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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_ 강감찬 장군의 생가, 낙성대

장한림 2022. 5. 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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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역사를 읽다

얼마 전 갤럽은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 생활 중 으뜸이 등산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주말이나 휴일, 도봉산 역이나 수락산 역에 내리면 그 결과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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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거란을 물리친 고려 영웅

<관악산 - 강감찬 장군의 생가, 낙성대>

 

경기 5악岳에 드는 관악산은 서울 남부의 관악구, 금천구와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 의왕시, 군포시 등을 가르며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다.

왼편에 좌청룡의 형국인 청계산(옛 명칭 : 청룡산)과 오른편에 수리산(옛 명칭 : 백호산)이 우백호로 자리하고 있어 지역 사령관으로서의 면모 또한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빌딩과 대단지 아파트가 내려다보이는 관악산은 서울대학교를 품고 있어 서울대 입구에 많은 등산객이 몰리고 사당동과 과천, 안양에서도 많은 이들이 속속 연주대로 향한다.

도심 속의 숲, 관악산의 숱한 갈림길 중 오늘은 바윗길 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6봉을 택했다.

 

촛대바위
 

 

“전하! 한양은 관악산 때문에 큰 위험을 겪을 수 있는 곳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대사께서 방도를 찾아주시오.”

조선 개국 후 한양 천도를 할 때 무학대사는 관악산에 화산의 기가 있으므로 그 화기를 누르고자 광화문에 해태 석상을 세워 제왕의 터전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 세조의 왕위 찬탈 등으로 경복궁은 거듭 화마에 휩싸인다.

과연 이걸 관악산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관악산은 거기 그 자리에서 그들의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싸움에도 고개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냄새 맡고 있을 뿐이었는데.

차라리 무학대사가 풍수지리학 이상의 식견이 있어서 한양이나 궁궐만의 위기의식을 초월한 범국가적 안목을 지녔다면 임진왜란이나 을사늑약 등의 수난을 피해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고인다.

육봉 코스의 4봉

 

관악산 곳곳에 물동이를 묻어 만일의 화재 사태에 대비토록 수선을 피웠으나 관악산에 화기가 있다는 무학의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다. 관악산에서의 화기란 불타오르는 가을 단풍과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의 석화성石火星 산세, 그뿐이다.

6봉 능선에서 경기 5악, 관악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정부 과천청사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이어진 길, 관악산을 오르는 진입로 직전의 대로는 은행나무 가로수와 떨어진 은행잎으로 온통 노랑 물결이다. 넓은 아스팔트대로이지만 가을 되어 노랗게 은행잎 물들고 또 나뭇잎 떨어지면 이 길은 낭만 가득한 산책로가 된다.

여기서 중앙공무원연수원과 기술표준원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초소와 안내판이 보이는데 이 길이 관악산 오르는 많은 들머리 중 한 곳이다. 문원폭포 쪽으로 걸으면서 올려다본 3봉은 언제 봐도 위풍당당하다.

바윗길과 작은 협곡을 지나 문원폭포 직전 널따란 마당바위에서 연주대 방향이 아닌 좌측으로 6봉 가는 길이 있다. 지난주부터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시나브로 산 아래로 낙하하는 중이다.

관악산 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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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도는 높은 편이지만 고소공포증 없고 등산화 밑창만 닳지 않았다면 바위 릿지를 만끽할 수 있는 명품 코스이다. 두 손, 두 발을 바위에 밀착하여 슬랩 구간을 기어올라 봉우리를 건너며 능선을 지날수록 골산으로서의 명산 요소를 두루 갖춘 관악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뾰족 침봉들과 급준 경사면의 바위벽들이 처음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도 하지만 몇 번 다니다 보면 6봉은 능선 그 자체가 친숙하고 익숙한 길이 된다.

바위틈 소나무들이 몸을 비틀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미 오랜 세월 이들은 한 식구 한 몸이 되어 살았다. 매끄러운 바위마다 사람들의 손자국이 묻어나고 그 자국들은 다시 짜릿한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여섯 봉우리 버겁게 올라 보이는 것마다 천국

굽이굽이 돌고 돌아 불꽃바위 대할 때마다 환희

단풍 물들다 아예 불이 난갑다

봉우리마다 바위마다 향내 가득

 

과천 시내 아파트 단지와 정부청사 건물을 내려다보게 되고 수원 광교산에서 백운산을 지나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마다 무척 가깝게 잡힌다. 송신탑과 기상 레이더들이 솟은 정상 일대까지 울긋불긋 가을 색이 넘실댄다.

 

과천 너머 청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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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영의 부크크 커뮤니티

장순영은 이러한 책들을 집필, 발행하였습니다. <장편 소설>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야베스,2004년) 대통령의 여자 1, 2권(중명출판사, 2007년) 아수라의 칼 1, 2, 3권(도서출판 발칙한 상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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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들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국내 명산의 중요 혈점穴占에 쇠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정기가 모이는 자리에 쇠말뚝을 박음으로써 산의 맥을 끊어버리고자 한 것이었는데 여기 관악산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 국민의 풍수에 관한 믿음은 예로부터 강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고장 진산의 정기를 받아 출중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독립운동가들이 생긴 거라는 믿음을 일본인들이 역이용했을 것이다.

정기가 솟는 혈에 쇠말뚝을 박아 그 기를 없애고 맥을 끊어 조선인들의 심리를 위축시키려 했음이다. 조선인들에게는 일종의 신앙인 풍수로 그들의 기를 죽여야 한다는 실제 자료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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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정상 일대

 

능선을 지나 국기봉에서 한숨 돌리고 정상인 연주대 쪽으로 가며 만나는 촛대바위가 언제나처럼 반갑다. 촛대바위라고도 하고 불꽃바위라고도 부르는데 명칭이 어떠하든 보고 또 봐도 개성 뚜렷하고 잘생긴 바위다.

