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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_ 천년 세월의 애증

장한림 2022. 5.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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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역사를 읽다

얼마 전 갤럽은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 생활 중 으뜸이 등산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주말이나 휴일, 도봉산 역이나 수락산 역에 내리면 그 결과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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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천년 고도, 서라벌의 선명한 발자취

<경주 남산 - 천년 세월의 애증>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즉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솟은 경주 남산慶州南山은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 고위산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자락과 계곡 전체를 통칭한다.

경주 국립공원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적형 공원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한 불교문화의 보고寶庫인 토함산과 남산을 포함하여 8개 지구 136.55㎢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이다. 1968년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바 있다.

 

‘절들은 총총하여 밤하늘의 별들 같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늘어섰다.’

 

삼국유사에서 옛 경주, 서라벌을 언급한 것처럼 불교 유적이 즐비한데 지금까지도 국보 12점, 보물 27점, 사적 9개소, 지방문화재 22건 등 총 68건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옛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 학습장이라 하겠다.

경주는 발 닿는 곳마다 불교문화가 짙게 밴 문화유적 도시임을 실감케 한다

 

 

경주 국립공원에 속해 동서 약 9km, 남북으로 14km 가량 뻗어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분포된 남산 일원은 지붕 없는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관광특구로 지정된 경주시는 잘 다듬은 관광 기반 시설로 해마다 2000여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유적뿐 아니라 자연경관도 뛰어나 변화무쌍한 계곡이 널려있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이루어 남산에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자연미와 더불어 신라의 유구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을 예술로 승화한 곳이 바로 남산임을 강조한 것이다.

서라벌에 드리우는 침울한 그림자

상서장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로 되돌아와 제일 먼저 상서장에 내리게 된다.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 국립 박물관을 관람하고 인근 왕정골의 화랑 대로변 안쪽으로 자리한 기와 가옥 상서장上書莊을 남산의 들머리로 잡아 탐방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신라의 계림은 낙엽이 지고, 고려 송악에는 솔이 푸르다.”

 

최치원은 고려 태조 왕건의 인격을 흠모하여 이런 글을 올렸다. 고려 8대 왕 현종은 최치원이 고려 건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음을 높이 평가하여 문창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공자묘孔子廟에 그의 위패를 모시게 하였다.

이때부터 최치원이 살던 집을 상서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태조에게 글을 올린上書 집이라는 뜻이다. 그 후 무너졌던 건물을 후손들이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신라에 깊이 뿌리내린 신분제도 때문에 최치원은 누구보다 개혁을 열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당대의 천재가 골품제도 때문에 뜻을 펼칠 수 없었으니 왕건이든 견훤이든 나라를 뒤집어주길 바랐을까.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그가 당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마음껏 포부를 펼쳐보지 못하다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유람하며 말년을 보냈다.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 말 3대 문장가에 속하는 최치원은 계원필경과 토황소격문 외에도 수많은 글을 집필하여 후세의 역사가들이 관심을 두고 연구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두 채의 기와 가옥 사이로 올라 통행 계측기를 통과해 비탈지지 않은 숲길을 걸으면서 언뜻 옛 신라의 천년고도를 걷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삼화령 갈림길을 지나고 절골 입구 갈림길을 다시 지나 경주 남산성이란 팻말이 있는 곳에서 두리번거려보지만, 성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남산은 남쪽의 고위산(해발 494m)과 북쪽에 있는 금오산(해발 468m)을 중심으로 남북의 길이 약 8km, 동서의 폭 4km 정도의 아담한 신세를 지고 있지만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어 곳곳마다 사람들이 올라오는 걸 볼 수 있다.

