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15.
“현주한테 지금까지 느꼈던 분위기와는 다른 멋을 발견했어.”
“정말이세요? 그게 어떤 멋이죠? 지금까지 느꼈던 분위기는 또 어떤 거구요?”
현주가 바싹 다가오며 다그쳤다.
“오늘 보니까 수수하고 시골스러운 분위기도 있더군.”
정후는 현주의 평소 화려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게 낯간지러워 그렇게 말했다.
“수수하고 시골스러운 걸 좋아하세요?”
“가식 없고 비밀이 없는 걸 더 좋아하지.”
“가식이 없어 보여요?”
“응! 매우 담백한 성격이란 걸 눈치챘어.”
“비밀도 없어 보여요?”
“아니! 아직도 베일이 드리워 있어. 크렘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현주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하산할 때쯤에는 운해를 뚫고 반짝 햇살이 빛났다. 중봉으로 넘어가 유평까지 길고 지루한 하산 길을 마칠 즈음 정후와 현주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땀을 식혔다. 한여름의 계곡인데도 오래 담그고 있지 못할 정도로 물이 차가웠다.
“웃옷 벗으세요. 제가 물 뿌려 드릴게요.”
“어떻게 옷을 벗어. 창피하게.”
정후는 현주가 없으면 팬티 바람에 풍덩 빠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온몸이 비와 땀으로 축축했다.
“어때서 그래요. 우리가 남남인가요, 뭐.”
“남녀니까 괜찮을까? 하하하!”
“호호호!”
현주는 정후의 웃옷을 잡아당기며 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결례를 용서하시게. 사실 물속에 뛰어들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거든.”
정후는 티셔츠를 벗고 머리부터 푹 담갔다. 현주가 두 손으로 물을 담아 정후의 등에 뿌렸다. 현주는 배낭에서 물비누를 꺼내 정후의 등에 뿌리고 몇 번이고 문질렀다. 현주는 물속 바위에 양팔을 뻗고 엎드린 정후의 가슴까지 서슴없이 손길을 뻗쳤다. 정후는 간지럽기도 하고, 부드러운 손놀림에 야릇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만 있었다.
“시원하시죠?”
정후는 얼른 새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도 현주의 손길이 한참 동안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자극을 받고 말았다.
“김현주! 오늘 멋진 모습 보여줬어.”
늦은 저녁, 서울에 도착한 두 사람은 회사 인근의 횟집에 마주 앉았다. 정후는 현주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진심으로 덕담을 건넸다.
“차장님 모습도 새로웠어요, 좋았어요.”
현주는 정후에게 잔을 채우면서 엄지를 곧추세웠다. 정후도 예정에 없던 동행이었지만 그 길고도 험한 길을 함께 등반한 현주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현주는 상추와 깻잎에 광어와 마늘을 포개 넣고 정성스레 쌈을 싸더니 정후에게 건넸다.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현주가 아! 하며 입을 벌리라는 시늉을 했다.
“또 고집?”
현주가 입을 오므린 채 뻗은 팔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정후는 할 수 없이 입을 벌려 현주의 쌈을 받아먹었다. 현주의 손가락이 입술에 스쳤다. 흥겨운 기분과 시장기, 눅진한 피로 탓인지 잔을 비울수록 환각 같은 느낌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수면 부족까지 겹쳐 이미 오를 만큼 술기운이 오르고 있었다. 세 병째 소주마저 거의 바닥나고 있을 때 현주는 “옆으로 가서 앉아도 돼요?”하고 말하더니 대답도 듣기 전에 방석을 들고 정후의 옆자리로 왔다. 현주의 볼에도 가득 홍조가 생긴 후였다.
정후는 이미 상당한 취기가 올라 혀마저 꼬이고 있는 상태였다. 정후의 얼굴에 현주의 손길이 닿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입술이 포개졌다. 이내 현주의 혀가 뜨거운 열과 함께 정후의 입안에 머물렀다. 아주 길게 키스가 이어졌다. 뜨겁고, 달콤하고, 황홀했다.
