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어머니의 품이다

등산과 여행은 과거와 미래에서 지금으로 복귀하는 움직임이다

등산과 여행의 모든 것

이야기가 있는 산/산에서 읽는 역사

강천산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_ 삼인대와 중종반정의 연결 고리

장한림 2022. 5. 22. 11:46
반응형
728x170
SMALL

 

부러질지언정 휘어져서 굽힐 수는 없다

<강천산 - 삼인대와 중종 반정의 연결 고리를 찾아>

병풍바위 폭포

 

며칠 동안 무언가에 콱 막힌 느낌, 사방이 환하게 트였는데도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는 기분. 그럴 때면 그곳, 그 산에 올라 막힌 가슴을 뚫고 또다시 엮인 속세와의 고리를 잠시나마 단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 강천산에서 꽉 막힌 속을 말끔히 정리하기로 했다.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속속 기봉이 솟아있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고이 지닌 깊은 계곡과 계곡을 뒤덮은 울창한 수림을 이루는 강천산剛泉山은 1981년 전라북도 순창군 지정한 전국 최초의 군립공원이다. 가을 단풍이 특히 고운 강천산은 크게 자연보호지구, 자연환경지구, 취락지구, 집단시설지구로 나뉘어있다.

 

한 무더기 삶의 무게 담긴 봇짐 덜어놓고 왔다네.

우거진 수림 적시는 물소리에 아까워 남긴 짐마저

모두 풀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네.

풀잎처럼 가붓이 걸으며 이 산,

생의 한가운데인 양 옷깃 세우고

바람 한 점 없어 걸음 내딛지 못할 때라도

고요한 산사 풍경,

영혼의 맑은 소리

노상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

강천산 등산로 초입
 

 

 

물에 씻길 죄라면 애당초 단죄의 대상도 아니리라

단풍 빛깔과 햇빛, 물빛까지 모두 고운 날이다.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에 전국적 명소가 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지나 제1 강천호수를 끼고 순창으로 들어선다. 서울에서 비교적 일찍 출발했는데도 정오가 훨씬 지났다.

좁은 진입로엔 토속 특산물 행상인과 행락객들이 빼곡하게 길을 막고 있다. 살짝 거부감이 이는 행락객으로 치부되기 싫어 걸음을 빨리하여 번잡한 공간을 빠져나간다. 더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간 단풍과 엷게 홍조 머금은 주황 단풍들이 맑은 개울물에 숱 많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머리를 감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병풍바위는 폭포수를 끌어올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도선교와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병풍바위 작은 폭포에 얇은 망사 같은 물 자락이 흘러내리는데 눈을 떼지 않으면 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라 위로 타고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병풍바위의 큰 폭포는 높이 40m, 그 오른편의 작은 폭포는 30m의 높이로 인공 조성되었지만, 전혀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병풍바위 밑으로 지나가면 그동안 지은 죄도 깨끗이 씻어진다는 설이 있어 몇 번을 오가며 사진을 찍었지만 지은 죄가 커서일까. 지나면서도 거듭 죄를 짓는 느낌이다. 초입에 길게 늘어선 단풍나무 아래로 지은 죄를 씻어내고픈 맑은 계류가 흐른다.

 

“물에 씻길 거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죄라는 건 그 값을 치러서도 제대로 씻기는 게 아닐 것인즉 그저 속죄양처럼 지낼밖에. 이미 저 사는 곳에서 추락한 낙엽이 반기는 산길이다.

죄를 지었건, 공을 세웠건 역시 산은 차별 없는 자유의 터전이다. 가도 가도 길이 있어 아무 데건 발 내디디라 하니 풍요한 행복이다. 아무도 없어 한산한 길이나 살갑고 그리운 이 누구라도 거기 있으니 엄청난 축복이다.

늘어선 풀잎마다 맺힌 이슬 햇빛에 녹거나 붉다만 잎사귀 서둘러 떨어뜨려도 갈바람 땀 식혀주니 감미로운 희열이다. 그런 행복, 그런 희열을 마냥 느낄 수 있어 이산 곳곳마다 신선의 텃밭이다. 단풍 빛깔과 햇빛, 물빛까지도 모두 고운 화창한 계절,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을 밟노라면 가을은 이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또 낮게 숙여가고 있다.

