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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청량산 출렁다리

장한림 2022. 3. 2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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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기악에 꼽는 청량산의 기암 묘봉

 

주소 :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로 255

 

 

 

 

 

https://www.youtube.com/watch?v=Iy7AMvKLkMc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대부분 지역이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는 경북 봉화군 북부지역은 구룡산, 선달산, 옥돌봉, 청옥산, 연화봉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으며, 군내에 문수산, 각화산과 청량산이 솟아 경상북도의 으뜸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봉화군에서는 1980년부터 향토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이자 주민화합을 위한 지역의 대표적 문화행사로 해마다 청량문화제를 열고 있다. 

산간지대로서 교통이 매우 불편했으나 영동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영남과 영동, 내륙에서 동해안을 연결하는 국도가 개설되어 지금은 원만한 교통 요지이다.

청량산淸凉山은 경관이 수려하고 편마암으로 형성된 기이한 암봉과 괴석이 장관을 이뤄 주왕산, 마이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기악奇岳의 하나로 꼽혀왔다.

수산水山이라고 불리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청량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544년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은 청량산을 유람하며 의상봉, 보살봉, 반야봉 등 불교식 명칭 일색이었던 열두 봉우리를 지금의 이름으로 새로 명명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불교문화의 흔적을 없애고 유교의 산으로 돌려놓은 셈이다. 

1982년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청량사 일대를 중심으로 공원 일부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3호로 지정된 바 있다.

 

          

풍경 소리 은은한 열두 고봉의 역동적 파노라마 

    

5년 전 가을에 왔을 때 제대로 물든 단풍이 가을 산으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짙은 운무와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조망을 놓쳤고 기악에 걸맞은 봉우리들을 건성으로 보고 지나친 게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오늘 녹음 무성한 여름에 메아리산방 산악대장 동익이가 주선하여 진관이와 셋이 왔는데 날씨까지 쾌청하여 출발 전부터 기분이 들떴다. 이번엔 그때와 반대 방향 등로의 환 종주를 계획했다. 

청량산 박물관 뒤쪽의 주차장에서 보는 청량산은 나지막하여 그 뒤로 솟은 기이한 봉우리들을 감추고 있다. 청량교를 건너 청량지문 안쪽의 도로까지 인적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오른쪽 목교를 지나 2.9km 거리의 축융봉 가는 길로 들어선다. 주봉인 장인봉을 먼저 가려면 청량지문을 통과해 왼쪽으로 가야 한다. 

등산로에서 올려다본 암봉들이 기암전시장임을 실감케 한다

 

500여 m를 올라 전망소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이 물살 없이 잔잔하여 흐름이 멈춰진 듯하다. 뙤약볕을 그대로 받은 박물관과 야영장 일대도 한산하기만 하여 도립공원으로서의 마케팅이 열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경사 급한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지나게 되는 소나무 군락지의 노송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뻗기는 했는데 껍질이 벗겨져 인위적으로 칼질한 흔적이 완연하다. 일제강점기의 수탈 흔적이라고 한다.

 

“나쁜 놈들이야. 남의 나라는 뺏었어도 자연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산에 다니다 보면 일본인들이 망쳐놓은 곳이 아주 많아.”

 

진관이가 살짝 분개하자 자연 사랑이 남다른 동익이 표정이 굳어진다. 한껏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또 다른 자연미를 눈에 담다 보면 기분 나쁜 생각들은 잊게 된다. 

개성 넘치는 요석 기암들을 속속 눈에 담으며 계단을 올라 난간이 둘러쳐진 축융봉 정상(해발 845.2m)에 이르게 된다.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가 안내판의 이미지대로 확연하게 드러났다.

 

“죽여주는군.”

“동양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 선학봉, 축융봉, 경일봉, 금탑봉, 자란봉, 자소봉, 연적봉, 연화봉, 탁필봉, 향로봉 등 6·6봉이라고도 일컫는 800m 내외의 열두 고봉들이 절경을 이룬다. 

그 자락의 청량사에서 산바람을 타고 풍경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하는 하늘 다리도 뚜렷이 볼 수 있다. 왼편 아래의 낙동강 물길은 실개천처럼 그 폭이 좁아졌다.

 

“저기 밀성대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올 거야. 그리 가자.”

 

축융봉 아래 오마도 터널 갈림길에서 청량산 쪽으로 100m를 더 내려와 공민왕당 갈림길에서 밀성대 쪽으로 간다. 길을 잘 아는 동익이가 이끄는 대로 청량산의 곳곳 봉우리들을 편안하게 즐기며 걸을 수 있어 좋다.

너른 공터에서 평평한 숲길을 따라 다다른 전망대에서 또 한 차례 멋들어진 산세를 둘러보고는 아래로 이어지는 산성 길을 따라 걷는다. 

 

“청량산은 예로부터 군사 요새였다더군.”

