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종언, 유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다
궁정동 안가, 박정희와 김재규 술잔에서 권총으로
“바로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김재규가 부하들을 불러놓고 낮게 뇌까렸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가 막 지날 무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차지철 경호실장과 함께 궁정동 안가安家의 연회장 만찬 자리에 앉았다가 약 40분쯤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각하까집니까?”
중앙정보부 요원인 김재규의 부하 하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가는 아래쪽으로 누이며 묻자 김재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총을 점검한 김재규는 늘어선 부하들에게 눈길을 주더니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김 부장! 오늘 각하께서 한잔 하시기로 했으니 시간 맞춰 궁정동으로 들어오시오.”
두 시간 전인 오후 4시경, 차지철로부터 호출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즉시 정승화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 공을 들여 친분을 다져두었던 육군참모총장이다.
“정 총장, 오늘 저녁 6시 반까지 궁정동 본관으로 좀 와 주시오.”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별채 연회장에서 함께 참석하기로 한 김계원 비서실장을 기다렸다,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이 너무 심해.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말이야.”
김계원의 푸념에 기다렸다는 듯 김재규가 가까이 다가가더니 속내를 털어놓았다.
“형님, 오늘 저녁 내가 이놈을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은 형님이 책임져 주시오.”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여 이에 동의를 표시했다. 이 엄청난 말에 김계원이 선뜻 동의한 건 김재규가 언젠가는 그런 일을 벌일 거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으며, 차지철뿐 아니라 박 대통령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자칫 일이 커질 수도 있겠구나.
차지철만 죽인다면 박 대통령이 김재규와 자기 자신을 그냥 두고 넘어가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 문을 열었다. 다들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였다.
대학가요제 출신이자 당시의 히트곡 ‘그때 그 사람’으로 유명한 가수 심수봉이 기타를 반주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모델 신재순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는 저녁 7시 40분이었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
탕! 탕! 김재규가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차지철에게 권총을 발사한 그 시간이기도 하다.
“뭣들 하는 거야!”
놀란 박정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차지철이 총탄에 맞은 팔을 부여잡고는 “경호원, 경호원!”하고 외쳤다.
차지철에게 먼저 총을 발사한 김재규는 4, 5초가량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정좌한 채 질끈 눈을 감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다시 발사되지 않자 김재규는 만찬장 밖으로 나갔다. 김재규 측의 중정中情 요원들은 대기실과 주방에서 차지철의 부하들인 경호원들에게 총을 난사해대고 있었다.
“각하, 괜찮으신가요?”
김재규가 나간 사이 심수봉과 신재순이 피에 흥건히 젖은 대통령을 부축했다. 박정희는 신음을 토하듯 “나는 괜찮아….”라며 몸을 움찔했다.
“김… 김 부장, 왜 이러세요.”
다시 부하의 권총을 들고 온 김재규는 차지철의 숨통부터 끊었다.
유신정권의 실세, 5공화국 제3대 경호실장의 다중성
“형제? 나한테 가족이라곤 어머니뿐인데 무슨 개소리냐?”
1934년 경기도 이천에서 서자로 태어난 차지철은 어려서부터 배다른 형제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았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차지철이 승승장구 출세하자 이복형제들이 찾아와 꼬리를 흔들었다. 차지철은 “다시 찾아오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테니 앞으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라.”라고 버럭 성을 내면서 내쫓았다.
어머니에게만큼은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어머니뿐이었기 때문에 더욱 효자로 자랐을 것이다.
차지철은 여름휴가 때 박정희 대통령의 가족들을 수행하게 되었다.
“덥잖아, 자네도 들어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각하!”
바닷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던 박정희가 차지철 에게 물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차지철은 바로 거부했다. 박정희가 재차 강권하자 차지철은 마지못해 바닷물에 종아리를 담갔는데 얕은 파도가 일렁였다. 그러자 차지철은 즉시 질겁하며 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왜 그러는 거야? 공수병 환자처럼.”
의아해진 박정희가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박정희는 차지철에게 수영을 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차지철이 하늘처럼 모셨던 박정희도 어머니보다는 뒷순위였던 모양이다. 그의 효심에 대한 에피소드가 다시 이어진다.
