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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옥에서의 조우
올 거야, 틀림없이. 그랜저 승용차 안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뒷좌석에 내던진 가죽점퍼의 사내가 길게 기지개를 켠다.
“오셔서 해명할 용기가 있나요? 여기 오셔서 진실을 밝히고 사태를 해결하실 수 있겠습니까?”
“…….”
오지 않을 수가 없어. 길게 콧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당혹스러움을 전화상으로도 감지할 수 있었다. 가죽점퍼는 그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오는 쪽으로 결정할 거라고 확신했다.
“고개를 뻣뻣이 쳐들면 천정이 낮아 보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칠 일도 생기지 않을까요?”
“뭐, 뭐라고? 그게 무슨….”
“폭넓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리지요. 증언하지 않는다면 나를 끝까지 적으로 삼겠다는 거로 단정하겠습니다. 증인 자격으로의 출석을 마다하든, 평생 동반자인 그들의 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든 그건 자유의사에 맡기겠습니다.”
사내는 마치 재판정에 출석을 요청하는 판사처럼 부러 그런 용어들을 골라 썼다. 고대 중국 역사를 읽다 보면 합종연횡合從連橫이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적을 치기 위해 또 다른 적과 동맹을 맺는다. 그들이 당신과의 동맹을 깨고 모든 잘못을 당신에게 떠넘긴다면 사태는 더 큰 파국으로 치닫는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는 자들임을 당신은 더 잘 알 것이다.
“선택이 잘못되어 당신이 무언가를 잃는다면 그게 얼마나 클지 잘 알 겁니다.”
공은 이제 그에게 넘어갔다. 그 공이 어디로 튈지는 그가 하기에 달렸다. 경찰을 동원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자신이 살기 위한 선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공범들을 만날 것인지, 모른 척 버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렸다. 만일 그가 온다면? 와서 변명이나 거짓으로 호도할 생각만 갖는다면 절대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오지 않는다면? 그렇더라도 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이 사실을 세상에 떠벌려 공권력으로 수습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 그렇게 그에게 뜨거운 감자를 쥐여주고 전화를 끊었었다. 가죽점퍼가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 정한 시간에 거의 맞춰 중년의 신사가 택시에서 내린다. 금테안경을 만지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가죽점퍼는 시동을 걸고 기어를 드라이브로 변속했다. 신사는 멀리서 보아도 감색 정장에 밤색 코트를 걸친 모습이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오르막길로 천천히 다가온 그랜저가 중년 신사 앞에서 멈추더니 창이 내려진다.
“전화를 건 사람입니다.”
신사가 금테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운전석의 사내를 뚫어지게 쏘아봤다.
“하하하! 오실 줄 알았습니다. 타시죠.”
챙이 긴 모자를 눌러쓴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으나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금테안경은 그의 웃음소리가 크게 거슬렸다. 비웃음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엄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으며 점잖게 물었다.
“당신 도대체 누군가?”
그러나 가죽점퍼는 “결례가 되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신사의 안경을 벗겼다. “거기까지만 눈을 가리겠습니다.”라고 덧붙이고는 검정 안대를 채웠다. 거침없는 동작이다. 신사의 낯빛에 핏기가 가셨다. 상대의 거친 행동에 심한 모욕감이 들었으나 중년의 신사는 입에 잔뜩 고인 침을 삼킬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 흐흐흐, 오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그는 일러준 장소로 택시를 타고 왔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약 20분을 지켜보다가 혼자 온 게 분명하다는 판단을 하고서야 가죽점퍼는 그의 앞으로 차를 댄 것이다.
“어디로 가는 건가?”
한동안 말이 없던 신사가 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내가 누군지는 알고 전화했을 텐데.”
“통화가 되지 않았으면 당신이 일하는 곳까지 찾아가려고 했지요.”
