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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_ 인조의 패배를 교훈 삼은 숙종의 국방력 강화

장한림 2022. 5. 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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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처절한 상흔을 딛고

<마니산 - 인조의 패배를 교훈 삼은 숙종의 국방력 강화>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소재한 약 15개 섬 중 주도主島이다.

강화대교와 신강화대교에 이어 초지대교의 연륙교로 이어져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섬 진입이 더욱 수월해졌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을 행정 주소로 하는 강화도에는 마니산 외에도 진강산, 고려산, 혈구산, 별립산 등 400m대의 산들이 있다.

강화군 화도면에 소재한 마니산은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본래 고가도라는 섬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는데, 강화도의 가릉포와 고가도의 선두포를 둑으로 연결하면서 강화도와 한 섬이 되었다고 한다. 위치상 한반도의 중앙인 마니산으로부터 한라산과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고 한다. 1977년에 국민 관광지로 지정된 바 있다.

강화도의 고인돌 유적은 전남 화순, 전북 고창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고려 때 몽골군과 맞섰던 삼별초 항쟁, 조선시대 병자호란과 구한말 서구 열강의 빈번한 외침에 맞서 고군분투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수난이 거듭되는 역사의 현장이자 돈대의 섬, 이젠 적의 침략에 마냥 당하지 않으리

조선시대 말엽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역사적 사건들이 강화도에서 일어났다. 천주교 박해를 구실 삼아 프랑스가 침범한 병인양요,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를 빌미로 미국이 침범한 신미양요로 강화도는 서구 열강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프랑스는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왕조의 의궤와 고서를 약탈했고, 미국은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인 수자기帥字旗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훗날, 되돌려 받기는 했지만 숨겨진 이면에는 서글프고 처참한 조선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조일 수호 조규, 병자 수호조약이라고도 하는 강화도조약은 고종 13년인 1876년 2월, 일본의 군사적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일본은 구미 제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산항에서 함포 위협 시위를 벌이고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유발하였는데 결국 이를 빌미 삼아 전문 12조의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조선은 부산과 원산과 인천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하여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범죄가 발생한 경우 일본 법에 따라 처벌하며 조선의 연안 측량을 자유롭게 하여 일본 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바윗길은 군데군데 살얼음이 얼어 미끄럽다.

 

오늘은 마니산을 보다 길게 걷는 코스를 잡아 화도면 동막리의 분오리 돈대 주차장으로 왔다. 주차장 곁에 분오리 어판장 버스정류장이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어렵지 않다.

돈대墩臺란 평지보다 높은 곳에 보루처럼 축조한 일종의 성곽시설로 적을 감시하고 연기를 피워 통신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다. 주로 적이 침입하기 쉬운 요충지에 설치하여 포를 쏘거나 사방을 정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보통 돈대 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擁壁으로 받쳤다.

강화도에는 해안 중심으로 5진 7보 53 돈대의 군사시설 흔적이 남아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가슴에 새겼던 조선 효종이 북벌 계획의 하나로 설치하기 시작해 숙종 때 이르러 완성한 것이다.

마니산에 들어서기 전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인 분오리 돈대에 올라 본다. 조선 숙종 때 설치한 외곽 포대로서 다른 돈대들이 진이나 보에 속했던 것과 달리 분오리 돈대는 강화 군영에서 돈장을 별도로 설치하여 지키게 할 만큼 중요한 돈대였다고 한다.

강화도의 대다수 돈대가 사각형이거나 원형인데 반해 분오리 돈대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조해서인지 초승달 모양이다. 이처럼 강화도가 점차 요새화 되기 시작한 건 병자호란을 겪으면서였다.

병자호란으로 나라 곳곳이 전쟁의 와중에 휩싸였던 1637년 2월, 청나라의 도르곤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응전했으나 패배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는데 이를 강화도 방어전이라고도 부른다.

강화도 방어전에서의 패전으로 강화도로 가려던 인조의 피난 행렬이 막혀버리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는데 결국 성안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청나라군에 대항하여 남한산성에서 근근이 버티던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치르며 역시 청군에게 무릎 꿇고 항복을 고하게 된다.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중국을 차지하게 된다.

능선에 닿아 봉우리 여럿을 거쳐야 정상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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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 강화도를 한강 어귀의 요새로 만들고 해안경비를 강화하고자 1679년 숙종 때 이곳 분오리 돈대 외에도 화도돈대, 갑곶돈대, 망월돈대, 망양 돈대, 선수 돈대 등 48개의 돈대를 축조하고 강화하였다. 48 돈대는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의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채석 및 운반 등 준비기간을 포함해 6개월에 걸쳐 축조했다고 한다.

한기를 거둬들이지 않고 내내 망설이던 겨울이 막 물러서려는 계절의 문턱에서 한껏 바람을 들이마시고 내려다보니 널따란 개펄 너머 수면 위로 신도, 시도, 모도가 나란히 떠 있고 동막 해변은 냉기 가득하여 적막하기까지 하다.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와 좁은 등산로를 찾아 축축한 낙엽을 밟으면서 마니산을 오른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등산로에 잔설이 남아있고 헐벗은 나목들 가지 틈으로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걷다 보니 469m 봉과 참성단이 눈에 들어온다. 다소 험한 바위 구간을 우회하여 나무계단이 설치된 삼거리에 이른다. 700m 아래로 정수사가 있고 오른쪽 아래 1.8km 떨어진 함허동천을 통해 올라올 수 있는 지점이다.

