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생일 집 잔치’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보안사령관
“잡아들여.”
“예, 알겠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직속상관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은 두 명의 대령이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올리곤 방을 나갔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다시 또 군인이 무력으로 정권을 전복하는 발단의 순간이었다.
- 육군 참모총장, 상대는 육참총장인데…
국군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 통제국장인 허삼수 대령과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대령을 내보낸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허와 우, 두 대령이 부하들을 소집하는 게 보인다. 막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을 지시했다. 이젠 모 아니면 도다.
- 그렇지만 모가 나올 거야. 그래야 해, 그래야 윷판을 통째 휘어잡을 수 있어.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보안사령관에 임명될 당시가 떠올랐다. 올해 3월이니 10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이전투구를 지켜보며 추후 자기 자신을 중용하려 했을 거라고 여겼다.
1961년 5·16 당시가 떠오른다.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서울대 문리대에 ROTC 교관으로 파견 나가 있던 육군 대위 시절이다. 다음날 아침 육군본부로 가서 혁명 주체인 박정희 소장에게 면담을 청해 육사 생도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을 제안했다.
5월 18일 아침, 육사 생도들을 설득하여 800여 명을 동원시킬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대문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군중이 몰리는 대로에서의 시가행진으로 일부 국민과 외국인들의 회의적인 시각을 바꿔놓았다.
서른한 살의 젊은 육군 대위 전두환은 쿠데타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박정희 소장, 그분이라면 이 상황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것이다. 더구나 추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다. 그렇게 판단한 전두환 대위는 쿠데타 지지세력에 보다 일찍 줄을 서야 했다. 권력 지향적인 그의 정치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 국회로 나가면 어떻겠나. 정치하면서 나를 보필해주면 좋겠는데.”
“각하! 저는 좀 더 군에 남아 있겠습니다. 군에서도 얼마든지 각하를 도울 수 있습니다.”
육사 생도들 시가행진의 성공적 결과로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군인으로 남겠다며 정중히 거절했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후 전두환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1977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보안사령관 등을 거치며 박정희의 측근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5·16 당시 같은 대위였던 차지철이 공수단 소속으로 쿠데타에 가담해서 4선 의원에 경호실장까지 승승장구했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바로 그날, 총에 맞아 저세상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 이런 호재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군인으로 남았던 건 백번 천 번 잘한 일이었어.
전두환은 대령 시절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파견된 것 외에는 전방부대 근무 경험이 없었다. 오로지 수경사와 청와대 경호실 등 후방에서만 복무하였는데도 관례를 깨고 보안사령관에 오른 것이었다.
별 셋의 중장급 보직인 보안사령관은 군 요직 중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쥔 직책이다. 사단장급인 육군 소장을 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한 건 그만큼 신뢰하고 가깝게 두겠다는 대통령의 뜻이다.
- 그런데 임명권자도 이인자들도 모두 죽고 말았어. 아직 김재규가 감옥에 있기는 하지만 그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고 말이야.
보안사령관이 국가원수 시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직을 겸하면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결과론일 수 있지만, 박정희가 죽기 7개월 전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앉힌 건 역사의 물꼬를 완전히 틀어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 상에 놓인 음식은 맛있게 먹어줘야 해.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이 먹거나 상해버리거든.
전두환 개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민과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는 굳이 셈을 하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크기였다는 걸 가늠할 수 있다.
17일 전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태의 수사 책임자가 되었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 현직 보안사령관이자 합수본부장에 의해 또 한 번의 군사 쿠데타가 태동하는 중이었다. 허삼수와 우경윤 대령이 이끄는 무장병력은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공관 주변을 에워쌌다.
무장한 33 헌병대 병력 50여 명을 동원한 것이다. 어둠이 가라앉은 저녁 6시 50분경이었다.
“총장님! 저희랑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총장님께서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포착했습니다. 가셔서 해명해주셔야겠습니다.”
"뇌물이라니, 무슨 개소리야!"
김재규와 함께 대통령 살해를 공모했다는 혐의는 부러 피했다. 이런 와중에 총리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참모총장 부관을 향해 권총을 겨누면서 양측 간에 총격전이 일어난다.
참모총장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느낀 공관 헌병들이 뒤로 물러서자 허삼수 대령은 정 총장의 뺨에 권총을 들이대고 타고 온 일제 슈퍼 살롱에 떠밀어 넣었다.
공관에 진입하고 20여 분이 지난 7시 10분경, 합수부 측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정승화 총장을 국군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 이걸로 반란은 거의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정 총장이 관여한 게 드러났습니다. 정 총장 체포를 재가해 주십시오”
같은 시간,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보다 확실한 수사를 지시하며 재가를 거절했다.
- 이 양반이 다된 밥에 코를...
그러자 전두환은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들을 대동하고 대통령을 방문해 거듭 정 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요했다.
