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서막, 암울하고 서글픈...
잃어버린 30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설운도가 부른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군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쥔 게 1961년 5월 16일에 시작하여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 즉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1993년 2월 24일까지니까 햇수로는 33년이 된다. 중간에 반 년여 최규하 대통령이 유임했던 걸 빼더라도 32년간은 족히 군사정권하의 국민으로 살아온 셈이다.
민주주의 헌법을 지닌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세월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어불성설일까. 역사는 세월을 먹으며 진화하는 생물체다.
5.16은 지금 군사정변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체들이 권력을 쥐고 있던 시절엔 혁명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쿠데타는 성공하면 혁명이 되며, 혁명은 실패하면 반란이 된다. 승자는 자기들의 역사를 쓰고 패자는 혹독한 오명까지 감수해야 한다.
“D 데이를 다가오는 4월 19일로 한다.”
1961년 4월 19일은 4월 혁명 1주기이다. 분명 학생들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새 정권인 민주당 장면 내각은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이라는 2대 악법을 제정하여 대중이 나서는 걸 억제하려 했기에 국민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중이었다.
“정부는 군부에 폭동진압 명령을 내릴 것이고 이때 자연스럽게 우리가 투입하여 과업을 수행한다.”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진압에 동원되는 부대를 미리 파악하고 동조를 얻어내야 할 것이야.”
5·16 주도세력은 그렇게 계획을 수립하고 진압 세력들의 동조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또한 학생들의 시위가 보다 과격해지게끔 비밀공작을 진행하였으나 예상외로 시위가 격하지 않아 거사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27일이 지난 5월 16일 새벽, 마흔네 살의 육군 소장 박정희는 검은 선글라스에 별 두 개가 또렷한 군모를 눌러쓰고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푸석하다. 초조함을 가누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잘 될 거야, 잘되겠지. 옳은 일을 하는 거잖아.
4월 19일 이후 5월 12일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는 바람에 나흘 지연되어 결국 오늘 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오늘 5월 16일은 역사에 큰 자국으로 각인되겠지.
실패하여 반란의 주동자로 기록되긴 죽기보다 싫다. 그럴 수는 없었다. 박정희는 숨을 몰아쉬고 지프에 올랐다. 지휘관을 태운 지프가 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쿠데타의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허정 과도정부가 잠시 들어섰다가 7·29 총선을 통해 민주당이 집권하며 내각책임제의 장면 정부가 새롭게 출범하였다.
“도대체 자유당보다 나은 게 뭐야. 학생들이 피 흘려서 나라살림 맡겨줬는데.”
장면 정권은 4·19 혁명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 더구나 민주당은 장면이 주도하는 신파와 윤보선 중심의 구파로 갈라져 극심한 내부 분열을 일으키며 그때까지 정치력 부재 상태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내각책임제 하의 실권 주체인 총리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치 양보도 없이 파벌 싸움을 벌이다가 장면이 총리가 되자 구파는 가차 없이 민주당을 떠나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구파가 짐을 싸서 나가버리자 인물난에 시달리던 장면 정권은 수시로 개각을 하며 더더욱 불안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비쳤다. 국가 운영 책임자로서의 면모를 상실한 유약한 정부는 군부가 전면 등장하는 충분조건을 제공했다.
5·16이 태동한 데에는 이 같은 민주당의 부실 외에도 군부 자체의 갈등요인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지들끼리 다 해쳐먹는군.”
“이 꼴 보려고 육사 간 게 아니었는데, 휴우.”
군부는 6·25 한국전쟁 이후 국군 창설 초창기의 군 간부들은 고속 승진했으나 엘리트 의식을 지녔던 육사 8기생 등 후배 그룹들은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있었다.
여기에 1950년대부터 군부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청년 장교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이른바 정군整軍 운동을 벌이는 등 육사 8기 중심의 일부 불만세력이 특단의 행동을 취해서라도 현실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군부 창설과정부터 생긴 파벌 간 대립에서 소외된 일부 영관급 장교들은 고위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 적체현상을 빌미로 세칭 하극상 사건을 일으킨다. 군부 내의 균열이 파국으로 치닫기 일보직전이었다.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은 김종필을 위시한 육사 8기생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편이었다. 이 부분이 하극상 사건과 나아가 쿠데타 모의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우리 군을 정화하려면 총장 각하께서 물러나야 합니다. 수범을 보이십시오.”
1960년 5월 2일, 박정희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 3·15 부정선거와 각종 군부 비리의 책임을 물어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의 사퇴를 요구했고, 5월 8일에는 김종필 중령을 필두로 김형욱, 길재호 중령 등 육사 8기생 여덟 명이 정군을 위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반란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하극상 사건으로 군법에 회부되었다.
