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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3_ 하나회

장한림 2022. 3. 1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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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리그, 결속인가 유착인가

 

'경북 마피아’의 태동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하며 우리끼리는 경쟁하지 않는다. 이상의 서약을 위반할 시 인격  말살을 감수한다.

 

학생들이 결성한 일진회나 성인 조직폭력배들의 충성 맹세 장면이 아니다.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하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나라 육군 장교들이 동기들 간에 맺은 서약의 실제 내용이다.

그들의 맹약과 운영지침은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막가파의 경지를 넘어선다.

 

‘회원 다수는 영남 출신으로 정하고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신규 회원 가입 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케 한다. 여타 지역의 출신은 상징적으로 가입시킨다.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고 재벌로부터 자금을 수령한다.’

‘회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진급 및 보직 상의 특혜다.’

 

우리나라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 개교하여 첫 입학생 200명을 받았다. 이들 입학생들이 기존의 육사 기수에 이어 11기 타이틀을 지니게 된다.

 

우리 경상도 동기들끼리는 더욱 단합하고 우정을 다져나가자.

 

이들이 현역 장교로 복무하던 1961년 말, 전두환, 최성택, 백운택, 정호용, 손영길, 노태우, 권익현 등 11기 동기생들이 칠성회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이게 후일 하나회의 시초가 된다.

이들은 서로 다른 보직을 지니고 군생활을 하면서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사실 군에서 동기만큼 가까운 사이가 어디 또 있겠는가. 더구나 이들은 동향이라는 고리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 여기까진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소문만 무성하더니 결국 군대가 나섰단 말이지. 그렇다면...

 

5·16 군사정변 당시 서울대 문리대 교관으로 근무하던 육군 대위 전두환은 박정희 장군이 일으킨  사태가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 것이냐의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성공이 확실시되자 쿠데타 세력에 붙기로 한다.  

전두환 대위 주도로 육군사관생도들은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눈에 쏙 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칠성회는 경북 마피아라는 비아냥에 관계없이 회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군부 내 청년 장교들의 중추적 그룹으로 자리 잡게 다. 정치군인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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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인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육사 8기 출신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5기의 김재춘 방첩대장이 공화당 창당 문제로 갈등이 불거졌을 때 11기 출신들은 잽싸게 5기 쪽으로 편승한다. 5기가 승기를 잡아 김종필을 정보부장 직에서 끌어내리고 해외로 떠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아직 힘을 갖추지 못했을 때는 승자의 그늘 밑으로 자리 잡는 법이다.

 

“김종필이랑 8기 놈들 이번에 아예 싹을 도려내버리려고 했는데.

 

당시 김재춘은 김종필의 중앙정보부에서 저지른 주가 조작 등 4대 의혹 사건을 대국민 담화를 통해 공개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로 김종필을 해외에 내보내는 선에서 유야무야 마무리해버리자 울분을 가누지 못하던 차였다.

이미 정치의 오묘한 맛에 익숙해진 11기생들이 이를 기회로 삼아 박정희 의장 다음의 최고 권좌인 중앙정보부장을 방문했다. 방첩대장이던 김재춘이 김종필을 밀어내고 3기 출신 김용순에 이어 3대 중앙정보부장에 부임한 지 넉 달이 지난 후였다.

 

“아무리 혁명에 동참했더라도 4대 의혹 사건으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4대 의혹 사건 관련자들을 우리가 제거하고자 하는데 부장님께서는 잠시 눈감아 주시겠습니까?

 

11기의 손영길 소령과 노태우 대위가 김재춘 부장의 의향을 물었다. 두 사람 뒤에는 같은 기수의 10여 명이 우르르 따라붙어 있었다.  

 

- 허어, 이 놈들 봐라. 겨우 초급장교에 불과한 놈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나를 감히 간 보려 드네.

 

군에서 잔뼈가 굵어 그 생리를 잘 알고 있는 김재춘은 물고 물리는 현 상황에서 청년 장교들에게 동조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자네들 말은 하극상을 넘어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얘기나 다름없어. 더 들을 것도 없으니 그만들 돌아가게.

“허락만 해주신다면 의장 각하와 장군님 말고는 모두 처넣을 수 있습니다.”

“친위 쿠데타를 하겠다 이거지.”

“…….

“이놈들이 간이 배 바깥으로 튀어나왔구나. 네놈들부터 내가 다 잡아넣어주마.”

 

김재춘은 호통을 쳐서 이들을 내보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놓을 수는 없어.”