경주를 내려다보는 소나무가 튼실하고도 품위 있는 모습이다
 

 

탑골 갈림길을 지나 경주 최고의 전망대라는 해목령蟹目嶺(해발 280m)을 들러본다. 곱게 자란 소나무와 바위들이 많은 평평한 암릉 지대이다. 꽃게 눈을 닮은 바위가 있어 해목령이라 부른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56대 왕이자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이곳 해목령에서 장사 지냈다고 적고 있다. 선왕인 경애왕에 이어 삼국시대를 피눈물로 마감했던 경순왕과 그의 장남 마의태자의 불행을 떠올리자 시야에 가득 들어온 서라벌에 잠시 침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화무십일홍이요, 일장춘몽이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려했던 왕국일수록 그 끝은 침통하고 서글픈 종말을 맞이했던 것 같다. 해목령을 내려오는데 다시 산 아래로 조망이 트이면서 포석골이 나타나고 그 계곡에 있는 포석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성남 이궁城南離宮터라고도 일컫는 포석정지鮑石亭址는 개울가에 솟은 바위에 판 홈으로 물을 흐르게 하여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주고받게 했던 왕과 귀족들의 별궁 놀이터로 사적 1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 끝났어. 신라도, 그대도.”

 

신라 말 혼란기에 즉위한 55대 경애왕은 고려와 결탁하여 후백제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이를 눈치챈 견훤의 침공으로 신라는 몰락하게 된다.

 

“목숨을 끊는 게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보다 나을 거요.”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다가 사로잡힌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로 인해 이곳에서 자결하였다. 여기서 신라의 시작과 종말을 동시에 내려다보며 찬찬히 역사의 순환을 새겨보게 된다. 저 아래 탑동에 신라 시조 거서간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蘿井이 있고 또 신라의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가까이 있어서이다.

이명처럼 들리는 마의태자의 통곡을 떨쳐내고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뒷산 산책로처럼 아늑한 길을 오르자 금오산이 눈에 들어온다. 포석정으로 내려가는 길을 우측에 두고 곧바로 진행하여 납작한 박석으로 치장한 통일전 갈림길을 지난다.

남산동 칠불암 길에 설립한 통일전에는 태종 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삼국통일의 격전을 보여주는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자는 뜻으로 건립되어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이념교육장 형태로 이용되고 있다.

 

금오산 녹음 가슴 깊이

햇살처럼 번지니

향수에 젖어 고향 그리는 시

푸른 그림자 번진 저 하늘에 쓰리라

 

떠나는 이 애달파하다

미처 못 한 이야기

타는 가슴 누르는 애절한 시

진홍 립스틱 찍어 물드는 노을 위에 쓰리라

 

어느덧 계절 바뀌어

국사골에 알록달록 단풍 들면

낙엽 부스러지는 슬픈 시

애잔한 맘 찬찬히 문지르며

흐르는 계류 은빛 여울 위에 쓰리라

 

그리움 다시 새겨 짙은 감성

눈물 흐를 듯 설운 바이브레이션

그렇게 갈잎 노래 부르리라

국사 바위와 상사바위

금오정 갈림길에서 진행 방향을 잠시 멈춰두고 금오정을 들러보기로 한다. 150m 외떨어진 금오정은 수더분한 암릉을 지나 세워져 있다. 금오산이 더욱 가깝게 보이고 산 밑으로 정비가 잘 된 태평들과 통일전이 보인다. 다시 갈림길로 내려서서 소나무와 활엽수가 마구 어우러진 넓은 숲길을 걸어 상사바위의 설화를 듣게 된다.

남산 국사골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는 귀도 어둡고 눈도 침침했는데 마을 아이들을 친손자처럼 귀여워했고 그중 피리라는 소녀는 할아버지를 친할아버지처럼 따랐다. 꽃다운 처녀가 된 피리가 다른 마을로 이사하자 할아버지는 온통 피리 생각뿐이었다.

 

“아아~ 이건 아니구먼.”

 

손녀가 아닌 여인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국사골 큰 바위에서 뛰어내리고 만다. 그 뒤로 피리는 할아버지가 뱀이 되어 자신의 몸속을 파고드는 꿈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무리 너를 잊으려 해도 그러지 못해 목숨을 끊었는데 죽어서까지 괴롭히는 나를 용서해다오.”