이때의 정군 운동이 송요찬 총장 등 일부 장성들을 퇴진하게끔 하였으나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하극상으로 피소된 영관급 장교들도 흐지부지 처리되었고 정군파 장교의 실질적 리더였던 박정희도 한직인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는 정도에서 사안을 종결했다.
결국 이러한 미온적 처리가 쿠데타의 불씨로 작용하고 만다. 군 내부의 불만 해소는커녕 오히려 쿠데타 주도세력을 결집하게끔 만들고 만 것이다.
쿠데타의 형체는 울분의 결정체와 그 모습이 흡사했다
“더 지체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입니다.”
1960년 9월 10일,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쿠데타를 결의했다. 김종필 중심의 영관급 장교들은 박정희를 리더로 모시고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쿠데타 조짐은 이제 그 모습을 확연히 구체화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아시아권의 인도네시아, 멕시코를 제외한 중남미 대다수 국가,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점도 이들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었다. 개발도상국 중심으로 군사 쿠데타는 지구 상의 유행병처럼 번지다시피 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소장은 그런 일을 도모할 위인이 아닙니다.”
이즈음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보기관은 이들의 쿠데타 모의를 입수하고 있었다. 보고를 접한 장면 총리가 현석호 국방장관을 배석하고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물었으나, 장 총장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군대 문제에 대해선 장 총장만 믿겠어요. 잘 관리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세요.”
그러나 그건 유비무환을 위한 대책 마련의 지시가 아니었다. 유약한 통수권자의 여린 바람에 불과했다. 손이 닿지 않아 긁을 수도 없는 등짝 한 구석이 바로 군부였다.
누설되었거나 입수한 정보의 내용이 국가 전복을 꾀하는 엄청난 사안인데도 5월 12일을 거사일로 잡았다가 겨우 나흘을 연장하여 재시도했다는 것도 무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런 정보를 접수하였음에도 반란을 막지 못했다는 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요즘 세상의 웹툰에나 나올 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즈음 쿠데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김종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성공과 동시에 순발력 있게 국민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방송 원고도 만들고 혁명공약도 준비해야 했다. 반대편에서는 장면 정부의 정보실장을 맡고 있는 이후락이 쿠데타 조짐을 파악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칼과 방패의 입장이었다고 해야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훗날 JP와 HR이라는 이니셜을 세상에 알리며 오월동주처럼 박정희 정권에서 영욕을 함께 한다.
4·19 혁명 1주기의 폭동진압계획이 무산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따르는 장교 250여 명과 그들의 사병 3,500 명 정도의 병력이 단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나라를 통째로 삼키고 만다. 이들은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면서 국가권력을 한 움큼씩 장악해나갔다.
제1여단 소속의 해병대를 필두로 공수부대, 제6군단 포병대와 933대대 등 일부 대대 병력이 출동하였다. 한강 대교에서 헌병 부대와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서울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른 새벽, 제6군단에서 일찌감치 육군본부를 접수한 뒤 서울시청에 주력 부대를 주둔시켰다. 해병대가 경찰을, 공수단이 중앙방송국을 각각 접수하고는 장면 총리가 숙소로 이용한 반도호텔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총리는 진작 쿠데타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한 후였다. 미 대사관으로의 피신이 여의치 않자 기왕에 알고 지냈던 혜화동의 깔멜 수녀원으로 몸을 숨겼다.
“우리 국군끼리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한림 1군 사령관은 병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아군 간에 싸움을 용납할 수 없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을 거스를 수 없었다. 미국마저 상황 추이를 지켜보며 발뺌하는지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아아, 세상이 다시 또 천지개벽하겠구나.”
사실상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꼴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쿠데타 세력은 서울 전역을 손아귀에 넣고, 지방 주요 도시를 장악하는 데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샅바 싸움만 하다가 모래판에 주저앉은 정부
“우리 군은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이대로 나라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나라와 국민의 위태로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분연히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오전 5시, 중앙방송국의 라디오 첫 방송을 통해 군사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발표하면서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전면 인수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날 새벽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는 혁명 임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금융을 동결하고 항구와 공항을 폐쇄하여 내외국인의 출입국을 전면 통제하였다. 또 신속한 정권 인수, 의회의 전면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등을 선포한다.
그리고 김종필이 주도하여 작성한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1. 반공을 국시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한다.
2. 유엔 헌장 및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다져나간다.
3.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기아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5.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한다.
6. 그 이후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이다.
이어 이들은 바로 그날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와 30명의 최고위원을 구성하였다.
이틀이 지난 5월 18일, 장면 총리는 깔멜 수녀원에서 나와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샅바 싸움에 지쳐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장면 정권은 9개월 만에 그대로 주저앉고 본격적인 군정이 시행되었다.
이 날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군사정부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정세가 완전히 기울었다는 걸 인지한 미국이 발 빠르게 지지를 표명하였고 윤보선 대통령이 추인함으로써 합법적 혁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로서 3년 시한의 군사정부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 결국 난 바지사장이었어.