 

김재춘의 거부에 아랑곳하지 않고 11기 출신들은 1963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선배들이자 혁명 주체세력인 8기 출신들을 더는 권력 근처에 얼쩡거리지 못하게 이른바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한다. 

이들은 서울의 한 예식장에서 육사 동창회를 열고 결의를 다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에 차 있었다.

 

“우리가 진정한 육사 1기 출신들이야.

4년제 출신이 단 별이 진짜 별이지, 그 전의 장군들이 무슨 장군이냔 말이야.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다수의 육사 11기들은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자기들이야 말로 이 나라의 군부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의 1기부터 10기까지는 겨우 몇 개월씩 훈련을 받은 군사 양성소와 같은 시스템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단기 교육 출신 장교들을 선배로 인정하지 않는 추세였다. 그랬기에 친위 쿠데타 모의는 쉽게 무르익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가 새 나가면서 이들의 계획은 시도조차 못하고 실패에 그치고 만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 지휘했던 이가 정승화 방첩대장이다.

 

“그저 맹랑한 짓이었지.”

 

그는 11기들의 쿠데타 모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역사는 참으로 맹랑하고 엉뚱하며 아니러니하게 조우한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맹랑한 짓을 벌였던 그들에 의해 이등병으로 강등된 채 옥고를 치르게 되지 않던가.

 

"국민들 눈도 있고 군의 사기 문제도 있으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자고.”

 

11기 출신들의 친위 쿠데타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사안을 가볍게 보았다기보다는 4년제 육사 출신들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앞으로 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11기가 군을 리드해 갈 것이 자명하고 그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왔던 박정희였다. 그리고 그들을 이른바 대통령 근위대로 키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회의 손영길 소령은 박정희가 7 사단장이었을 때 최우수 중대장이 되어  5·16 군사정변 이후부터 박정희의 전속부관이 된다. 이후 손영길은 전두환 대위를 국가재건 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로 추천하여 대통령 가까이 끌어들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따끔하게 혼낼 테니 이쯤에서 덮어두도록 해.

 

박정희는 수사를 맡은 방첩대에 그렇게 지시하고 칠성회의 주축 멤버인 손영길, 전두환, 권익현, 노태우를 불러들였다.

 

“이번 일로 위축될 거 없어. 너희들이 힘을 키우려면 별도의 조직이 필요해.”

 

이때 하나회 조직이 탄생했을 거라고 당시의 고급 장교들은 짐작한다.

박정희가 직접 지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확인이 어렵지만 묵인이든 적극 지원이든 박정희가 하나회에 거름을 뿌려 덩치를 키운 것만은 분명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군법에 회부되거나 강제 예편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훈방 조치되며 기사회생한다. 대통령을 지근에서 보좌하고 있는 손영길 소령의 도움이 작지 않았다.

 

“대통령 각하께서 우리한테 힘을 실어주셨어. 다들 힘내자고.”

“그래, 나무보다 숲을 보고 새롭게 출발해보자.

“파이팅!”

 

친위 쿠데타로 인한 이때의 위기 전환을 기화로 하나회 회원들의 군복은 정치색으로 짙게 물들여진다.

이들은 육본 인사참모부, 보안사령부 내사과 등 진급 담당 요직을 점거하는가 싶더니 승진이나 자리 이동 때 회원들을 추천하고 밀어주는 식으로 군내 주요 요직을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손영길은 청와대 외곽의 경호 책임자인 30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육군대학에 입학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를 전두환에게 넘겨준다. 또 전두환은 자기 자리를 노태우에게 넘겨주면서 타순을 이어간다. 손영길, 전두환, 노태우 순으로 이어지는 막강 타순은 하나회 전체에 플러스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두루 회자되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들어보자. 언론에까지 비화된 일화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타순은 서열처럼 굳어져 훗날 대통령까지도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우리 집 양반이 끌어주지 않았으면 노태우 장군이 이렇게 빨리 출세할 수 있었겠어.

 

전두환 부인 이순자 여사는 노태우의 부인인 김옥숙 여사를 아랫사람처럼 하대하며 얕잡아 보았다.

 

나는 당신과 질적으로 달라. 당신은 체육관 출신 대통령 부인이고 나는 전 국민이 뽑은 직선제 대통령 부인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옛날부터 수모를 참아왔지만 이젠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1988년 남편이 13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옥숙은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이순자에게 깨우쳐주려 했다. 남편들끼리 동기임에도 손위 형님처럼 모셔야 했던 수십 년간의 수모를 한꺼번에 씻어내며 속이 후련했을 김옥숙과 달리 이순자는 남편과 함께 백담사에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여인네의 그 속이 과연 어땠을까. 하나회 회원들 중 1번 타자였던 손영길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언급하기로 한다. 