강천산은 단풍 고운 지금뿐 아니라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와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이 산 계곡의 맑은 물을 찾아 인파가 몰려든다고 하니 소금강의 호칭을 듣기에 모자람이 없는 담양의 명소이다.

강천문을 지나 강천사 경내에 들어선다. 삼각 꼭짓점 선명한 신선봉이 우뚝하고 그 오른쪽으로 전망대가 보인다. 천연기념물로 보호 중인 느티나무는 굵은 가지들을 이리저리 휘감아 뻗어 잔가지들을 늘어뜨리고 있다.

붉은 초록 위로 신선봉과 팔각정 전망대가 아득하게 보인다

 

 

“살고자 하면 옳지 않음을 따지지 말고, 거듭나고자 하면 그르다고 판단되는 것에 맞서라.”

강천사 맞은편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의 삼인대三印臺라는 비碑가 세워져 있다. 1744년(영조 20년)에 세운 비인데 이 비각의 높이는 157cm이고 너비는 80cm이며 두께가 23cm라고 적혀있다.

여러 해에 걸쳐 보수하고 단청을 새로이 한 삼인대는 1978년에는 삼인대 비에 새긴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하여 비각 옆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1994년 지역주민과 후손들에 의해 삼인문화 선양회가 구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이곳에서 개최한다.

이곳에 삼인대가 세워진 유래를 알려면 좀 더 거슬러 올라 조선 10대 왕 연산군을 폐위하고 11대 중종이 즉위한 중종반정을 짚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9대 성종 때 중앙의 관리로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는 오랫동안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던 훈구파와 대립했다. 훈구파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더욱 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는데 두 번의 사화를 겪을 즈음 연산군은 점점 포악해져 갔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왕비이자 친어머니 윤 씨가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은 일을 문제 삼아 자신에게 비판적인 관리와 선비들을 모두 벌하거나 내쫓았다. 거기 더해 정사는 제쳐두고 술과 유희에 빠져들었으니 바야흐로 최고 유학 교육 기관인 성균관이 주색잡기의 장소로 변질되다시피 한 것이다.

 

“바로 지금이야. 더 이상 두고 볼 수도 없거니와 이 시기를 놓치면 대업을 망치게 될 거야.”

“동감입니다. 정현왕후를 만나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연산군 반대 세력의 중심에 있던 박원종과 성희안은 선왕인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동의를 얻어 1506년 9월 2일, 거사를 감행한다.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이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자 연산군의 반대 세력들은 연산군의 가까운 신하 임사홍과 신수근 등을 죽이고 반정을 일으켰다. 연산군이 뱃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 군사들을 동원해 궁궐을 장악하고는 연산군의 측근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연산군을 왕좌에서 끌어낸 뒤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왕좌에 앉혔으니 바로 중종이다. 역사에 중종반정이라 기록된 사건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후 반정공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섰으나 조선의 정치 상황이나 백성들의 생활이 더 나아진 건 없었다.

중종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진성대군은 성질 포악한 이복형 연산군의 짙은 그늘 밑에서 숨죽여 지냈는지라 정치나 권력에 하등 욕심이 없었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도 군사들이 집으로 몰려오자 진성대군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인, 올 것이 왔나 보구려. 형님께 목을 내줍시다.”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그러기 전에 하나만 확인해 보시지요.”

 

진성대군의 아내는 말머리가 집 쪽을 향하면 우리가 죽겠지만, 바깥을 향하고 있으면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니 말머리를 먼저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대군께서 이 나라를 다스려주셔야겠습니다.”

