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자들의 수난과 반란
엄청나게 비대한 괴물이 잉태되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 중 하나가 남산이다.
해발 262m의 남산은 앞산을 뜻하는 것으로 조선 때 경복궁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곳이 남산이었다.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왕의 등 뒤에 있는 북악산은 정승으로 대우한 반면 남산은 매일 왕이 남쪽을 향해 대면하므로 왕과 동등시하여 일반인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 남산에서 남산타워나 순환도로보다 무시무시한 고문 장소를 먼저 떠올린 시절이 있다. 그리 아스라할 만큼 먼 시절도 아닌 듯하다. 남산 기슭에 있는 그저 그런 건물이지만 바로 이곳, 중앙정보부에 얽힌 역사와 사연은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다.
“거긴 지옥이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곳이야.”
거길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숱하게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빨갱이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갔다.
‘그때 그 사람들’, ‘1987’, ‘남산의 부장들’은 중앙정보부를 소재로 하여 역사의 단면을 영화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악역이긴 했어도 영화의 주연급으로 다룰 만큼 우리나라 중앙정보부장들은 중차대하고도 막강한 지위를 지녔었다.
군 장성의 경력을 지닌 중앙정보부의 수장들을 중심으로 거기서 벌어진 역사의 편린들을 조합하며 그때 그 부장들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박정희한테 김종필은 유방의 장자방이나 다름없다.”
항우를 꺾고 진나라에 이어 다시 중국을 통합한 한나라 고조 유방에게 장량이 있었다면 박정희에겐 김종필이라는 브레인이 있었다. 당시 그런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었다.
5·16 군사정변은 김종필이 계획의 전체 틀을 짜고 박정희를 내세웠다는 게 현대사의 정설이다. 이후 민주공화당 창당 역시 전적으로 김종필의 기획대로 진행되었다.
“정보수사기관을 만들려고 자네들을 불렀네.”
김종필은 같은 육사 8기 동기생들 중에서 법률에 일가견이 있는 세 명을 차출했다.
“정보와 수사를 동시에 겸한다는 거지?”
“맞아. 미국 CIA를 모델로 삼되 일본의 내각 조사실을 절충하는 법안을 만들게.”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창당 과정부터 일본의 정치 사례를 최대한 참고했다. 처음 중앙정보부는 김종필 중령의 특무부대 요원들을 중심으로 5·16 군사정변 이전 장면 정부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와 시국 정화운동본부의 조직, 거기에 기존 정보업무를 전면 흡수하면서 출발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살을 붙이면서 미국 CIA와 FBI 기능을 모두 겸비한 정보·수사기관, 정보와 반공에 수사를 망라한 비대한 몸집의 태아로 잉태된 것이다.
전체적인 개요는 그러했지만 중앙정보부는 군사정부의 혁명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장애요인을 뿌리 뽑는데 최우선의 목적을 두었다.
이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더불어 나라를 만드는 길이다
- 결과가 나쁘면 다 나쁜 게 이 세상 이치야.
지금의 혁명 정부는 자칫 반란세력으로 몰려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질 수도 있다는 게 김종필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녀야만 했다.
그리하여 중앙정보부는 국가 안전보장에 관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관련 범죄를 수사하며, 군을 포함해 국가기관의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하는 특수기관으로 태동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법적인 기관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날로부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로 공포된 중앙정보부법 7조 1항을 보기로 하자.
‘정보부 직원은 그 업무 수행에 있어 전 국가기관으로부터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어떤 성품을 지닌 사람인가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정보부 직원이 누구냐에 따라 무소불위의 권력행사가 가능한 조문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의 특권은 중앙정보부의 수사권이 검찰의 지휘 아래 있지 않고 되레 검찰을 지휘·관리하는 권한까지 주어졌다는 점이다.
가히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정보부는 현역군인의 직접적인 참여를 보장하고 있어 비상계엄하에서도 군부가 모든 분야에 실질적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군과 경찰을 중심으로 복수의 정보기관들이 각 기관별로 그 업무를 분산 수행해 왔었는데 중앙정보부의 출현으로 각 기관들을 총괄적으로 조정·감독하는 권한을 확보하면서 국가 중앙 정보기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기존의 현역 군인들 외에 수시로 부사관과 소령급 이상의 장교들을 파견받았으며 대령과 준장급 인력을 특별보좌관이나 차장보로 배치하는 등 나날이 문어발식 확장을 이어갔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앉은 김종필은 자신이 소속했던 특무부대를 통해 조직의 틀을 갖추고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핵심 조직을 편성하여 남산 1호 터널 입구의 본부 건물로 입주하게 된다.