 

 

윤필용 사건과 하나회, 이후락의 무리수

 

이쯤에서 우리나라 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윤필용 사건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1973년 쿠데타 모의 혐의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과 장성·장교 등 13명이 형사 처벌을 받은 사건으로 당시 엄청난 파동을 일으킨 권력 스캔들이었다.

 

대통령은 한물갔습니다. 이젠 형님이 이 나라를 이끄셔야지요.

 

1973년 4월, 당시 수경사령관 윤필용 소장이 사석에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불거져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군간부들이 역모 혐의로 구속되어 처벌받은 사건이다.

육사 8기인 윤필용은 영남 출신 장교들의 대부로 군림하며 군부 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필용이가 그랬단 말이야?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당장 보안사령관 들어오라고  해.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 윤필용의 발언 내용을 전해 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박정희는 사단장 재임 시 휘하 대대장이던 윤필용을 군수참모로 발탁하였고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비서실장 대리로 그를 곁에 두며 아껴왔던 터였다. 그래서 하나회의 후원자 역할을 맡기며 전두환 등 11기들과 친분을 돈독하게 유지하게끔 독려했었다.

 

윤필용, 이제 너도 끝났어. 딱 여기까지가 네 세상이었단 말이다.

 

대통령 지시를 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이들을 엮어 육군본부 보통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윤필용 수경사령관,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권력 중심으로 밀착하려는 양상을 보이며 서로 간에 대립각을 곧추 세우고 있었다. 이런 때 권좌에 있는 지존은 이들을 적절히 비비고 볶아가며 견제를 시키는 게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자라보고 놀라면 솥뚜껑 보고도 물러서게 된다. 사기꾼이 제일 무서워하는 자는 아마도 강도나 도둑놈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직업(?)의 사기꾼일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했으니 자기를 벤치마킹하는 자들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실제 박정희 정권 때 적지 않은 역모 사건이 발발했었다. 그의 최후도 직속으로 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 말미암았으니까 더 말해 무엇하랴.

 

“너희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건 넘어갈 수 있지만 정도를 넘어 가까워지는 건 두고만 볼 수 없어.

 

이후락과 윤필용이 가까워지면서 합종연횡을 꾀하는 것처럼 보이자 박정희는 인위적으로라도 자연생태계를 깨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윤필용과 이후락을 돌연변이의 숙주처럼 여겨 이참에 제거했다는 게 지배적인 후일담이다. 내부적 정황이야 어떻든 윤필용은 입 한 번 잘못 놀려 졸지에 신세를 망치고 말았다.

 

“피고 윤필용, 징역 15년에 벌금 및 추징금 2,600만 원을 선고한다.

 

사실 여부에 불구하고 한 번 역모에 엮이면 최소 3대가 망하고 9족을 멸하는 게 고려나 조선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관례였다. 일례로 조선 8대 왕 예종 때, 병조판서 남이가 유자광의 고변으로 겨우 스물여덟의 나이에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당하며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역모 혐의를 입증하지는 못했으나 아무리 근거 없는 루머였을지라도 이미 대통령 눈밖에 나고 말았다. 

관련자들은 업무상 횡령 및 수뢰,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군무 이탈 등 8개 죄목으로 윤필용을 비롯, 11기 출신의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 등 장교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다. 또 중앙정보부에서도 이후락 라인 30여 명이 구속되거나 현직에서 물러났다.

 

전역서에 서명하겠다면 이쯤에서 모든 걸 덮어주겠다.

 

11기 중 선두를 질주하던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은 함께 대령으로 특진하더니 1973년 1월 1일, 역시 동시에 별을 달게 된다. 그해 3월 초,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이 구속되고 다음날, 손영길 참모장은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되었다가 서빙고 보안대에 전격 구속된다. 

손발이 묶인 채 고문을 당하는 일명 멧돼지 통구이 상태였다. 손영길은 상관이 윤필용이었다는 게 지은 죄의 전부였지만 결과적으로 줄을 잘못 선 탓에 군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연대장이 되어 9 보병사단 29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던 그는 하나회를 이끌던 줄이자 그를 지탱해주기도 했던 줄이 싹둑 잘리는 결과를 안고 말았다. 

2015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손영길은 윤필용 사건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하나회는 내가 주도해서 만들었어. 33 경비단장이 되면서 보직에 전념할 수밖에 없어 전두환에게 리더 자리를 넘겨준 거였지.