조직 폭력배가 떼거지로 몰려와 서명을 강요하며 협박하는 분위기였으나 이때에도 최 대통령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계엄 사태 하에서 군의 최고 구심점에 있는 계엄사령관을 뚜렷이 확인된 혐의 없이 체포함으로써 군에 공백이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전두환의 합수부를 중심으로 한 동조 세력들은 아무런 법절차 없이 하극상이자 반란을 일으킨 셈이었다. 뒤늦게 상부로부터 무단 연행이라는 연락을 받은 공관 경비대가 공관을 재탈환하는 과정에서 합수부 측 사병 한 명이 사살되고 계엄사령관 공관에서 모두 세 명이 사망하였으며 2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 군사 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다시피 한 신군부 세력은 자정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에 육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하에 두면서 언론을 장악하였다.
또한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 복귀를 요청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과 김진기 육군 헌병감을 체포했으며 수경사에 모여 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참 본부장 등 육군본부 측 장성들의 무장을 강제 해제하였으니 실질적으로 전군을 손아귀에 움켜쥔 거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군부를 거머쥔 작전을 이들은 ‘생일 집 잔치’로 명명했다.
12·12 군사반란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친위세력인 이건영 3군 사령관과 정병주, 장태완 장군 등을 모두 예편시키면서 위험 세력의 날개를 모두 꺾어버렸다. 이후 구속된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는 내란음모 혐의를 적용하여 징역 10년 형을 선고하게 된다.
생일 집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대규모의 수도권 예하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육군본부 측 병력과 충돌할 사태에 대비해 위수지역을 무단이탈함에 그치지 않고 무장 동원하였으니 이들은 아군과의 일전을 불사할 태세로 여차하면 내란으로 번질 우려가 농후했던 것이다.
위화도에서 개성으로 회군한 이성계가 고려를 전복시키는 역사 장면을 연상케 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과 함께 하나회 회원인 박희도 준장의 제1공수특전여단은 행주대교를 지키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시킨 후 곧장 서울로 진군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하여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체포하였으며 국방부 50 헌병대 경비병을 사살하고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이때의 총격전으로 국방부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바닥 곳곳에 핏물이 흥건했다.
최세창 준장의 3 공수특전여단은 휘하의 15 대대장이 이끄는 10여 명의 체포조가 투입되어 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을 사살하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였다. 3 공수는 정예 병력을 지휘통제실에 상주시키며 특전사령부의 기능을 전면 통제하였다.
또 장기오 준장의 5 공수특전여단도 서울로 출동하였고 노태우 9 사단장은 휘하의 29 연대를 중앙청 앞에 집결시켰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5시, 세 번째 강요로 사후 재가를 얻어냈다.
“결국 윷, 네 개가 모두 엎어졌어. 모가 나왔단 말이야.”
전두환은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사태가 마무리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OK 목장의 결투, 최후 승자와 영원한 패자는?
다음 날인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10·26 사건 연루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에 연관된 일부 장성도 구속하였습니다. 이희성 육군 중장을 대장 진급과 함께 후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2·12 군사반란 직후, 육군 소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이희성 육군 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한 셈이다.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 인사를 조정하여 군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면서 권력 공백기에 당당히 최고 실력자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반란의 무난한 성공으로 신군부 세력은 대다수 승승장구하며 두루두루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다.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 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 김복동, 유학성, 유병현, 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마치 한 편의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았어요. 서부영화를 보면 먼저 총을 뺀 사람이 이기더군요.”
반란을 성공시킨 이듬해인 1980년 정월 초, 인사를 온 전두환 사령관에게 김수환 추기경이 마주 앉아서 한 말이다. 전두환 사령관이 어떻게 추기경의 말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해진다.
역사를 뒷걸음질하게 했지만,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완전히 탈취하면서 쿠데타에 종지부를 찍었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이젠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1980년 ‘서울의 봄’은 군홧발에 짓밟히면서 다시 또 군사정권 제5공화국의 뿌리가 깊이 내리 뻗게 된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민정 이양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군사 독재정권을 이어간 20여 년 전의 시점으로 민주주의는 다시 되돌려지고 말았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오롯이 후진기어뿐이었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직을 계승하기는 했으나 반년 남짓 만에 신군부 세력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이에 대학생들은 학내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 퇴진, 민주 헌정 체제의 회복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와 흡사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다.
다음 날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 진압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그건 뒤안길로 넘어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혹독하기 그지없는 현재 진행형의 사안으로 지금도 분분하게 입에 오르내린다.
12·12 군사반란은 그 후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재임 기간에 억지 포장하여 정당화시키며 그 실상을 은폐하였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쿠데타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2·12 및 5·18 사건의 재판 1심은 전두환 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반란의 죄를 지었음을 확정 판결했다.
대법원은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성공한 쿠데타일지라도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것이었다.
https://creators.kakao.com/channel/_uLNKb/dashboard
http://pf.kakao.com/_uLNKb
'창작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1_ 연쇄납치 (0) | 2022.03.20 |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7_ 5·17 쿠데타 (0) | 2022.03.20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5_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0) | 2022.03.17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4_ 1·21 침투 사태 (0) | 2022.03.17 |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3_ 하나회 (0) | 2022.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