정후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차량의 전조등과 오색광고판이 어지럽게 점멸했던 것 같다. 무척이나 가파른 내리막길이 바로 코앞에 놓여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질끈 눈을 감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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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갈증을 느껴 손을 뻗었는데 늘 있던 자리에 물병이 놓여있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눈을 떴는데 낯설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방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알몸임을 안 순간 정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옆자리에 현주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 이,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횟집에서 세 병의 소주를 마시고 현주와 키스를 한 것 같은데, 그다음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정후는 엉금엉금 더듬어 팬티를 찾아 입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다리에 근육이 뭉쳤는지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다. 욕조에 걸터앉아 어젯밤을 하나씩, 둘씩 더듬어보았으나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옆자리로 온 현주와 키스를 한 것까지가 필름에 남아 있는 전부였다.
- 제기랄!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정후는 샤워기의 냉수를 틀었다. 온갖 잡념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운신하기 어려울 만큼 난감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당장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정리되지 않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욕실 문을 열었다. 방안에 불이 켜져 있다. 현주는 얇은 홑이불을 끌어안고 벽에 기댄 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와중에도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거였다.
- 뻔뻔스러운 놈, 추잡스러운…
정후는 스스로 욕을 퍼부으며 바지를 찾아 입었다.
“현주야!”
숨소리처럼 그녀를 부르긴 했으나 정후는 다른 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보았다. 아직 어두웠다. 현주가 망연히 서 있는 정후의 손을 잡아 옆으로 끌어당겼다.
“괜찮니?”
정후는 자신의 물음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어가 괜찮냐고 묻는 건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우문이 아닐 수 없다.
“하나도 기억 안 나시죠?”
“…응.”
현주는 손가락으로 오므린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키스하시던지 입술이 다 부르트고 말았어요. 후후!”
그것도 기억에 없다. 정후는 답답했다. 현주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정후를 잡아끌었다. 정후의 팔을 자신의 목 뒤로 받치게끔 끌어당겼다. 이불이 흘러내렸다. 정후는 처음 보는 현주의 드러난 속살을 외면했다. 뽀얀 우윳빛 피부와 봉긋한 가슴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너한테…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
아아, 이 얼마나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표현인가. 이런 말을 하는 일이 생기다니. 체념의 넋두리를 늘어놓으려는 정후의 입에 재갈을 물리듯 현주가 얼굴을 덮어왔다. 샴푸 냄새 짙은 생머리가 정후의 어깨에서 찰랑거렸다. 현주의 혀가 정후의 입안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현주의 손이 정후의 가슴에서 배로 움직이더니 바지춤으로 내려갔다. 어지럽게 흩어지던 검정 상념들의 자리에 붉은 욕구가 밀려들었다.
“현… 현주야!”
“기억을 되찾게 해드릴게요.”
현주는 정후를 밀어 눕히고 바지를 벗겼다. 정후는 참기 힘든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뿐이었다. 몸은 현주의 손 움직임에 그대로 맡겨졌다. 머리는 이성을 찾으려 차게 움직였으나 온몸은 벌써 뜨겁게 달궈지고 말았다. 현주가 팬티를 벗기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대로 계세요.”
현주는 정후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다시 입안 깊숙이 혀를 들이밀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정후의 남근을 부드럽게 쥐었다가 자신의 질 속으로 끌어당겼다.
“흐윽!”
현주는 외마디 신음을 뱉어내는 정후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현주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고개를 들어 정후의 목과 가슴을 애무했다. 정후의 몸 위로 현주가 올라갔다. 목부터 허리까지 유려하고도 미끈한 나신이 춤추듯 유영했다. 현주는 상체를 뒤로 젖혀 더욱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정후의 가슴과 등에 흥건하게 땀이 솟는다. 현주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고 정후는 현주의 탄성을 심장 깊이 흡입했다. 긴 시간을 하나처럼 밀착해 있던 두 사람이 절정을 느끼고 몸을 떼었을 때는 둘 다 흥건히 젖어있었다. 현주는 정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까칠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고… 싶었어요, 오래전부터.”
“나랑?”
“네….”
“나랑 섹스하고 싶었다고?”
“사랑하고 싶었어요.”
현주는 정후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 네가 나한테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단 말이야?