김종필은 혁명 세력의 권력 연장을 위한 정치 기반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공화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직선제 개헌을 통해 박정희 의장을 대통령에 출마토록 하고 당선까지 이끌려면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 엄청난 자금도 필요하다. 본격 정치 체제를 갖추고 정당을 출발시키려면 밑도 끝도 없이 할 일이 많다.
약칭하여 중정中情은 철저한 보안유지를 위해 현관에 ‘동양화학 주식회사’라는 간판을 달고 비밀리에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중정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직속기관으로 발족하면서 박정희 의장의 친위 정보기관으로 출발했지만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내세워 점차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처음 출발 시에는 장관급 부서였으나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에는 부총리급으로 업그레이드된다.
권력의 주변엔 살벌한 견제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각하! 계속 정권을 이어가시려고 당을 만드시는 겁니까? 아니면 중정 단독으로 취하는 행동입니까?”
육사 8기의 독주에 불만이 가득했던 김재춘 방첩대장을 중심으로 한 육사 5기 출신들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아와 항의를 했다.
“나는 창당 지시를 내린 적도 없고 아는 바도 없어. 김 장군이 경위를 철저히 조사해서 보고해.”
5기생들의 항의에 박정희가 발뺌했다. 당초 혁명공약으로 내세웠던 민정 이양 약속을 어기는 것에 대한 항의라기보다는 혁명을 전후해 계속되는 8기 독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이었다.
공화당 창당은 권력 연장의 기반이었지만 그 반발은 거셌다. 여기저기서 소외되었던 입들이 터지면서 박정희와 창당 준비세력들이 궁지에 몰리는 듯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당초의 민정 이양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박정희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여 정권 이양 후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재천명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5기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려면 김종필을 희생시켜야 했다.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나가 있어. 머잖아 다시 부를게.”
김종필은 정보 부장직을 사임하고 외유 선언을 한 직후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자의 반 타의 반’. 순전히 내 의지로 떠나는 게 아니라는 뜻, 결코 지금의 사태를 회피하려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의미.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는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말이 한동안 유행어처럼 회자되었었다.
그러나 김종필이 떠난 다음날, 공화당이 창당되면서 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는 큰 차질 없이 진행된다.
“어차피 우리 목적은 김종필을 제거하는 거였잖아.”
“맞아, 공화당을 창당해서 집권하는 게 우리한테 나쁘지 않아. 지금 군으로 복귀해봐야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어.”
“중앙정보부장은 우리 5기가 맡아야만 해. 우리가 의장 각하의 오른팔이 되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어.”
김종필과 육사 8기에 대한 강력한 견제가 먹혀들어 김재춘과 5기가 기선을 제압한 상황이 되는 것처럼 일단락되었다.
- 스라소니 새끼들, 너희들이 이빨을 드러내도록 호락호락 놔두지는 않겠어.
하극상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쥐면 자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권력을 빼앗길 수 있다는 걸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로 중앙정보부장은 김재춘이나 8기 출신이 아닌 3기의 김용순을 임명했다.
“말도 안 되는 인사조치입니다.”
김종필이 사라지면서 당연히 자신들이 권력 중심에 설 것으로 여겼던 5기생들이 크게 반발하자 박정희는 한 달 반 만에 김재춘을 정보부장 자리에 앉힌다.
김재춘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마자 초대 중정에서 저지른 ‘4대 의혹 사건’을 발표한다. 공화당 창당 과정의 부정한 돈거래를 밝히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김종필 계를 깡그리 쳐내 그들의 회생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 흐흐, 적자생존의 세계가 따로 있던가. 여기야 말로 약육강식의 세계 아니었던가.
이로 인해 김종필 계의 서른한 명이 잘리고 말았다. 자칭 혁명동지들이었지만 실상은 육사 기수별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처럼 변질되고 있었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도 했다. 이후 김재춘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등의 11기와 갈등을 빚고 8기의 견제와 협공에 밀리면서 스스로 옷을 벗는다. 다분히 눈엣 가시 같은 5기에 대한 박정희의 의중에 따른 결과였다.
김재춘이 박정희와 결별하면서 혁명 동지 관계도 무색해지고 만다. 끝이 나쁘니 다 나쁘게 되고 말았다. 그가 앉던 자리는 다시 8기의 김형욱이 차지하였다.
악의 축, 남산 돈가스의 몰락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하여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이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의 중정은 대규모 간첩단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대표적인 간첩 조작 사건에 해당하는 1차 인혁당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엄청난 고문을 가한 사실이 드러났다.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먼지를 만들어서 피고들한테 뿌려. 중정에서 넘긴 사건이야.”