 

손영길 예비역 준장의 회고가 이어진다.

 

나를 엮어 넣은 건 당시 전두환 준장과 노태우 대령이야.

 

아마 윤필용은 입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버릇이 있었는가 보다. 

 

박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고 당부하더라. 너, 더 분발해야 되지 않겠어?

 

사건 이전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은 전두환 1 공수여단장과 독대한 사석에서 진정성 있는 충고인지 이간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했다.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던 전두환으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끝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파워 게임에서 둘을 모두 제거한 박종규가 승리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런데 박종규 라인이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그 틈을 노리고 손영길을 제거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조폭의 생리가 그렇듯 이들의 결속 또한 유착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끼리는 경쟁하지 않는다는 당초의 맹약도 큰 먹잇감 앞에서는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는 야수와 다를 게 무엇인가. 5관 돌파를 하며 유비를 찾아가는 관우가 언월도를 휘두르며 튀어나올 것만 같다.  

 

“허참, 이놈들 봐라. 여기가 군대야, 조폭 집단이야?

 

강창성 사령관 주도의 보안사령부가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윤필용이 후원자 역할을 한 하나회의 막가파식 조직 규율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군부 내 사조직의 위험성이 도마에 올랐으나 후속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되었다가 1975년 석방되었는데 그 후 하나회 주축의 신군부가 12·12와 5·17로 권력을 잡자 한국 도로공사 사장, 한국 담배인삼공사 이사장을 지내게 된다. 

또 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은 대통령의 재신임을 얻기 위해 김대중을 납치한다.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하는 무리수를 둠으로써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 것이다.

한편,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 선고를 받았던 손영길을 포함해 일부 장성은 법원에 재심을 요청해 2009년 12월 무죄 선고를 받은 후 2011년 5월, 국가배상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즉 사건 관련자 일부는 재심을 통하여 겉으로나마 명예를 회복하였다.

 

 

생명력은 잡초가 더 끈질긴 법      

 

하나회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리더는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던 윤필용이었는데 윤필용은 날개 정도가 아니라 목이 잘리다시피 했다. 앞줄에서 보이지 않게 리더 역할을 했던 손영길까지 덤으로 잘려나갔다. 

 

나는 오로지 대통령 각하의 명령만 따릅니다. 

 

두목이 죽는다고 해서 조직이 와해되던가. 부두목이 있고 3인자가 호시탐탐 꼭대기를 노리고 있는데. 전두환의 진로는 가히 순작용이 거듭되는 행운의 새옹지마였고 전화위복의 반복이었다. 

하나회가 처음 결성될 당시만 해도 전두환은 영관급 장교인 중령이었으나 대통령이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작용했기에 장성들조차도 전두환 중령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조직의 실질적 오야붕이 된 전두환은 소나기를 피해 다니더니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역시 박 대통령의 두터운 보은 덕이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애정을 등에 업고 폭넓고도 두텁게 하나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젠 저희가 진정한 충신이 되어 각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꼬인 실타래 같던 권력구도가 얼핏 황금분할처럼 정리된 듯했다. 박정희는 그제야 가위에 눌리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 이놈들이라면 역모를 꾀하지는 않을 거야. 두환이는 내 등을 노릴 놈이 아니야. 

 

박정희는 권력에 맛을 들인 일부 군부 세력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믿을만한 친위 세력이 필요했다.

 

- 이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까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상생한다는 걸 깨달았지.

 

박정희는 장성 진급 시기가 되면 하나회 출신들 먼저 승인 서명을 했다. 1차 준장 진급자 네 명이 모두 11기 출신의 하나회원이었고, 2차 진급자 네 명 중에서도 두 명이 하나회였다. 

 

이젠 별을 달았으니 폼 좀 잡고 다녀. 아랫것들한테 가볍게 보이지 않게 말이야.

“대통령 각하! 감사합니다. 반드시 결초보은 하겠습니다.”  

 

전두환이 준장 진급할 때 박정희는 최고급 세단을 하사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전두환은 동기들 중 가장 늦게 영관급 장교로 진급했으나 하나회 수장이라는 타이틀이 도드라져 가장 먼저 별을 달았다. 

노태우, 김복동이 장성 진급할 때도 하나회 최초 명칭인 일심회의 일심一心을 지휘봉에 새겨 내려준 것만 보더라도 박정희가 하나회에 쏟는 기대와 정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줄 서기에 달려 있다 

 

육사에서도, 군에서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파도에 출렁거리던 바다가 잠잠해지고 나니 바닷속 저 아래 바닥에서 목을 움츠렸던 거북이들이 올라와 잔잔한 수면 위를 여유롭게 유영한다. 