 

자신으로 인해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가 측은해 꿈속의 할아버지를 따라가니 할아버지가 죽은 국사골 큰 바위에 이르는 것이었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사랑은 천년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릴게요”

 

바위에서 뛰어내린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치솟았다. 사람들은 그 두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고 큰 바위 아래의 붉은 반점을 피리의 핏자국이라 여겨 상사바위의 설화를 더욱 애틋하고 극적으로 구성한다.

피리가 목숨을 너무 가벼이 여긴 거란 생각이 들자 그 시절의 어려운 생활상까지 급조된 상상이 이어지게 된다.

애절하게 치장된 상사바위의 몸집이 상당히 크다

 

이 상사바위의 뒤편을 보면 두 개의 남근석이 경주를 향해 세워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랑 이야기로 각색된 설화는 결국 혼인과 출산을 중요시했던 농경사회에서 신분, 나이, 부역 등으로 혼인적령을 놓친 이들이 소원을 빌었던 장소로 추정된다.

높이 13m, 길이 25m가량의 커다란 상사바위에서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상사바위에서 봉화대봉과 고위산을 바라보다가 내려서서 팔각정 갈림길을 지나 헬기장에 이르자 많은 이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커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금오산 갈림길까지 걸어 우측으로 난 데크를 지나 삼릉골 갈림길에 이르렀다.

신라 8대 왕인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세 능이 있어 삼릉(사적 제219호)이라 하는데 시대를 달리하는 이 세 왕이 한곳에 누워있는지는 기록이 확실치 않다. 이 삼릉골에는 9곳의 절터와 10체의 불상이 남아있다고 한다.

 

금오산 정상

 

삼릉골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오산金鰲山(해발 468m)에 도착했다. 남산은 금오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삼국시대에 전래한 불교가 신라 때 크게 융성하면서 이 일대는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조형물과 조각품이 곳곳에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불교 유물과 유적은 하늘을 향해 솟은 산을 경배하는 숭산崇山 신앙과 암석을 종교적 대상물로 여기는 암석 신앙을 바탕으로 조성되었다. 마치 불국토의 중심에 자리한 수미산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산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문화유적의 탐방

바위 곳곳에 불교문화를 새겨 놓아 불교 흔적을 강하게 각인시켜 준다

 

길게 새갓골 방향을 잡아 내려섰다가 용장사지에서 걸음을 멈춘다. 남산에서 가장 깊고 넓은 계곡인 용장골茸長谷은 경관이 수려하여 만물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적으로 18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름이 전하는 곳은 용장사 한 곳뿐이다.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자 금서禁書였던 금오신화를 저술한 곳이 용장사라는 게 유력한 설로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 목 없는 석조 약사여래 좌상(보물 제187호)을 보게 된다. 부드럽고 유려하게 선을 흘러내린 조각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삼륜 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으며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뛰어난 작품으로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머리가 없어 승형僧形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용장사의 보살형 미륵부처인 미륵 장육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용장사의 대현 스님이 이 미륵 장육상을 돌며 기도할 때 이 미륵부처도 대현 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용장사지에서 통일전 주차장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하다 비파골에 이르러서도 전설 한 편을 듣게 된다. 신라 32대 효소왕이 남산 망덕사 낙성식에 친히 행차하여 재齊를 올리는데 이때 행색이 누추한 중이 왕에게 나서 청한다.

“소승도 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효소왕이 마지못해 답하였다.

 

“저기 말석에서 고분하게 지켜보아라.”

재가 끝나고 왕이 중을 불러 조롱하듯 일렀다.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예,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

“돌아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왕이 친히 불공을 드리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거라.”

“예, 잘 알았습니다. 왕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 석가를 만났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스님은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바위 위로 날아가 버렸다. 효소왕의 명에 따라 신하들이 사라진 스님을 찾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비파 바위 안에 지팡이와 바릿대만 보일 뿐 스님은 바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서기 692년 효소왕은 하는 수없이 비파 바위 아래에 석가사를 지어 사죄하고, 숨어버린 바위에 불무사를 지어 사라진 부처님을 공양하였다. 지금도 비파골에 석가 사지와 불 무가지가 남아있어 진신 석가가 현신했던 전설을 받쳐준다.