담당 검사들이 기소할 증거와 혐의를 찾지 못해 사표를 내는 일까지 생겼으니 중정의 조작이 얼마나 무모하고 허황됐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김형욱의 막무가내적 기질이 드러나 그는 남산 돈가스 혹은 남산 멧돼지라는 닉네임을 얻게 된다.
“대통령은 각하 말고 자격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엔 없어.”
김형욱은 박 대통령의 집권 연장에도 적극 관여하여 충복임을 드러냈고 그런 충성심에 자부심을 지녔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이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연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박 정권은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했다.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김종필을 위시해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굳이 지난 역사를 펼치지 않더라도 권력을 쥔 자가 놓으려 하지 않으면 이를 막아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을 해임하는 조건으로 3선 개헌을 수용하는 쪽으로 결정합니다.”
비공개로 진행된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의 발의로 당의 공식입장이 결정되었다.
“이만섭을 죽여버려.”
도청으로 소식을 접한 김형욱은 두 명의 중정 간부에게 이만섭 암살을 지시했다.
“대통령 각하! 김 부장이 또 오버하려고 합니다. 각하께서 막아주셔야겠습니다.”
김성곤 의원으로부터 상황을 접한 박정희가 김형욱을 제지시키면서 암살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박정희는 이만섭이 제안한 3선 개헌 조건부 찬성에 대해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내며 거부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다는 공화당 지도부의 설득과 개헌의 필수요건 때문에 이를 수용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우리 여당에서까지 탄원이 올라오는 거야? 얼마나 해 먹었기에 부정부패의 원흉이라는 소리를 듣느냐 말이야.”
박정희는 김형욱과 이후락에게 핀잔을 주고 등을 돌려버렸다. 해임을 통보한 것이었다.
“내가 왜 경질되어야 하는 거야. 지난 6년간 개처럼 일한 나야. 이 실장도 잘 알잖아.”
“......”
“대통령 각하를 위해 온갖 악역을 도맡아 해온 나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야.”
길길이 날뛰며 김형욱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이후락은 비교적 담담한 편이었다. 1969년 10월 20일, 김형욱 중정 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이 전격 경질되면서 국회에서는 공화당의 날치기로 3선 개헌이 통과되었다.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1차 관문이 열린 셈이다.
결국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총 투표수 대비 77.1%의 찬성으로 개헌이 확정된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여섯 번째의 개헌이었는데 여섯 번 모두 정권을 장악하거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개헌이었다. 이때의 3선 개헌으로 박정희의 장기집권 발판이 마련됐고 유신체제로까지 연장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맞은 김형욱은 공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냈다. 반면 이후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대사로 발령받았다.
이후 김형욱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에서도 제외되자 박정희에게 깊은 원망을 품고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한다. 혁명동지이자 국가재건 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역임하며 험로를 함께 했으나 그 역시 토사구팽의 말로를 면치 못했다.
1977년 6월 2일에는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해 박정희 정권의 각종 내부 비리를 폭로하였으며, 미 하원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박정희의 거듭된 회유와 귀국 권유도 거들떠 듣지 않고 김형욱은 김경재(필명 박사월)를 통해 회고록을 출판했다. 두 사람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아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김형욱 회고록은 1979년 10월,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밀리언셀러가 된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프랑스 파리로 가 중앙정보부 해외 파견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이후 행적이 사라졌다. 파리 교외에서의 피살, 납치 귀국설 등 여러 루머가 퍼지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미궁으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그는 재임 중 중앙정보부를 한층 더 혹독한 장소로 각인시킨 장본인 중 한 사람이었다.
제갈 조조의 화려한 귀환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인 이후락은 1946년 초,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여 1949년 남조선 노동당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으로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196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의 정보기관인 국무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5·16 군사정변 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이후락이다.
1970년 12월, 정보통인 이후락은 5대 김계원의 뒤를 이어 6대 중정 부장으로 취임한다. 이후락이 기용된 가장 큰 배경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앞세운 신민당의 기세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남산골샌님이란 닉네임의 김계원 대신 정치 공작과 막후 술수에 능한 이후락이야말로 대선을 앞두고 안성맞춤이란 판단이 섰던 것이다.
“제갈량의 지략과 조조의 리더십을 마음껏 발휘해 봐.”
“옛, 각하! 반드시 승리를 이끌어 내겠습니다.”
이후락은 공작정치의 달인답게 관권을 총동원하여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막후 관리하며 비록 간발의 차이긴 했지만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봐.”