장도영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혁명 주체인 박정희 부의장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거의 모든 실권이 쥐어지자 이에 불만을 지녔다가 반혁명 사건으로 체포되고 중앙정보부에 끌려와 계급장까지 뜯기는 신세가 된다.
“충성! 잠시 얼굴마담 노릇을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때 장도영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 계엄 사령관까지 다섯 개의 어마무시한 직함을 지니고 있었으나 명실상부하지 않은 명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후 박정희 소장이 명실상부한 군사정부의 실권자로 부상하면서 국민들은 그의 이름, 그의 모습과 함께 하게 된다.
최고회의는 김종필의 주도로 미국의 CIA를 벤치마킹해 중앙정보부를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관료조직을 장악해나갔으며 민정 이양 이전부터 중앙정보부를 근간으로 관료, 지식인, 민간 정치인 등을 스카우트해 민주공화당을 조직해나갔다.
이들은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여 정치인 4,300여 명의 발목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그들을 통제해놓고 자신들만 창당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일들과 더불어 새로이 구성될 민간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대통령제로의 복귀와 기본권의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개정했다.
그 맛이 너무 달콤하여 도저히 뱉어낼 수가 없어
“이대로 물러나면 죽 쒀서 개한테 주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군인이 아닙니다. 야전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정치에 녹아지고 말았단 말입니다.”
“박정희 의장님을 대통령에 앉혀야 나라도 살고 우리도 살게 됩니다.”
이미 권력 맛에 중독된 이들이었다. 군정을 실시하면서 애초 쿠데타 세력들은 조기 민정이양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권력은 그 맛이 너무나 달콤하여 입에 넣으면 도저히 뱉어낼 수가 없었다.
이들은 4년 더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선언했다가 국내외에서 강력한 반대 여론이 일자 군에 복귀하겠다는 공약을 깨뜨리고 개헌 헌법에 따른 직선제 선거에 나서기로 하였다.
1962년 12월 17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헌법을 개정하여 국민투표에 부쳐 개헌한 바 있다. 권력구조를 기존의 내각책임제에서 다시 대통령제로, 선거제도를 헌정 초기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았다.
중앙정보부 주도하에 군정 세력들은 미리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였고 대통령 선거자금을 마련하느라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다.
주가를 조작해 막대한 자금을 조성하면서 증권파동을 일으켰는가 하면 파친코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등 당시 4대 의혹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다.
이렇게 수단과 절차의 정당성이 희석된 과정을 거치면서 1963년 10월 15일에 있을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준비해 나갔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집권하는 합법적 시나리오를 채택
5.16 정변 직후 해산했던 정당들은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1963년부터 정당활동이 허용되자 재야에서 봄을 기다리던 인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 대통령 윤보선을 비롯하여 박순천, 허정, 이범석, 장택상, 변영태, 송요찬 등이 새로운 당을 창당하면서 새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고자 했다.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현역 군인 신분인 박정희도 예정된 수순대로 예편하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5대 대통령 선거는 5.16 주도 세력이 이끄는 여권과 헌정 초기부터 활동한 기성 정치인들이 이끄는 야권으로 재편되었다. 과거의 민주당, 자유당, 신민당, 무소속 등으로 제각기 소속을 달리했던 대선 후보자들이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는 군부 실세를 꺾기 위해 윤보선 야권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드디어 선거가 끝나고 양측은 숨 막히는 초접전의 개표과정에 숨을 죽여야 했다.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민정당 후보를 득표율 1.55%, 표 차 15만 6,026표라는 초박빙으로 이기고 당선되었다.
지난 3월 10일 실시한 20대 대선 때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의 최소 표 차이로 승부가 나기 이전까지는 1, 2위 후보 간 표차가 가장 적은 대통령 선거였다.
이들 후보자 간의 1, 2위 최소 득표율 차이는 59년이 흐른 지난 2022년 3월 10일 치러진 20대 대선 때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의 0.73% 차로 그 기록이 깨졌다. 1, 2위의 득표수 차이는 이번에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5·16 세력들은 1963년 대선과 직후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모두 승리하며 제3공화국을 출범시키게 된다.
5·16 군사정변은 지금의 시절, 일단의 권력지향적인 군부세력이 불법적 군사무력을 동원해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정변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태동한 군사정권은 향후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거치면서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시기는 분명 잃어버린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30여 년간 민주주의를 꽁꽁 묶은 암흑과 혼돈의 시절이었다.
5·16 군사정권의 현실 등장으로 군사 엘리트들이 국가 권력을 거머쥠으로써 이 사회 곳곳에 군사문화가 가치의 중심으로 놓이게 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군사문화를 이식함으로써 국민 의식을 왜곡하였고 따라서 민주화를 더디게 만들었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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