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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17_ 베일

장한림 2022. 5. 1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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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17.

 

 

베일

 

 

 퇴근시간대의 논현동 사거리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의 보행과 차량 경적으로 여간 분주하지가 않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몰려드는 학생들로 인도는 더욱 북적거렸다. 2층 커피숍에서 내려다보는 어스름 거리가 이젠 익숙한 정감으로 느껴진다.

 어딘가 텅 빈 것 같았던 느낌의 서울 생활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뜬 기분이더니 최근 들어 풍성하게 꽉 들어찬 느낌이다. 현주는 커피 향뿐 아니라 첼로의 선율을 느낌 좋게 가슴으로 쓸어 담고 있었다. 퇴근하기 직전 이정후 차장에게 결재서류를 올리며 쪽지 하나를 함께 건넸다

 

 ‘그 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달라졌다. 달라지고 말았다. 최근의 일상과 감정은 대다수 정후로 말미암아 형성되고 있었다. 정후에 대한 연정이 움틀수록 오정태 전무가 더욱 부담으로 여겨졌다. 그는 늘 하던 것처럼 퇴근하면서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직원들 일부가 퇴근하기 전이라 조심스레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통화 도중 통화음이 두 번이나 끊기고 말았다. 재무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자 현주는 내부전화기를 들어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정후 차장은 아직도 일을 마치지 않고 있었다. 유리 벽 너머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정겹게 느껴진다.

 

 - 그예 그가 가게 되는구나. 그로 인해 막 영롱한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예정된 일이었지만 현주는 그가 유럽을 맡아 떠난다는 게 괜히 서글퍼졌다. 그러다가 그가 떠나기 전에 확실한 인연을 맺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들었다.

 

 - 이제 당신이 없으면저 혼자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일이든, 삶의 의미든 당신과 함께해야.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걸 어떡해요.

 

 현주는 그와 함께 지리산을 다녀온 후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의식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은 그 근간조차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비록 흩어져 없어질 구름 꼬리에 비유하며 둘의 관계를 깎아내리려 했지만, 의 그런 표현이야말로 담아둘 의미가 아니었다. 지리산은 아름다운 추억의 시점이고 연장선이었다.

 

 - 정후씨는 그냥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야. 그 사람도 나처럼 달라질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그의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어. 그도

 

 커피숍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가까워져 온. 현주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정후가 전화를 받았다.

 

 “한 시간이나 지났어요. 기다리다가 전화 드렸어요.”

 “그만 기다리고 집에 가. 오늘 할 일이 많다.”

 

 정후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잘못 들은 걸까, 목소리가 크게 비틀려 있다. 쪽지를 건넬 때 그의 책상은 거의 정리되어 있었다.

 

 - 갑자기 무슨 할 일이 많아졌다는 거지! 그만 기다리고 집에 가라고? 사무실에 누가 온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다니.

 

 현주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의 휴대전화로 걸자 정후는 더욱 쌀쌀하게 쏘아붙였다.

 

 “오늘 너랑 만날 기분이 아니라니까. 그만 끊는다.”

 

 현주는 커다란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의 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싸늘했고, 말투도 무엇엔가 크게 틀어져 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가 이토록 화날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몰려들었다.

 

 - 왜지?

 

 현주는 급하게 커피숍을 빠져나와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 문은 잠겨있고 불도 꺼져있었다. 핸드백에서 출입 카드를 꺼냈다. 오는 중에 정후가 사무실을 나갔을 거로 생각하면서도 문을 열고 스위치를 올렸는데 그의 자리에서 그는 석고처럼 굳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책상 위에는 소주 한 병이 비어있었고 또 한 병의 뚜껑이 열려 있다. 안주도 보이지 않는다. 현주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슨일이세요.”

 

 현주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정후는 아무 말 없이 소주병을 기울여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차장님!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현주는 의자를 끌어당겨 정후의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김현주! 날 놔두고 그냥 들어가라. 혼자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그래.”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어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

 “…….”

 

 정후의 표정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저 때문인가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다음에 이야기하자.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정후는 의자를 회전시켜 등을 돌려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병을 거꾸로 세워 소주를 들이부었다.