이후락은 1972년 5월, 밀사로 평양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그렇게 해서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낸 게 그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청산가리를 휴대했었지요. 여차하면 자살할 생각이었습니다.”
이후락은 북측에서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기밀을 강요할 경우에 대비해 청산가리를 지니고 북한에 들어갔다고 한다. 갑자기 밤에 북측 수행원이 이후락 일행을 불러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긴장감으로 입이 바싹 마른 상태에서 도착한 곳은 주석궁이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바로 김일성 주석이 서있었다.
“이 부장 선생! 평양까지 와주셔서 감사하오.”
“수상 각하!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찬을 함께 하며 김일성은 1·21 사태에 대해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 부장 선생! 왜 남조선은 미 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요?”
대화의 기선을 제압하려 한 건지 아니면 편안한 농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후락은 이렇게 받아쳤다.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사람은 바로 수상 각하 아니십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습니까.”
이후락의 답변에 김일성이 허허, 웃었다고 한다. 이후락은 북한 방문 이후 기자회견을 하면서 김일성과의 대담 내용에 청산가리 에피소드를 언급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치솟았다.
1972년 ‘풍년 사업’이라는 암호명으로 극비리에 영구 집권을 추진해 이 나라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10월 유신十月維新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김정렴 비서실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등과 작업을 함께 했고 당시 검사직에 있던 김기춘이 헌법 초안을 잡았다. 이후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으로 영전된다.
이렇게 풍년 사업을 추진하던 곳이 궁정동 안가였는데 박정희는 7년 후 또 다른 중정 부장 김재규에 의해 바로 여기서 세상을 뜬다.
이렇게 진행된 10월 유신으로 제3공화국 헌법이 제4공화국의 유신 헌법으로 정착되면서 국민은 더욱 지독한 독재를 경험하는 유신 체제하에서 생활하게 된다. 4 공화국 유신 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가지며 대통령을 6년 더 연임할 수 있도록 하었다.
직선제 국민투표로 선출했던 대통령을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간선제로 바꾸면서 행정·입법·사법의 3권이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된 것이다. 가히 제왕적 대통령제로 1인 영구 집권 체제인 총통제 국가가 된 것이다.
“다음번엔 형님이 오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신헌법의 추진으로 박정희의 신임을 듬뿍 받으며 권력 중심에 성큼 다가섰지만, 최고 권력자에게 역린이나 다름없는 후계자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다.
- 젠장, 이인자의 위치는 굴러다니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자리거늘 잠깐 주의력이 흐트러지고 말았어.
그런 일이 있고도 자리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한 번 역모에 휘둘린 권력자의 눈은 언제 좁혀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 위기라는 건 타개하라고 생기는 거잖은가.
그러나 이후락은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다가 무를 수 없는 악수를 두고 만다.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이었다.
이후락의 만회 의지와 달리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을 납치한 게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국내외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을 비롯한 주요 교섭국과의 관계까지 나빠질 조짐이 보이자 그는 1973년 12월, 결국 해임되고 만다.
근데 이후락은 회고록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저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거듭해서 증언을 번복했다.
“내가 입 뻥긋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친다. 날 건드리지 마라. 그러면 나도 조용히 지내겠다.”
이후락은 끓는 솥에 들어가는 사냥개가 되지 않으려고 많은 고심을 했었나 보다. 아직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박 정권과 모종의 협상을 했다는 걸 주변의 많은 이들이 화두로 삼았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김형욱한테 된서리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박정희도 이후락에 대해서는 숙청 과정을 생략하고 지나갔다. 이후락 역시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 달리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12·12와 5·17 군사 쿠데타를 거쳐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즈음, 해외로 피신한 이후락은 김종필을 팔아 신군부에 협조한다. 김종필을 부정축재자로 모는 댓가로 그는 3개월간의 미국 도피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머리를 지녔지만 끝이 좋지 않은 기회주의자라는 인식을 세상에 심어 스스로 그 존재가치를 깎아내린 위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http://pf.kakao.com/_uLNKb
공작정치 본산의 틀은 더욱 견고해지고
‘울릉도 거점 간첩단 47명 검거’
유신 시대인 1974년 3월 15일, 7대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언론은 1면 특종으로 다루며 ‘10여 년간 암약하며 정부 전복 획책’, ‘지식층 및 군부에 침투 기도’ 등의 부제를 달고 47명의 인적 사항과 사진을 실었다.