골프장 오픈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이동하던 중 우연히 창밖으로 일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되돌아갔다.
“어머니가 땡볕에서 일하시는데 놀러 갈 수는 없었다.”
차지철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골프를 치지 않았다.
또 김계원 비서실장의 모친이 편찮은 걸 알고는 박정희에게 대신 보고하여 헬리콥터까지 내주도록 배려하였는데 어머니와 관련된 사안만큼은 평소와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내 아들이 사람들한테 죽일 놈 소리 듣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나한테는 지극정성인 효자였어.”
차지철의 어머니 김대안 할머니는 생전에 그렇게 말하며 먼저 죽은 아들을 그리워했었다.
개신교 신자인 차지철은 여자 문제에 있어서도 흠잡을 곳 없이 깨끗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외도가 일반적이었고 정부를 두는 경우도 많았었지만, 차지철은 아내만 바라볼 뿐 다른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4선 의원의 차지철은 국회의원 시절, 다른 의원들을 주먹으로 때리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같은 시기의 국회의원 중에 조선 주먹의 황제였던 김두한이 있었다.
차지철 같은 애송이가 무고한 의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니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김두한이 다가와 상의를 벗어젖히고 차지철 앞에 우뚝 섰다. 차지철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 의원이 그렇게 힘이 쎄다며? 그럼 힘없는 의원들 건드리지 말고 나랑 한판 맞붙는 게 어떤가?”
그러자 차지철은 찍소리도 못 내고 뒷걸음을 쳤다. 그 후에 차지철은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경호실장이 되어 청와대로 입성하게 된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총에 맞은 차지철과 총을 쏜 김재규의 생전 관계를 짚어보기로 한다. 두 사람 다 유신정권 말기의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권력의 실세들이었지만 둘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섞여지지 않는 견원지간이었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에 부정적이었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유신의 심장을 겨눴다고 주장한 김재규의 법정 진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도 차지철의 횡포가 김재규의 결심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차지철의 횡포를 묵인한 박정희한테 실망한 김재규가 거사를 단행했을 거라는 논리를 대기도 한다. 여덟 살 어리면서 군 시절에 한참 아래 계급이었던 차지철에게 밀려난 김재규가 일을 저지른 셈이 된다.
차지철은 박정희 바로 측근으로서 5·16을 주도한 혁명세력이고, 김재규는 군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가 혁명 반대론자로 몰려 수감되었다가 박정희의 배려로 풀려났다.
1945년 9월 경북사범대학교를 수료하고 김천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6년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육사 2기로 졸업·임관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된 그는 6·3사태 때 육군 준장으로 계엄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 후 방첩부대장(현 보안사령관)과 3군단장을 역임하다 예편했다. 전역 후 유정회 1기 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장관을 거쳐 1976년 말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런 화려한 이력의 김재규였으나 차지철에게 그의 경력은 조금도 화려하게 보이지 않았다.
반면 차지철은 태권도 등 무술 실력이 출중해 포병 간부로 특채된 케이스다. 육사 12기 시험에서 떨어졌던 사실도 숨기며 지내는 등 육사 출신 장교들에게 열등감이 심했고 중령으로 예편해 장성에 대한 질투심도 강했다.
“혁명을 반대했던 자가 대통령과 육사 동기에 고향 후배라는 이유로 목숨을 걸고 개처럼 일해서 여기까지 온 나랑 비교될 수는 없어.”
차지철은 김재규가 자기와 서열이 같은 직급을 차지했다는 게 몹시 못마땅했다.
“너처럼 천한 놈이 감히 나를 깔아뭉개려 들어?”
정통파 장교인 육사 출신도 아니고, 별 셋까지 단 자기와 달리 겨우 무궁화 두 개의 중령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혁명 세력이랍시고 그 발판으로 정치에 뛰어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도 고까운 존재였다.
차지철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뒤부터 경호실을 강화하여 또 다른 군벌 집단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경호실 산하에 별도의 정보기구를 만들어 정보를 수집하면서 중앙정보부 관장 업무를 침범했다. 원수지간인 오나라와 월나라가 같은 배에 탄 꼴이었다.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의 걸림돌, 10월 유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가 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돌아오다가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돌게 했다.
