사면을 타고
진달래가 타오른다. 눈 비비고 다시 보면 출렁이는
핑크빛 바다가 거기 있다. 계곡 쪽으로는
여름을 준비하듯 연초록으로 변색하는 중이다.
오동나무 사라진 곳에 동백이 하염없이 붉게 피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금빛 봉황이 오동 열매를 따 먹는다. 그러자 봉황이 깃든 곳에 새 임금이 난다는 소문이 퍼진다. 왕은 오동나무숲을 없애버리라고 명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동도에 어부와 아리따운 여인 부부가 살았는데 도적 떼를 만나게 된 아내가 벼랑 끝에서 푸른 물결에 몸을 던졌다.
바다에서 돌아온 지아비는 겨우 슬픔을 가누고 오동도 기슭에 무덤을 만들고 장례를 치렀다. 북풍한설 몰아치던 그해 겨울부터 하얗게 눈 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기 시작했다. 여인의 붉은 순정이 동백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애틋한 사연과 함께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을 지닌 동백꽃이 바람에 흩어져 온통 주위를 붉게 물들인다. 11월경에 빨간 꽃망울을 터뜨려 겨우내 피어 3월경에 절정을 이룬다.
남쪽에서 북상하는 봄이 가장 먼저 볕을 드러내는 곳, 여수 오동도 내에는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심어졌다. 그 오동도에 비가 내리면 용이 지하통로로 와서 빗물을 먹고 간다는 연등천 용굴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용굴을 막아버리자 새벽이 되면 자산공원 등대 밑에 바다로 흐르는 샘터를 이용해 용이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파도가 일고 바닷물이 갈라지는 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바람골, 해돋이 전망대, 부산 태종대를 떠오르게 하는 갯바위를 둘러보고 오동도를 빠져나와 여수시가지에서 돌산대교를 건너 갓김치로 유명한 돌산마을에서 잠시 멈춘다. 요즘 갓 수확 철을 맞은 주민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루 25톤가량의 갓이 연한 맛의 김치로 담가진다. 돌산 갓은 병충해가 없어 농약을 뿌리지 않는다고 한다. 청정 남해의 역사유적지 여수를 살짝 눈 여김만 하고 오늘 산행지 영취산으로 향한다.
바다에서 산으로 활활 타들어 가는 붉은 불길을 쫓아
경남 창녕의 화왕산, 경남 마산의 무학산과 더불어 전국 3대 진달래 군락지 중 한 곳으로 꼽는 영취산은 국내에서 제일 먼저 진달래가 물드는 산이기도 하다. 꽃이나 단풍 등 그 지역의 축제 대상을 보려고 산행지를 고르지는 않지만 봄을 기다렸었나 보다. 화사한 남녘, 여수의 봄 바다와 만발한 진달래가 먼 길 영취산으로 잡아끌었다.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인식하여 기우제나 치성을 들여왔던 영취산은 석가모니가 맨 마지막으로 설법했던 인도의 영취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진달래 축제 행사장을 뒤로하고 정상인 진례봉까지 1.9km라고 표시된 여수시 월내동의 돌고개로 들어선다. 사진 찍느라 만면에 웃음 가득한 상춘객들이 빛깔 고운 벚꽃 터널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진달래를 주제로 많은 시와 시조들이 현수막에 걸려 가는 걸음을 잡아당긴다. 김종안 시인의 시비 역시 진달래를 모티브로 했다.
그대여
저 능선과 산자락 굽이마다
셀레임으로 피어난
그리움의 바다를 보아라.
모진 삼동을 기어이 딛고
절정으로 다가오는
순정한 눈물을 보아라.
그리하여 마침내
무구한 사랑의 흔적으로 지는
가없는 설움을 보아라.
그러나 그대는 알리라
또 전설처럼 봄이 오면
눈물과 설움은 삭고 삭아
무량한 그리움으로
다시 피어날 것을
곧바로 산등성이 진달래 군락이 클로즈업된다. 측면 아래로는 하얀 벚꽃 숲이 장관이다. 연분홍, 진초록, 연초록에 갈색과 흰색이 약간 흐리긴 하지만 엷은 하늘색과 어우러져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듯하다.