결론을 말하면 이는 완전한 조작이었다. 중정은 울릉도 주민과 일본 농업연수를 다녀온 전북 주민들을 통째 엮어 간첩단을 만들어낸 거였다. 당연히 그 수단은 고문이었다.
이들 중 32명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대법원은 전영관·김용득·전영봉 세 사람에게 사형, 다른 네 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1년부터 15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1977년 12월 5일 사형이 집행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감옥생활과 보안관찰로 고통을 받았다.
“당시 피해자들이 불법 구금돼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하며 허위 진술을 강요받았다.”
이 사건의 피고인이었던 이상희 전 전북대 교수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위원회는 2010년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했는데 현재까지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을 포함해 19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인이 된 전영관을 포함해 피해 당사자와 그 가족 13명이 청구한 재심에 대해서도 무죄·면소 확정판결을 내렸지만, 50년 가까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보낸 세월을 보상받을 수는 없었다.
“북한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 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하였다."
중앙정보부는 10년 전 1차 인혁당 사건에 이어 1974년 4월 25일, 2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 판결 뒤 겨우 18시간 만에 여덟 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유례없는 사법살인이자 유신정권의 대표적 인권탄압 사건이다.
그처럼 권력은 국민의 무고한 피를 먹으며 비대한 몸집을 더욱 부풀리고 있었고 중앙정보부가 앞장서서 그 일을 해나가는 중이었다.
“북한 지령으로 반정부 투쟁을 선동한 거잖아, 그래? 안 그래?”
“네, 맞아요. 제가 간첩인 거 맞아요.”
영화 ‘자백’의 주인공 김승효는 1974년 서울대 경영학과 재학 중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끝내 허위 자백을 했다.
“피고 김승효는 간첩죄를 적용, 징역 12년을 선고한다.”
1981년 가석방되었으나 정신착란 등 후유증에 시달려 21년여 정신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재심 청구를 통해 2018년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김승효와 가족의 삶은 일찌감치 부서지고 깨져버린 후였다.
이때 중정 부장을 맡은 신직수는 육군 갑종 사관학교 출신으로 1952년 군 법무관으로 임관한 후 1961년 12월,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고등고시나 사법시험 합격자가 아닌 군 법무관 임용시험 합격자로서는 유일하게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http://pf.kakao.com/_DpNKb
여전히 군부의 독점 잔유물로 이어지는 중정
1976년 12월 4일 신직수 후임으로 김재규가 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다. 김재규에 대해서는 이후 챕터인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에서 언급기로 한다.
김재규 중정 부장이 박 대통령을 살해하고 구속되자 이희성 당시 육군 참모차장이 대를 잇는다. 육사 8기 출신으로 중정 부장이 된 그는 두 달 후 12·12 군사반란으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마저 구속되자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한다.
“모든 일은 전두환이 주도했다. 나는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듬해인 5·18 민주화 항쟁 당시 그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공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으나 그는 바지사장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때의 5.18 재판부는 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상 전두환과 공모한 것으로 판단하여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중앙정보부 재건을 위해서는 부득이 정보부장을 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통보성 의사표시를 하고는 1980년 4월 14일부터 중정 부장직을 겸직하게 된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신군부가 입법한 국가안전기획부법에 따라 1981년 1월 1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 명칭만 달라졌을 뿐 중정의 기능과 위상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안기부법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초헌법적 정치사찰, 인권침해와 강압 수사 등이 문제 되어 법령을 개정해오다가 1999년 1월 21일, 다시 일부 법 개정과 아울러 국가정보원으로 명칭을 바꾼다.
최근 들어 국정원은 달라진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흔적이 엿보인다.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의 수사과정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보듬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생소하여 어색하기까지 하였다.
과거 중정과 안기부로부터 불법 구금, 자백 강요 등을 당한 인혁당 사건, 남조선 해방 전략당 사건 등 1기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국가의 사과를 권고받은 27개 사건의 피해자 및 유가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한 것이다.
국민이 국가기관에 불법 강요를 당하는 한,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한 그 나라는 헌법 내용과 관계없이 이미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중앙정보부든, 국가 안전기획부든, 국가정보원이든 그 명찰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 직무 수행의 가장 큰 취지는 국민의 안녕이란 사실을 단 한시라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https://www.bookk.co.kr/search?keyword=%EC%9E%A5%EC%88%9C%EC%98%81
'창작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6_ 12·12 군사반란 (0) | 2022.03.19 |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5_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0) | 2022.03.17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4_ 1·21 침투 사태 (0) | 2022.03.17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3_ 하나회 (0) | 2022.03.16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1_ 5·16 군사 정변 (0) | 2022.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