촛대바위를 지나서도 낙타바위 등 들쭉날쭉 솟은 다양한 바위들을 보면 혈이나 맥을 떠나 쇠말뚝은 그저 자연스러움에 대한 파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 놓여야 할 위치에서 제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연함을 인위적으로 파손하는 일은 그 어떤 이유로도 있어서는 안 된다.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에는 늘상의 주말처럼 등산객들로 붐빈다. 여기 오게 되면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미수 허목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보다 한참 뒤인 영조, 정조 때 재상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은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에서 그를 언급하며 존경심을 표한다.

 

“허목 선생은 83세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그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사람들이 그를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었다. 저 관악산은 경기지역의 신령한 산으로 선현들이 일찍부터 유람한 곳이다. 그래서 나도 한번 이 산에 올라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틔우고 선현을 태산처럼 사모하여 우러르는 마음을 기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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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바위

 

이 기록은 채제공이 67세 때인 1786년 4월 13일 하루에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던 걸 기록한 기행문의 구절이다. 채제공 선생도 팔순을 넘기셨으니 등산이 장수에도 도움 주는 건 만고의 진리인가 보다. 허목 선생을 떠올리니 하산하는 걸음걸이가 가벼워진다. 오늘은 낙성대를 하산 날머리로 잡았다.

칠순의 나이에 귀주대첩의 대승을 이끌어내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고려의 전쟁영웅이자 명신 인헌공 강감찬이 탄생했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관악산 아래에 있는 낙성대이다. 그가 태어나던 날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 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던 거란은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 군사를 앞세워 3차 침공을 단행한다.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서 고려는 강감찬 장군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강감찬 장군은 문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무예 솜씨까지 훌륭해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는데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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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안국사 ​
 

“구할 수 있을 만큼 소가죽을 구해오너라.”

20만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출동한 강감찬이 소가죽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구해온 소가죽을 꿰어 서로 이어 붙이게 하고는 강가 곳곳에 나무 말뚝을 박고 이어 붙인 소가죽으로 흥화진의 강물을 막은 것이다. 흥화진에 도착한 소배압의 군대가 건너기 시작하면서 강은 금세 거란의 군사들로 메우다시피 했다.

 

“이때다. 소가죽을 찢어라.”

 

소가죽을 찢자 막혀 있던 강물이 쏟아지면서 순식간에 거란군을 덮쳤다. 거란 군사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이용해 고려군은 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투로 거란군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기세가 오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비록 첫 전투에서 패했지만 고려 도읍을 빼앗으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고려군의 기습 작전에 당한 소배압은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개경으로 향한다. 흥화진에서의 패배를 개경 점령으로 만회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소배압의 생각을 읽은 강감찬 장군은 미리 개경으로 군사를 보냈다.

그러자 고려 8대 왕 현종은 들판의 곡식을 모두 없애도록 하고 백성들을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거란군이 먹을 양식을 모조리 없애 궁지에 몰아넣기로 한 것이다.

거란의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싸울 의지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소배압은 개경 침략을 포기하고 자기 나라로 회군했다.

 

“올 땐 네 놈들 마음대로 왔어도 갈 땐 내 허락 없이는 안된다.”

소배압이 철군할 것을 예견한 강감찬 장군은 끝까지 추격하여 다시는 고려 침략의 야욕을 품지 못하도록 작정했다.

 

“정 그렇다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마침내 거란군과 고려군은 옛 발해 땅인 귀주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된다. 거란군도 많이 위축되었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으로써 긴 시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날씨 변화를 철저히 예상하고 일부러 남쪽에 진을 친 고려군은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적진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북풍을 타고 더 멀리, 힘을 받아 날아갈 수 있었으나 거란군의 화살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고 고려군 진영에조차 미치지 못했다. 비까지 쏟아져 시야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고려군의 화살 공격을 받은 거란군은 또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낙성대 안국사 내부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강감찬 장군의 추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소배압을 비롯해 수천 명에 불과했다. 당시의 거란으로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다.

바로 이 전투, 귀주대첩으로 말미암아 거란은 고려 침략을 포기하고 양국은 화친을 맺게 된다.

귀주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강감찬 장군은 유비무환, 더욱 철저히 적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감찬의 제안을 받아들여 현종은 개경 주변에 이중 성곽의 나성을 쌓을 것을 지시하였고 압록강 하구부터 동해안까지 약 천리에 달하는 성을 쌓게끔 하였다. 이 천리장성은 무려 12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시켰다. 천리장성으로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었고 북방 민족에 의해 고려의 풍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귀주대첩 후 강감찬은 최고 벼슬인 문하시중까지 오른다. 1031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후세에 귀감이 되는 위대한 인물로 역사를 장식하게 된다.

오랜만에 들러본 낙성대를 나오면서 강감찬 장군의 많은 일화 중 하나가 떠오른다. 일찍 급제하여 스무 살의 나이에 고을 원님이 된 강감찬의 아랫사람들은 원님이 어리다는 이유로 가벼이 보았다. 그러자 강감찬은 그들을 불러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수수 줄기를 소매 속에 넣을 수 있겠느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요.”

아랫사람들이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자 강감찬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

 

 

때 / 가을

곳 / 정부과천청사역 - 문원폭포 - 6봉 능선 - 국기봉 - 연주대 - 연주암 - 관악사지 - 사당 능선 – 낙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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