 

 - 나 때문에 화난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현주는 그가 자신 때문에 화낼 일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거란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탈진된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 그 일 때문이군. 결국, 게 된 건가요?

 

 한 시간 전에 사무실을 나설 때만 해도 정후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었다.

 

 - 그 일 때문이라, 어떻게 알았을까!

 

 현주는 초조해졌다. 이미 주량 이상의 술을 안주도 없이 마신 정후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유를 캐물을 수도 없다. 현주는 정후가 마시던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바닥에 조금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더 없나요. 그렇게나 화나셨는데 겨우 두 병이에요? 제가 더 사 올까?”

 

 현주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렇게 말을 걸었다. 양복저고리를 집어 든 정후는 벌떡 일어나더니 획, 돌아서 사무실을 나갔다. , 하고 문이 닫혔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일었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현주가 사무실 문을 잠그고 따라 나갔으나 이미 정후는 보이지 않는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의 차는 그대로 세워져 있. 택시 승차장에도, 버스정류장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현주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솟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정후의 단축번호를 눌렀지만 받지 않는다. 탁하고 습한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현주의 몸쪽으로 불어왔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린 현주의 눈에 물방울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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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후는 결재서류를 검토하면서 현주가 작성한 기록내용에 누락사항을 발견하고는 현주를 부르려 했는데 그녀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누락사항 하나만 확인하고 일과를 마치면 된다. 팀원들이 하나씩 둘씩 퇴근했다.

 

 - 통화가 길어지려나.

 

 정후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돌아왔을 때까지도 현주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퇴근 무렵 업무 전화는 아닐 테고 아마도 애인과의 통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체를 웅크리고 옆자리의 직원들이 들을세라 소곤소곤 통화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후는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

 

 - 내가 질투를?

 

 정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지간해서는 저처럼 길게 사적인 통화를 하는 현주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후는 기지개를 켰다. 다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자리에 왔을 때까지도 통화가 계속되자 정후는 슬그머니 짜증이 나려 했.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녀였다.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저처럼 다정하게 구는 애인을 두고 그런 표현을 했다는 게 이중적이란 느낌까지 들게 하는 것이었다. 통화를 마친 현주에게 서류의 누락사항을 기록하라고 건네주었는데, 누락 부분을 채워 다시 건네주는 현주의 손에서 쪽지 한 장이 함께 건네졌다

 

  - 뭐야? 지 애인하고 실컷 통화하더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한다고?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논현동 사거리의 커피숍에서 기다리겠다는 메모가 적혀있었다마지막으로 두 명의 직원이 퇴근하자 정후도 일어나려고 양복 상의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현주의 자리로 시선이 끌렸다.

 바로 그때 쭈뼛, 머리가 서는 느낌을 받았다. 정후는 현주의 자리로 성큼 다가갔다. 순간적으로 한 사람이 번쩍하고 시야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가로, 세로, 대각선의 퍼즐이 한순간에 조합되는 것 같은 야릇한 예감. 몸에 전율이 일었다.

 

 -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차는 걸까.

 

 정후는 자신의 느낌이 절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 스민 예감은 이제까지 벗어난 적이 없었다. 현주의 직통전화기를 집어 들고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여섯 번의 신호음이 들리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제발

 

 가슴을 조여 오는 긴장감 탓에 팔목에 힘이 들어갔다.

 

 “. 오정태입니다.”

 

 ! 쿵쾅! 정후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머리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두개골이 깨지는 듯 아찔하게 별이 튀었다. 정후는 제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정후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지는가 싶더니 검붉은 흙빛으로 바뀐다. 다시 일어나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현주 자리의 전화기에 벨이 울렸다. 벨은 세 번 울리더니 멎는다. 현주가 그렇게 오래 통화한 상대는 정태였다. 정후가 그이라고 농담 삼아 호칭하던 현주의 남자는 불길한 예감 그대로 오정태 전무였던 것이다. 조합된 퍼즐에 굵은 고딕체로 그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

 

  -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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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을 막 완주한 사람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심란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을 사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안주도, 잔도 필요 없이 병째 마셨다.