 

말머리가 바깥을 향해 있었고 곧 죽음이 닥칠 걸로 예견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희소식이 전해지는 것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왕좌에 오르게 되니 이때 중종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삼인대, 그렇게 해서 후세들에 의해 세워지다

강천산 구름다리

 

사람 팔자가 조선의 왕처럼 한나절만에 반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통나무로 만든 계단을 오른다. 울긋불긋 낙엽에 휘덮인 계단을 올라 물씬한 가을 정취에 젖어 걷다 보면 50m 높이, 길이 75m의 산악 현수교에 많은 이들이 건너가는 걸 보게 된다. 대다수 단풍 행락객이 이 구름다리를 건너 전망대로 향하는데 구름다리는 애초에 가고자 했던 길이 아니었기에 왕자봉을 향해 오른쪽 길을 택한다.

 

올라와서 아래로 보이는 구름다리가 아찔하게 느껴진다

 

SMALL

 

본격 등산로에 접어들자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자 구름다리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면서 정상인 왕자봉(해발 583.7m)에 도착하게 된다. 역시 자연은 위대하다. 홀로 산행, 먼 길이지만 한결 맘이 가벼워진다. 왕자봉에서 단전 깊숙하게 맑은 숨을 들이마시자 강천산 조망권이 모두 내집 앞마당처럼 느껴진다. 왕자봉, 이런 이름을 지닌 봉우리를 만났기에 조선의 왕자와 왕의 엄청난 차이를 가늠하게 되나 보다.

조선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왕자 혹은 대군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는 역사 흐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조선조 폭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은 지금까지도 군이란 칭호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서도 왕릉이 아닌 묘에 묻혀있다.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그의 무덤을 후세 사람들은 연산군 묘라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중종은 어엿한 임금으로 1506년부터 1544년까지 39년간 재위하였고 사후에는 왕릉이란 명칭의 묏자리에 안장된다.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의 주소지에 선정릉이 있다.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과 바로 옆에 부모인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이 함께 있으니 얼마나 다복한 영혼인가.

 

왕자봉에서 조선의 한 페이지를 더듬다가 여름에 비해 스산한 산죽나무 오솔길을 벗어나자 바로 깃대봉이다. 왕자봉에 왕자가 없듯 깃대봉에도 깃대가 없다. 깃대봉 삼거리 부근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지 못한 봉우리들에 눈길만 던진다.

전북 순창과 도계를 이루는 전남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죽세공품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울창한 대나무 숲인 죽녹원에 가면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죽풍이 청량감을 불어넣어 주는데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등 죽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총 2.2km의 산책로에서 대나무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꼿꼿함의 상징,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절의의 표상처럼 대나무는 인식되어 왔던 것 같다.

하산 길의 단풍

 

중종반정에 성공하자 공신들은 왕비인 단경왕후 신 씨를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출하고 장경왕후 윤 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는 익창 부원군 신수근의 딸이었는데 아버지가 중종반정 때 동조하지 않아 처형되면서 반정 이후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어 영돈녕 부사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인 것이다.

아들 인종을 낳고 10년이 지나 장경왕후가 죽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 담양 부사인 박상과 무안 현감 유옥은 관직으로부터의 추방과 죽음을 각오하고 폐출되었던 단경왕후의 복위 상소를 올리면서 소나무 가지에 직인職印을 걸었다. 그 뒤 이곳에 비각을 건립하고 삼인대라 하게 된 것이다. 

병풍바위 폭포 너머로 노을이 다

 

살고자 하면 옳지 않음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권력에 동조하라. 이런 사고와 정반대의 신념으로 거듭나거나 혹은 죽기를 각오한 세 사람의 이름을 되새기게 한 강천산행이었다. 담양으로 가는 버스에서 뒤돌아보니 고운 한복으로 단장한 여인이 노을 속에서 배웅한다. 강천산의 마지막 모습은 죽거나 살거나의 갈림길에서 날 선 이들의 결의에 찬 실루엣이 아니라 수줍음 띤 조선 여인의 아리따운 자태였다.

 

 

때 / 가을

곳 / 강천산 매표소 - 금강문 - 병풍바위 - 강천사 - 현수교 - 왕자봉 - 깃대봉 - 병풍바위 – 원점회귀

 

 

 

https://www.youtube.com/watch?v=i23a1qwvrd0 

 

 

https://www.youtube.com/watch?v=-U9ohgVGcIw 

 

반응형
그리드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