하나회 회원인 11기들은 같은 기수들 중 학업성적이 하위그룹에 속했다. 특히 전두환은 소위 임관도 어려웠을 정도로 최하위의 성적이었다고 한다. 그들 주축 회원들의 임관성적이 검색된다. 

1951년 한국전쟁 중 200명이 입교하여 1955년 156명이 임관했다. 김복동(전 육사 교장, 신민당 대표) 13등, 권익현(민주정의당 대표 최고위원, 새누리당 상임고문) 55등, 노태우(13대 대통령) 67등, 정호용(전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86등, 전두환(11, 12대 대통령) 126등이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역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하나회에 가입한 회원이 아니면 동수저였고 기껏해야 은수저 수준이 될 수 있는 게 현실이었다. 금수저인 하나회 회원들은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며 군 요직을 저희들끼리 대물림하며 세력을 넓혀 나갔다. 하나회 가입은 곧 진급의 지름길이었으며 출세의 발판이었다. 

3 공화국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하나회 출신이 아니면 보안사령관, 특전사령관이나 육군 참모총장의 최고 요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반대로 하나회 회원들은 현역 시절부터 가공할만한 특전을 누리는데 몇 가지 실례를 들러보기로 하자.

소속 부대원 10여 명이 사상하는 총기사고가 발생했을 때의 이종구 대대장, 무장공비가 위수지역 내에서 공작을 벌이다가 복귀했을 당시의 박희도 제2공수 여단장, 그리고 박준병이 사단장이던 20사단에서는 훈련 중 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예하부대에서 월북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들이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면 진급은 고사하고 아예 군복을 벗어야 하는 게 군의 관행이다. 그러나 이들은 군에서는 물론 전역 후 5 공화국까지 승승장구하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군대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역설적 비아냥을 철저히 증명한 셈이다.

하나회 총무를 맡았던 14기 출신의 이종구는 수경사, 보안사 사령관을 거쳐 육군 대장의 계급을 달고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까지 거침없이 도약한다.

육사 12기 출신의 하나회 회원 중 박세직, 박준병, 박희도는 three pak’이라 일컫기도 했는데 박희도는 박세직, 박준병보다 진급이 1년 늦는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12·12 군사 반란 당시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1 공수를 출동시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며 일등 공신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끝내 다른 three pak 두 사람을 젖히고 육군 참모총장까지 등극했다.

12기의 박준병도 12·12 때 병력을 동원했고 보안사령관을 거쳐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여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전두환 정부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육군에서 소위, 중위, 대위의 위관급 장교가 영관급 장교인 소령으로 진급하려면 기본적으로 두 차례의 중대장 보직을 거쳐야 한다. 

그중 한 번은 전방 사단에서 복무해야만 장성 진급의 요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중대장 직을 건너뛰고도 장성까지 진급한다.

 

“위아래도 없는 여기가 도대체 군대야! 장유유서가 물구나무를 서도 분수가 있지. 

 

비 하나회 군단장이 자기 휘하에 있는 하나회 연대장의 눈치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만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 조천성 사단장이 휘하의 전두환 연대장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다가 중장 진급에 실패하고 전역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군부 세력, 신군부의 탄생

 

1979년 10·26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하나회는 신군부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면서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처음 그들이 맹세했던 것처럼 정부 요직을 골고루 나눠먹는다.

5 공화국 정권하의 군부 역시 정권의 안전장치이자 실세라 할 수 있는 육군 참모총장, 수도방위사령관, 국군기무사령관, 대통령 경호실장은 온전히 하나회가 독점했다. 비하나회 인물은 단 한 명도 기용되지 않았다. 

비하나회는 당시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던 합참의장이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정도에 하나회와 번갈아가며 기용되는 게 고작이었다. 

 

“아무리 비참해져도 까마귀 놈들이랑 같이 어울릴 수는 없어. 

 

비협조적인 비하나회 장교들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진급 누락과 한직으로의 좌천을 거듭하다가 군복을 벗어야 했다. 야전에서 묵묵히 군인의 길을 걸어온 비하나회의 유능한 엘리트 장교들은 하나회 정권에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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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붉어지면 그다음엔 시들기 마련이다

 

13대 노태우 6공 시대가 열리면서 분열되는 조짐을 보이던 하나회는 급기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2·12 군사반란 이후부터 하나회 이인자이자 차기 정권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노태우는 오랜 기간 후임자로서의 설움을 견뎌야 했다. 