 

  - 그랬어, 그렇게 된 거였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정후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서렸다. 화가 솟구치면, 그럴수록 한 발자국 뒷걸음쳐라. 흥분되면, 더욱 한 박자 행동을 늦춰라. 살아오면서 스스로 지침처럼 삼았던 행위수칙이 지금만큼은 지켜지지 않을 듯싶었다.

 말과 주먹은 절대 느릿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행위 교. 비교적 잘 지켜왔던 삶의 처세방식 중 하나가 지금은 무용지물처럼 여겨진다. 이럴 때 주위에 아무도 있지 않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주가 다시 사무실로 왔을 때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 온전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인해 어떤 추태를 벌일지도 몰랐을 터였다.

 현주에게 확인하려고 조리 있게 따지기는 더욱 어려웠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구토가 오를 소재일 게 뻔하다. 어떻게 입에 올릴 것인가. 무엇보다 자신을 진정시키고자 추스를 심적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회사 근처의 주점에서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반병쯤 비웠을 때는 오히려 가슴이 가라앉았다.

 오차 없는 확신을 위해 완벽히 퍼즐게임을 풀듯 하나씩 하나씩 추론을 거꾸로 전개해 나가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거의 현주가 만난 사람이 정태였다는 게 더듬어지자 심사를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고모는 회사에 일이 많으냐면서 정태가 주말이나 휴일에 집에서 쉰 적이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었다.

 

 “고모부가 일에 파묻혀 사는 거 고모도 잘 아시잖아요.”

 

 한 번도 오정태 전무를 고모부라고 부른 적이 없지만, 고모와의 대화에서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고모는 정색하고 정태 차의 조수석에 여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걸 여러 번 본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 하나, 현주는 유난히 회사 기밀을 많이 알고 있는 듯 보였었다.

 사내에 공표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부결정사항을 이미 알고 있기도 했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지금 그런 일이 어떤 혐의처럼 도드라지고 있다. 사석에서의 연인관계, 즉 정태의 정부情婦가 아니고서는 쉽사리 생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까 현주의 전화에서 결정적 증거인 정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이처럼 카테고리를 꿰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정후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현주가 확인해주어야 한다.

 

  - 현주로부터 확인이 되지 않는다면, 내 예감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현주가 밝혀준다면

 

 정후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모두 잘못된 판단이기를 빌었다. 정태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 현주의 변명이 설득력 있기를 절실하게 바라고 또 염원했다.

 

 - 내가 예민해 있는 게 틀림없어. 맞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생길 수 없는 일을 내가 앞서가고 꿰맞추는 거야.

 

 소주 한 잔을 입에 쏟아 넣으며 정후는 실낱같은 희망을 끝까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현주일 거라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번에는 좀처럼 신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옆자리의 손님이 정후의 얼굴을 쳐다본다. 시끄러워 죽겠는데 왜 전화를 받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정후는 느릿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디 계세요? 제가 그리 가겠어요.”

 “…….”

 “명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시잖아요.”

 

 현주에게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업무상 전무님한테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 드렸던 거예요. 어쩜 그런 오해를 하실 수가 있죠?”

 

 정후는 현주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예감이 여지없이 빗나갔음을 확인시켜 주리라는 기대를 했다. 허겁지겁 들어온 현주의 얼굴에 아이섀도가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울었나보다고 생각하며 소주잔을 들려는데 현주가 잔을 낚아채 내려놓는다. 현주의 눈에서 길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긴 그녀의 목소리가 습하게 들린다.

 

 “나가요. 다른 데로 가요.”

 

 택시 안에서 정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잔뜩 고개를 젖혔다. 현주는 그런 정후를 곁눈질로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소주를 거의 세 병이나 비운 후였다. 아까 주점에서도 시킨 안주가 그대로 남은 거로 보아 빈속에 들이마셨을 것이다.

 

 - 아아!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한들 변명에 그칠 것이고 합리화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현장검증하는 범인의 모습처럼 경위를 밝히는 게 고작일 뿐이다.

 

- , 진작 얘기했어야 했는데

 

 넋 놓고 밖으로 시선을 던진 현주의 눈에 가득 아쉬움이 고였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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