가죽점퍼가 냉랭하게 대답하자 신사는 한번 어깨를 들썩거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일하는 곳, 거길 찾아가려 했다. 이 말이 얼마나 위협적이고도 무지막지한 표현인가. 가죽점퍼의 입언저리에 엷은 주름이 잡혔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심판은 약자에게도, 혹은 힘 있는 자에게도 편파적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오직 정당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따를 뿐이다. 큰길에 접어든 승용차는 빠른 속도로 성남대로를 달리더니 잠실대교를 건너 강변 북도로 빠져나갔다. 다시 올림픽대교로 접어들더니 다리 중간쯤에 차를 세웠다.
“당신 소지품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한 가죽점퍼는 신사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구두를 벗겼다. 신사는 조금의 거부감도 표출하지 못하고 그가 하는 행동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차에서 내린 가죽점퍼는 곧바로 다시 차에 올라 올림픽대로로 접어들었다. 경기도 성남의 남한산성 초입에서 그를 태우고 한 시간 반 남짓 이리저리 돌다가 경기도 광주의 Y리로 왔다. 실제 거리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지만, 일부러 여러 갈래 길을 돌다가 온 것이다. 혹시나 미행이 있을 것을 우려하기도 했고 조수석에 앉은 동행자가 목적지의 위치를 알지 못하도록 취한 조치라 할 수 있었다.
- 이제 네놈도 곧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가죽점퍼 사내가 안대를 만지작거리는 신사의 손을 거칠게 내리쳤다. 신사의 숨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그에게서 눈길을 거둔 가죽점퍼가 냉소를 흘리고는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 이제부터다.
이제부터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리라. 검은 먹구름 틈으로 붉은 기운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힘찬 에너지를 뿜어낸다. 세 악령이 모두 아마겟돈에 모이게 된다. 이제 너희 세 놈은 곧 세상의 종말을 보게 될 것이다. 피에 굶주린 지옥의 전능자. 나, 하데스는 이미 전능자의 권한을 부여받았노라.
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린 신사가 손에 쥐었던 금테안경을 썼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창고 내부를 두리번거린다. 모자를 눌러쓴 하데스가 오른편 구석의 철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턱짓을 했다. 금테안경이 뒤를 돌아보며 멈칫거리다가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악취에 코를 틀어막았다. 깜깜한 어둠 속이지만 누군가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스위치가 올려졌다.
“허억.”
코앞의 지근거리조차 보이지 않던 암흑 속 실내가 어렴풋이 형체를 드러내자 금테안경은 피가 거꾸로 솟는 충격을 받고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모습이 드러난 두 사람, 사내 둘 다 손목과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 한 사람은 머리에 붕대를 감았고, 다른 한 사람은 몸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는데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까무러쳤는지 가늘게 흰자위를 드러낸 채 모로 엎어져 있었다.
왼쪽 다리는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는데 붕대 위로도 벌건 핏물이 배여 있었다. 금테안경은 너무 놀란 나머지 무릎이 휘어지고 말았다. 피투성이 사내의 왼쪽 다리가 유독 짧은 걸 알고 그는 기겁했다.
“겁먹은 모습이 보기 흉하군요.”
하데스의 비아냥거림도 이젠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사태는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빴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금테안경은 오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천천히 피투성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굽혀 사내의 몸을 살폈다.
“아직 거뜬합니다. 그가 지은 죄에 대해 겨우 한차례 형 집행을 받았을 뿐인 걸요.”
“형?… 형 집행이라니?”
“전화상으로 말씀드렸듯 이들과의 결탁 여부를 밝히기 위해 모신 겁니다. 또 그중 일부 죄는 이 자들이 당신에게 떠넘기기에 대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요.”
금테안경의 낯빛이 더욱 창백하게 탈색된다. 금테안경과 눈이 마주친 덩치는 머리에 감은 붕대를 긁적거리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얌전하게 손과 발을 내미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이러지… 마시오. 좋게 해결합시다.”
그의 말투가 존칭으로 바뀌었다. 하데스는 거칠게 금테안경의 팔을 잡아당겼다.
-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 이보다 더 좋은 해결방법이 있을까.
하데스는 금테안경을 잡아끌어 족쇄를 채우고 양손을 툭툭 털며 메마른 소리를 내뱉었다.
“죄수의 신분이 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거요. 이미 그 죄가 드러나고도 남음이 있지만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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