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자정이 훨씬 지났으니까 어제다.
열흘 전에 죽은(굳이 눈을 감았다든가, 저 세상으로 갔다든가, 소천했다는 표현을 골라 쓰고 싶지 않다.) 친구가 어제 단톡방에서 나갔다.
그냥 내 친구 광선이가 그날, 열흘 전에 죽었다.
문상을 갔다. 가깝다 싶은 친구의 영안실에 들어서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막 울 것 같았다.
워낙 눈물이 많은 나인지라 우는 게 익숙하다. 근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누군가의 결혼식장에 온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함께 문상온 친구들과 떠들다가 영안실을 나왔다.
- 죽은 건 살아있는 거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그렇게 담담했다.
"박광선 님이 나갔습니다."
근데 어제, 죽은 광선이가 단체 카톡방에서 나갔다. 무슨 글을 올리거나 답글을 다는 친구도 아니었지만 광선이는 그 방에 있었다. 나랑 같이.
동창회 방과 취미를 같이 하는 카톡방 두 군데에서 열흘간 불 하나를 남겨놓더니 어제 그런 멘트를 남겼다. 열흘 전에 죽은 녀석이.
그 밑에 달린 글귀가 무척 거슬리고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채팅방으로 초대하기'
아내? 아님 아들?
남편 혹은 아버지의 모바일에서 내 남편, 내 아버지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는 그 마음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온종일 나를 옥죄더니 지금 이런 글을 쓰게 한다.
그리고 기칠이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죽은 광선이랑 가깝고 같은 모임 친구이며 유난히 정이 많은 그놈이, 그날 영안실에서 부러 웃음을 지으며 다른 친구들 기분을 배려하는 그 모습이 지금 서럽게 리와인드된다.
"죽으면 끝이야. 그걸로."
그렇게 생각했다. 죽은 친구의 그런 것들이 다시는 되새겨지지 않을 추상일 줄 알았다.
근데 아내? 아님 아들? 남편 혹은 아버지의 카톡에서 내 남편, 내 아버지의 마지막 흔적이 지워지는 그 장소에서... 내 친구의 단 하나 남은 흔적이 지워지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끝이 이렇게 슬플 수도 있는 거구나."
'완전한 끝'
그런 어휘가 떠오르자 흐르는 눈물이 멈춰지지 않는다.
살면서 '명복'이란 말을 자주 인용했지만 지금도 그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죽은 내 친구의 명복을 빌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참담한 기분을 스스로 달래고 싶은 이기심이다. 구태여 원초적인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걸 누구에게든 이해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열흘쯤 지났는데... 광선아! 거긴 살만하냐? 거기선 암 같은 거 달지 않고 제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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