정후는 혼란스러웠다. 올려다본 천정이 빙글 휘도는가 싶더니 다시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차장님!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휴가 다녀와서 뵐게요, 차장님!”
“잘 다녀와요.”
휴가를 맞은 직원들이 더욱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빗줄기가 굵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천둥까지 치면서 어두워진다. 뉴스에서 이미 예보한 것처럼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정후는 스마트폰을 열었다. 횡으로 굽이치는 구름 결을 배경으로 고사목 옆에 측면으로 기대선 현주의 모습이 그럴듯하다. 사진 속의 현주가 깊은 산속, 나무에 앉아 비를 피하는 파랑새처럼 보인다. 피하려 해도, 나뭇가지를 지붕 삼아 비를 피하려 해도 파랑새는 날개를 펼칠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고 말았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에서도 현주의 모습이 보인다.
- 내가… 나답지 않게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유럽에 가서도 한동안 자책하고 말겠지.
흐느적거리는 장맛비가 가슴속으로 처연하게 스며든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꼈던 태화물산에서의 일들이 한순간의 실수로 망쳐버린 느낌이다. 현주와 육체관계를 가졌다는 건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시킬 수 없었다. 참담한 마음으로 넋 놓고 검은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린다. 누군가 문을 열고 빠끔히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현주였다. 머리가 흠뻑 젖었다.
“어! 김 대리….”
“호호호! 제 생각하고 계신 거, 맞죠?”
“웬일로… 다시 온 거야?”
“금방 나오실 줄 알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비가 쏟아지잖아요.”
“날 기다린다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수심이 가득 고였어요. 제 생각하시면서 밝은 표정을 지어야지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계심 어떡해요.”
“누가 김 대리 생각을 했다고 그래. 넘겨짚지 마.”
“얼굴에 쓰여 있는 걸요, 뭐.”
“마음이 편치 않았어, 이번 주 내내.”
정후는 불편한 심경을 토해내며 등을 돌렸다.
“나가요, 제가 저녁 사드릴게요.”
“별로 생각 없어.”
“좋아하시는 코다리찜에 소주는 어때요?”
정후는 현주한테 고개를 돌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현주의 접근을 얼렁뚱땅 피하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니까 약간 구미가 당기는군.”
두 사람이 회사 뒷골목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휴가철에 아직 이른 저녁때라 그런지 빈자리가 많았다. 현주는 정후와 마주 안게 되자 기분이 아늑해졌다.
- 이제는 이런 기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거야.
현주는 정후에게 살얼음 걷듯 다가섰던 자신의 행보가 이젠 그다지 위태롭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우연히, 참으로 우연하게 갈망하던 일이 벌어졌다. 정후와의 인연은 그렇게 우연이 필연처럼 만들어지고 말았다. 그날, 그의 뜨거운 입김.
- 아아! 지금도 생생한 흥분으로 느껴진다. 그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함께 있고 싶어.
현주는 정후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정태 전무와의 과거를 밝히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마저 움트고 있었다.
- 그가 다시 나를 힘껏 안아만 준다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자극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혼자만의 힘으로는 억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억제하고 싶지 않았다.
- 그가 날 사랑하고 말게끔 더욱 힘주어 안을 거야. 그에게 지독하게 강렬한 애무를 해줄 거야.
현주는 정후에게 술을 따르며 산행을 언급했다. 그때의 감격을 되뇌는 표정이다.
“지난주 지리산은 너무너무 멋졌어요. 지금도 계곡 물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요.”
“…….”
“지금만큼이나 많은 비가 쏟아졌었어요, 그죠?”
“다리 아프지 않았어?”
“이틀간 종아리에 알이 배였다가 풀어졌어요.”
현주는 고개를 숙여 다리를 주무르며 웃었다. 스타킹을 신지 않은 뽀얀 각선미가 정후의 눈에 들어왔다. 현주의 다리 곡선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늘씬하게 뻗은 그녀의 다리는 지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돌려 흘깃거릴 정도였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현주의 볼이 붉어졌다.
“어땠어요, 그날?”
“…….”
“지리산에서 내려온… 그날 말예요.”