권력의 속성상 이인자에게는 견제가 쏟아질 수밖에 없었지만 노태우는 이를 견뎌내며 친구인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했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평생의 그림자로서 변함없는 충성을 확신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달라졌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해. 지금 담긴 술은 맛도 냄새도 너무 고약해. 

 

국민들의 5공 청산 요구를 등에 업고 전두환 라인에 가차 없이 칼을 들이댔다. 1988년 6월, 노태우는 취임 후 첫 군 장성 인사에서 5공 청산에 대한 국민 여론을 구실로 박희도를 참모총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더니 전두환 라인의 뿌리를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국민 여론이 드세기도 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이를 적절히 명분 삼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유배시켰다. 또 5공 청문회 등을 활용하여 장세동, 이학봉 등 전임자의 충복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명분과 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맹세? 서약? 그런 게 있었어?

 

이제 하나회의 굳은 맹약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들의 충성 서약은 이미 변질된 지 오래였다.

 

이러다 그 화살이 나한테 되돌아오는 건 아닐까. 

 

임기 말이 다가오면서 노태우 대통령은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지도 모를 후환이 염려되기 시작했다. 전두환 라인의 하나회 회원들에게 유화책을 썼다. 그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자신이 좌천시킨 전두환의 핵심 김진영을 복권시켜 참모총장에 발탁했고 기무사령관에도 전두환 계의 서완수를 임명했다.

퇴임 무렵에 전두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충복들을 군부 곳곳에 깔아 두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핵심 요직에는 하나회 회원들로 채워놓았다.

 

- 이만하면 김영삼이 차기 대통령이 되더라도 나한테 해코지는 못하겠지. 

 

노태우는 하나회 회원들로 군부를 장악해놓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는 군사 쿠데타를 우려해서라도 김영삼이 함부로 현직 대통령의 권한을 휘두르지는 못할 거라고 낙관했다. 그런 이유로 김영삼 문민정부가 하나회와 불편한 동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게 세간의 지배적인 예상이기도 했다.

1993년 초, 1975년에 임관한 육사 31기생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 소속과 비하나회 동기들 간에 분열이 일어나 물리적 충돌까지 빚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모임 장소인 술집에서 난투극을 벌인 뒤에야 다소 진정되었으나, 이미 동기생들 간의 앙금은 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직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누군가가 하나회 명단을 살포하더니 국방부 청사 주차장에도 하나회 척결을 주장하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올바른 길을 걸어온 다수의 군인들이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처럼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게 해 줄 것임을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약속합니다. 

 

1993년 3월 5일, 육군사관학교 49기 졸업 및 임관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그렇게 연설했다. 

 

군인들은 군대를 그만둘 때 사표를 내나요? 

 

14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이 대뜸 권영해 국방부 장관에게 물었다.

 

군대에선 사표 내는 일이 없고 상부의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밀어붙입시다. 

 

김영삼 대통령은 노태우와 하나회의 예상을 비웃듯 취임과 동시에 전두환, 노태우 라인을 불문하고 대대적인 숙군작업에 들어갔다. 

국군통수권자의 권한으로 가장 먼저 하나회 출신 김진영 육군 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전격 해임하고 불과 4시간 여 만에 후임으로 비하나회 출신의 김동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육사 17기)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육사 22기)을 각각 임명하였다.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에 대해 대대적 숙청작업을 진행했는데 이때 하나회 출신 장성만 18명이 해임되었다. 하늘을 수놓던 왕별들이 별똥별이 되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5·18 민중 학살과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의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오래도록 이어져온 하나회의 머리는 잘렸다. 

 

그 이후로 살아남은 가입 회원들은 각자도생 하며 하나회의 명함을 깊이 숨겼을 것이다. 예비역 장성들은 마지막 하나회 출신인 김현집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전역한 2016년 말까지 하나회 몸통이나 꼬리들이 존속했다고 회자하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 세상에 하나회 명함을 지니고 공밥을 얻어먹을 데는 없어졌다. 

2005년 '월간 신동아' 2월호에 육사 11기부터 이어져 내려와 36기까지 가입한 하나회 회원 250명의 명단이 최초로 공개되기도 했다. 

다시는 이 나라, 이 땅에 카키색 군복이 정치색깔로 변질되지 않기를 염원하게 된다. 군인은 군인 다울 때 가장 멋지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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