보석처럼 귀히 여긴 계절

아쉬움 고이고 아련한 미련

앙금처럼 남았지만

안타까움이든, 그리움이든,

고뇌의 후유증일지라도

하얗게 포장해서 어딘가에

훌훌 털어내야만 하나보다.

인자요산이라 했으나 어질지 못해

산에 뿌리지 못하고

지자요수라 했으나 도통 슬기롭지 않아

바다에 와서도 흘려보내지 못하니

둥둥 가슴 떠돌던 포장

매듭 풀어져 다시 굳어지려나.

산 아래로 석모도 해명산과 오른쪽으로 별립산, 고려산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

함허동천은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가 정수사를 중수하고 여기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인 함허를 따서 붙인 명칭이다. 계곡의 바위에 기화가 썼다는 함허동천涵虛洞天이란 글자가 남아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뤄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계곡 아래에는 사계절 관광지로 잘 알려진 함허동천 야영장이 자리 잡아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469m 봉에서 보는 참성단에도 희끗희끗하게 겨울 흔적이 남아있다. 능선을 걸어 참성단 중수비 앞에 선다. 참성단 개축 사실을 기록한 비문은 1717년인 조선 숙종 43년에 중수했다는 걸 확인시킨다.

참성단

 

숙종은 14세에 즉위하여 46년간 재위한 조선 19대 왕이다. 재위 기간 중 국방과 영토문제에 특히 심혈을 기울인 왕이다. 이곳의 돈대뿐 아니라 김포에 문수산성을 쌓게 하였고 양주의 홍복산성을 축조토록 하였으며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축조와 보수에도 직접 관여였으니 얼마나 국가방위체제에 노심초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왕권 강화를 위한 환국 통치,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한 이른바 ‘삼복의 변’, 후사를 위해 세 번째 얻은 왕비 장희빈으로 압축되는 숙종의 세심하고 다양한 이미지가 비문을 읽으면서 성큼 엿보인다.

참성단 중수비를 거쳐 마니산 표지목이 있는 일명 표지목봉(해발 472.1m)에서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을 눈에 담는다. 곧 진달래가 만발할 고려산과 혈구산, 진강산까지 더듬어본다. 김포 쪽으로 오목하게 솟은 봉우리는 문수산이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참성단塹星壇(사적 제136호)인데 봄과 가을에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전국 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되며 매년 개천절에 단군에게 제를 올린다.

단의 아랫부분인 기단基壇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되어있다. 이 단의 축조 연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확실치 않으나 대략 4000년이 넘는 유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그 위치나 구조로 보아 천문대나 기상대와 비슷하여서 후세에 와서 이러한 용도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권근의 ‘양촌집’에 태조 왕건 이전부터 단군에 제를 올렸다는 구절이 있으니 최소한 1000년이 넘도록 제사를 지내온 셈이다. 조선 시대 도교 행사의 하나인 마니산 초제도 여기서 지냈었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태종실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마니산의 원래 이름은 우두머리라는 뜻의 두악頭嶽으로 민족의 머리를 상징하는 영산으로 칭해 왔다.

참성단은 11월부터 3월까지의 동절기에는 10시부터 16시까지, 4월부터 10월까지 하절기에는 9시 30분부터 16시 30분까지 개방한다고 적혀있다. 참성단 돌탑에 수령 15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사나무(천연기념물 제502호)가 균형 있게 가지런히 가지를 펼치고 있다.

다시 바다를 향해 내려선다

 

https://www.bookk.co.kr/aaaing89

 

장순영의 부크크 커뮤니티

장순영은 이러한 책들을 집필, 발행하였습니다. <장편 소설>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야베스,2004년) 대통령의 여자 1, 2권(중명출판사, 2007년) 아수라의 칼 1, 2, 3권(도서출판 발칙한 상상, 2008년)

www.bookk.co.kr

 

 

장봉도를 내려다보고 멀리 영종도의 백운산을 가늠하고는 삼거리로 내려서서 매표소까지의 등산로인 단군로로 방향을 잡는다. 삼칠이(372) 계단을 내려선 후 전망대에 이르러 바다와 마을을 보다 가까이 내려다본다. 참성단에서 1.3km를 내려오면 단군로 갈림길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표소로 내려서면 산행을 마치게 된다.

마니산은 국내에서 가장 기가 센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고도는 높지 않은데 다녀오면 그때마다 영험한 기운을 받는 것만 같다. 고개 들면 파란 천기가 온몸으로 스미는 것 같다. 더 이상 강화도에 수난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빌어본다. 그렇게 된다면 마니산의 영험한 기운은 더 센 에너지로 승화될지도 모르겠다.

마니산에서 내려와 장화리로 가서 일몰을 본다

 

때 / 늦겨울

곳 / 분오리 돈대 주차장 - 469m 봉 - 표지목봉 - 참성단 - 372계단 - 단군로 - 매표소

https://www.youtube.com/watch?v=0WKfqLoUwNk&t=18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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