정후는 제 잔에 소주를 채워 단숨에 마셨다. 대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주는 슬그머니 정후의 손을 끌어당겨 두 손으로 감아쥐었다. 정후가 얼른 손을 뺐다.
“흐흐! 이제 손쯤은 쉽게 잡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현주는 정후 곁으로 가까이 다가앉으면서 “오늘도 같이 있고 싶어요.”라고 속삭였다.
“아니! 그때 한 번으로 족해.”
정후는 단호한 어투로 잘라 말했다. 현주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몸을 일으켜 정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김현주!”
정후가 정색하고 큰소리로 끊어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란 현주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네가 이러면 난 너를 싸구려로 볼 수밖에 없어.”
정후는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 싸구려… 싸구려라고!
현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정후의 표현을 곱씹으려는데 그의 말이 다시 폭포처럼 쏟아졌다.
“내가 실수한 거 인정해. 그렇다고 해서…, 하룻밤 같이 잤다고 날 가볍게 여기는 건 용납 못 해.”
현주는 오싹한 서슬을 느꼈다. 그러다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실수하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는 차장님을 가볍게 여긴 적 없어요.”
“지난 한주, 내내 후회하고 자책도 많이 했어.”
“전… 사랑한 거였어요, 지금도….”
“천만에! 사랑이란 표현 함부로 쓰지 마. 난 애인이 있는 사람의 또 다른 섹스파트너가 되고 싶지 않아.”
정후의 표현에 현주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 섹스파트너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현주는 입술을 심하게 떨더니 “가겠어요.”라며 벌떡 일어섰다. 정후는 그대로 앉아 현주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 아아! 그렇게 쉽게 동침을 하다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 후우우.
정후의 자책이 한숨으로 뿜어졌다. 혼자 남은 소주를 비우는데 현주가 다시 들어왔다.
“깜박 잊고 술값 계산을 안 하고 갔어요.”
정후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자 현주도 따라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가버리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혼자 끌어안을 게 자명했다. 현주는 그렇게 속병을 앓고 싶지 않았다.
“사과하세요. 아까 하신 말씀, 취소하시구요.”
“그래, 내가 말이 심했다. 미안해.”
“진심이죠?”
“진심이야.”
정후의 굳은 얼굴이 풀어지자 현주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현주는 잠깐 사이에 자신의 기분을 극과 극으로 흔들어버리는 그에게 꼼짝없이 포로가 되었다는 생각이 거듭 스쳤다.
“단 한 번도 가볍게 생각한 적 없어요. 지난번 그 일 이후로 더 어렵게만 느껴졌어요.”
“…….”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그날 이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정후는 무어라 말을 받아내기가 거북스러웠다. 현주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기만 하다. 지난 주말 현주와 동행한 지리산 종주의 포만감, 그리고 무아지경 같았던 현주와의 관계, 그 이후, 정후는 현주에게서 묘한 향수를 느끼기는 했었다.
그녀의 탄력 있는 속살이 아른거리면서 불현듯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조심성이 생겨 그녀를 마주 보기가 껄끄러웠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한껏 관능적인 자태로 “사랑을 하고 싶었어요.”라면서 속삭인 현주의 말이 아직도 끈끈하게 귓전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든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하다. 약하게 흩뿌리던 빗방울이 다시 굵어졌다.
-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런 심한 모욕을 주다니.
정후는 싸구려니, 섹스파트너니 사납게 쏘아댄 자신이 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황이 어떻든 한 몸이 되어 살을 섞은 현주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주었다는 것이 진심으로 미안스러웠다. 그러나 정후는 현주와의 관계가 여기서 더 진행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가슴이 아닌 머리를 따르는 게 맞는 일이다.
“김현주, 난 곧 유럽으로 떠나. 너와 있었던 흔적은 구름 꼬리처럼 지워질 거야.”
여름 하늘 구름의 잔해, 흘러가면서 떨어져 나간 회색 구름 꼬리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정후는 현주와의 관계를 그렇게 빗댔다. 그러나 현주는 그의 느릿한 말,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주는 정후의 눈과 입술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구름 꼬리라뇨, 당신은 몸통 구름이에요. 전 그 몸통 구름을 기다릴 거예요. 난, 나는 이미 당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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