참으로 대단한 남산이 아닐 수 없다. 그리 크지도 않은 산에 가는 곳마다 스토리텔링이 이어진다. 삼화령三花嶺에 이르러서도 타임머신은 1500년 전의 신라에 머물러 있다.

 

평화로운 농촌 마을을 내려다본다 ​
 

 

남산의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하는데 신라 시대의 화랑이 기예를 닦던 장소이자 미륵 사상이 융성했던 곳으로 미륵의 성지였음을 밝혀주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경주 남산성 부근에서 삼화령과 관련된 석불 3존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삼화령 안내판 위에 있는 지름 2m가량의 바위에는 연꽃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선덕여왕 시절 생의라는 승려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내가 이곳에 묻혀있으니 나를 파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 주시오.”라고 하여 그곳에 가보았더니 꿈속에서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 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미륵은 간데없고 바위만 남은 지금의 연화 대좌蓮華臺座를 말함이다.

 

고위봉에서의 조망

 

다시 내려와 고위봉 일대를 둘러보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통일전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천룡사지 갈림길에서 오른쪽 숲길로 접어들어 이영재라고 이정표가 세워진 고개에 다다른다. 이영재에서 바윗길과 소나무 우거진 숲길을 번갈아 올라 바위 봉우리 393m 봉에서 지나온 금오산과 능선을 바라본다. 옛이야기들이 속속 담겨있는 그 길에서 신라인들의 영남 사투리가 들리는듯하다.

 

암벽의 바람재 능선이 눈길을 끌어당긴다

 

고위산 정상

 

나무숲 사이로 드러난 암벽지대인 바람재 능선을 바라보며 고위산 갈림길에 이르자 800m 거리의 고위산(해발 495m)으로 급하게 치고 올라선다.

경주 남산에 있는 유적은 대다수가 보물이지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박사는 경주 남산의 7대 보물로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삼릉계 선각 여래좌상, 삼릉계 석불좌상, 삼릉계 마애 석가여래좌상, 용장사곡 삼층석탑,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칠불암 마애삼존불 좌상을 꼽았다.

왼쪽 바위 절벽 아래로 그중 두 개의 보물인 신선암 마애불과 마애삼존불 좌상(국보 제312호)이 있는 칠불암이 보여 걸음을 멈춰 서게 된다.

신선암 마애불과 마애삼존불 좌상

 

여러 기암을 보며 봉화대와 좁혀간다. 다가가면 소나무에 봉화대봉(해발 473m)이라는 명판이 걸려있다. 우거진 잡목 숲을 헤쳐 돌을 쌓아 올린 봉화대 흔적을 확인하고 바람재 능선 입구에 닿았는데 휴식년제로 길을 막아놓았다.

문화유적 탐방로를 따라 내려가자 열암곡 석불좌상이 의젓하게 앉아있다. 보물 따라, 전설 따라, 천년 신라를 따라 유람하듯 탐방한 14km여 거리의 남산 종주는 새갓골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끝을 맺는다. 경주 남산은 산행보다 유적지 탐방로라고 보는 게 적절할 듯하다.

 

전망 좋은 자리에서 천년 고도를 살피는듯하다

 

“천년의 역사를 한나절 탐방으로 익힐 수가 있겠는가.”

수많은 들머리를 섭렵해야 이 산의 참모습을 느끼고 신라 역사를 더 깨닫게 될 거란 생각이 든다. 동시에 머지않은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때 / 초여름

곳 / 경주 국립박물관 - 상서장 - 절골 갈림길 - 탑골 갈림길 - 해목령 - 포석정 갈림길 - 금오정 - 상사바위 - 금오산 - 용장사지 갈림길 - 삼화령 - 연화 대좌 - 통일전 갈림길 - 이영재 - 신선암 마애불 갈림길 - 봉화대 - 열암곡 석불좌상 - 새갓골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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