지난 18년 집권 기간에 이뤄놓은 ‘한강의 기적’을 눈에 담아두려 했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경제성장을 이룬 자신의 업적에 스스로 감동했던 것일까. 그 감동 속에 유신이라는 멍에가 완전히 감춰지고 말았던 건 아닐까.
공화당은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의 실질적 임명권,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 등 막강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통과시킨 것이다.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개헌논의를 일절 금지하고, 언론에도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
다시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차단하고자, 1975년 인혁당 재건사건 관련자들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여 8명을 대법원 확정판결 이튿날에 사형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더니 급기야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듬해인 1979년, 유신체제는 사상누각처럼 그 위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8월,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 조치에 항의해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다. 즉각 경찰의 투입과 진압, 그 과정에서 한 명이 사망하게 된다.
9월,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박정희에 대한 지지 철회를 요구했고, 여당인 공화당은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결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다시 10월 16일에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유신 철폐 시위가 일어나자 18일에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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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단해야 이 나라가 산다.”
한 번 더 총에 맞은 차지철이 쓰러지자 김재규는 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 가까이 총구를 겨누었다.
“김 부장! 제발… 이쯤에서 그만 하세요. 각하를 쏘면…”
술에 취했다가 정신을 가다듬은 김계원 비서실장이 김재규에게 사정했으나 김재규의 집게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탕!’
총소리와 함께 그예 한 시대의 막이 내려진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중용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재직 말기에는 대통령의 신뢰를 점차 잃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실질적 이인자로 권력을 좌지우지한 경호실장 차지철과 심각한 마찰을 야기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증폭시킨 것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 특히 부마釜馬 사태의 처리 문제에 있었다.
차지철의 강경노선이 박정희에 의해 채택되자 그동안 차지철의 견제로 불만이 누적되었던 김재규가 권총을 꺼내 든 것이다.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를 처단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살해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김재규는 시종일관 자신의 행위를 구국의 일념에 의한 ‘10·26 민주회복국민혁명’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1980년 5월 24일 결국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3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한 박정희는 1960년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과 제2군 부사령관을 지냈었다.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학생 의거를 계기로 군사혁명을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미 1950년대에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그 해 4·19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육사 8기 등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그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반공, 친미, 구악 일소, 경제재건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을 무너뜨렸다.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하게 된다. 박정희의 욕심은 새마을운동, 자주국방, 경제성장 노력 등 자신이 해오던 정치력의 대미를 장식하여 이 나라를 더욱 일으켜 세우려는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아주 오랫동안 국민을 군사독재정권의 틀 속에 옭아맨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늦어졌고, 시민들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를 조심스레 걸어 다녀야만 했다.
힘으로 권력을 쥐었으므로 그런 성향이 남아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게 박정희의 집권 명분이었다면, 김재규는 박정희가 없어야만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신념하에 스스로 구국의 결단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1979년 12월 20일,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과 이듬해 1월 21일, 2심에서 박 대통령 시해 혐의로 체포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박선호 의전과장을 비롯한 직원 6명은 5월 24일 대법원 사형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들 중 현역 군인 신분이었던 박흥주 대령은 단심제로 사형 판결을 받고 1980년 3월, 다른 이들에 앞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요원한 민주주의,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박정희의 사후死後. 박정희의 유신도, 김재규의 구국도 자취를 감추고 만다. 다만, 그들이 있던 궁정동 만찬 사건의 총수사권을 쥔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육사 11기 동기들과 하나회 등 자신의 세력을 등에 업고 연이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 장악에 성큼 다가선다.
역사의 아이러니. 박정희의 죽음, 김재규의 결단은 그저 군사정권의 연장 명분을 제공하며 민주주의를 더욱 더디게 했을 뿐이었다.
역사를 곱씹어보노라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쿠데타는 혁명이라는 치장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대개 변명과 항변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성공한 쿠데타는 무조건 옳다고.
모순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한 두 사람, 김재규의 총에 맞은 박정희는 수도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였다.
훗날 그의 딸이 이 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니 더는 여한이 없다고 생각할까.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 되어 수감생활을 하는 딸을 내려다보며 아버지로서의 깊은 회한에 잠길까.
지금도 역사는, 특히 정치사는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제자리를 도는 것 같아 그저 어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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