꽃 숲 너머 여수 정유공장 굴뚝으로 연기가 뿜어 나고 그 뒤로 묘도대교가 야트막한 봉화산으로 이어지더니 이순신대교까지 보인다.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선 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하여 산업시설에서 뿜어 나오는 공해를 견뎌내고 영취산을 진달래의 명산으로 거듭나게 했으니 여리게 홍조 띤 이 산의 진달래야말로 역경을 이겨낸 억척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공해에 약한 대다수 수종은 고사하고 공해에 강한 진달래가 무성하게 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흐릿한 하늘빛으로 꽃은 더욱 붉어 보인다. 산세 때문에 그렇겠지만 강화도 고려산이나 달성 비슬산의 진달래 군락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창조해낸다. 그리 높지 않고 무척 촘촘하게 피어 숲을 이룬 곳이 많다. 길마다 자연스럽게 진달래 군락으로 이어진 붉은 숲길을 올라와 뒤돌아보면 그 길은 무대로 오르는 빨간색 카펫이고 진례봉까지의 능선은 마치 붉은 안장을 올려놓은 거대한 말 등처럼 보인다. 늦게 출발해서인지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억새 군락지에 들어서면 산업단지와 바다가 다시 나타나고 드문드문 농경지도 눈에 들어온다. 풍성한 곡선미를 보이며 눈앞에 버텨 섰던 가마봉에 오르자 사방이 트여 숨차게 올라온 보람을 느끼게 한다.
광양만을 아우르는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공장이 늘어선 여천공단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이채롭다. 여수의 산이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라 하겠다. 광양만과 공장 사이의 묘도에서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읽게 된다. 이 섬에서 작전 회의를 마치고 하룻밤을 보낸 장군은 다음날 왜 함 45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것이 노량해전이다. 그러나 이충무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내 죽음을 적이 모르게 하라.”
두고두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장군의 마지막 음성이 귓전을 맴돈다. 진례봉, 시루봉, 영취봉과 뒤로 뾰족하게 솟은 호랑산을 바라보고 걸음을 옮기자 점차 날이 개기 시작한다.
주 능선 좌측은 소나무 숲이고 우측은 진달래밭이다. 진초록과 연분홍의 대비가 극명하면서도 아름답다. 아래로 파란 지붕이 많은 마을에 있는 상암초등학교가 여기 오르는 또 한 군데의 들머리이다.
흙과 바위를 고루 밟고 걷다가 암봉 지대인 개구리바위 전망대에서 긴 계단을 올라 정상에 오른다. 진례봉進禮峰(해발 510m), 통신탑이 세워진 공터와 한문 초서체로 휘갈겨 쓴 정상석 앞에 많은 등산객이 모여 있다.
정상 전망대에서 봉우재 부근으로도 사면을 타고 진달래가 타오른다. 눈 비비고 다시 보면 출렁이는 핑크빛 바다가 거기 있다. 계곡 쪽으로는 여름을 준비하듯 연초록으로 변색하는 중이다. 이순신대교 너머로 희미하게 광양시와 백운산이 시야에 잡힌다.
수많은 등산객의 발자취인 리본들은 아마도 이맘때인 봄철에 달아놓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몰리는 봄철에 일행들의 길잡이가 되게끔 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산로에서 바위굴을 지나고 기도 도량인 도솔암으로 오르는 기나긴 침목 계단은 그냥 지나쳐 내려간다. 봉우재에도 행사가 한창이다. 많은 차량이 주차된 봉우재를 지나쳐 지나온 진례봉과 가마봉 능선을 쳐다보곤 내처 거친 바위 봉우리인 시루봉(해발 418.7m)까지 오른다.
엷은 여수 바다에 눈길 담갔다가 작은 헬기장을 지나고 꽃길을 걸어 돌탑 쌓아 올려진 영취봉(해발 439m)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흥국사로 내려가는 길은 꽃길이 아닌 너덜 돌길이다. 돌이 많아서인지 돌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내려서고 보니 백팔 돌탑공원이다.
용왕전이라고 적힌 현판이 있는 곳에서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고 흥국사에 닿자 만발한 벚꽃들이 수고했다면서 반겨준다. 고려 명종 때 호국사찰 흥국사는 이름 그대로 나라의 융성을 위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300여 명의 승려가 주둔하며 충무공 이순신을 도왔던 사찰로 진례봉과 영취봉이 둘러싸고 있다.
산을 내려서서도 시야엔 온통 봄 색깔이 어우러졌는데 그 색은 여수를 떠날 때까지도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때 / 봄
곳 / 돌고개 주차장 - 가마봉 - 진례봉 - 도솔암 - 봉우재 - 시루봉 - 영취봉 - 흥국사
https://www.youtube.com/watch?v=afvOwCNxJ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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