“산세를 보니 그랬을 거야.”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쟁탈을 위한 각축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낙동강을 끼고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세인지라 일단 점령하면 외부 침입을 방어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보인다. 

산 전체를 감싼 산성은 밀성대 아래에서 축융봉을 거쳐 구축된 공민왕 산성과 다시 경일봉에서 선학봉을 지나 청량사 계곡 옆으로 축성된 청량산성이 있고 축융봉과 경일봉을 잇는 오마도산성五馬道山城이 공민왕 산성과 청량산성을 연결한다고 하니 산성의 규모만 봐도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현란한 기암절벽열두 개의 대와 여덟 개의 굴

 

성곽을 따라 걷다가 절벽 끝의 누각인 밀성대를 만나게 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항명 죄인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그 죄를 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잔인하군.”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여기까지 피신해왔으니 얼마나 이를 갈았겠어.” 

 

고려사에 당시의 피신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떠나는 중에 왕비와 공주는 가마가 아닌 말을 탔는데 그 말이 파리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개경을 함락한 홍건적은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 백성들을 마구 죽이는 것도 모자라서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짓까지 했다는 거야.”

“짐승만도 못한……”

“그러니 공민왕이 절치부심 했겠지.” 

 

그 후 10만이 넘는 적들의 머리를 베었고 원나라 황제의 옥새와 금은보화 등의 물품을 노획했으며 그 잔당인 파두반 등 10여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도망치면서 홍건적의 2차 침입이 평정되었다.

 

“해피하게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네.” 

 

밀성대에서 고려 말기의 수난사를 짚어보다가 100여 m를 되돌아 나와 산성 입구로 걸음을 옮긴다. 청량산에는 열두 개의 대臺가 있다. 막 지나온 밀성대를 포함해 독서대, 어풍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를 일컬어 청량산 12대라 한다. 

삼거리를 지나 오른쪽에 이끼가 잔뜩 낀 계곡을 거쳐 산성 입구의 주차장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청량사를 방향으로 잡아 수림 우거진 입석길을 오르게 된다. 차량이 오를 수 있는 도로가 따로 있는데 입석길이 덜 가파르고 편안하다고 표기되어 있다. 

산꾼의 집이라고 부르는 기와집과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오산당)가 있다. 

퇴계는 도산서원을 근거지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수시로 청량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청량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산을 무척 사랑하여 청량산에 관한 51편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중 청량산가는 누구라도 찾아와 청량산의 아름다움을 상하게 할까 보아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청량산 열두 봉우리 아는 이 나와 갈매기

 갈매기 떠들건가 못 믿을 복숭아꽃

 도화야 떠들지 마라 어부마저 알까 봐.

     

그러나 실상 퇴계는 청량산이 험준하여 그 호불호가 명확했었나 보다.

 

“청량산은 험해서 노약자가 편히 살 곳이 못 된다. 더구나 청량산 앞에 낙천이 흐르나 산중에서는 물이 지나가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언급하면서 진실로 청량산을 좋아하지만, 그곳을 뒤로하고 산수를 겸한 도산에 머물며 생활하였다.

 

“퇴계가 이곳으로 내려왔을 때는 무릎도 시큰거리고 허리 통증도 꽤 심했을 거야.”

“하하, 일리 있어. 청량사를 들러보고 가자.”

 

산꾼의 집과 청량정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청량사는 높은 담벼락처럼 연화봉이 우뚝 솟아있다. 연꽃의 꽃술 자리라고 비유할 만큼 천혜의 장소이다. 

여기서도 절터를 고르는 원효의 안목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유리보전 앞에 삼각우총과 마주하여 큰 가지 셋이 균형 있게 뻗어 건강미를 뽐내는 삼각우송이 있는데 이 소나무도 원효대사의 설화에 주요 역할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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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는 제가 다루기 힘들군요. 대사님이 맡아주십시오.” 

 

원효대사가 청량사 창건에 진력할 즈음 뿔 셋 달린 소를 가진 농부는 제멋대로 날뛰는 소를 다루지 못하고 원효에게 시주하였다.

그런데 이 소는 절에 온 후 고분고분해지더니 청량사를 짓는데 필요한 재목과 여러 물건을 밤낮없이 운반하여 청량사 창건에 크게 일조하였다. 

이 소가 준공을 하루 남겨놓고 죽게 되어 가까운 곳에 묻었는데 그 자리에서 가지가 셋 달린 소나무가 자라났다. 후세에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이라 부르고 소의 무덤을 삼각우총이라 불렀으며, 이 소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믿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청량사는 창건 당시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을 정도로 대사찰이어서 봉우리마다 세워진 암자에서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온산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때의 불교 억압으로 많이 피폐했다고는 하지만 들어서니 명찰로서의 모습은 제대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사찰을 둘러싼 금탑봉, 연화봉, 축융봉이 청량사를 돋보이게 한다.

오늘 금탑봉은 눈에 담기만 한다

 

산꾼의 집으로 다시 내려와 좌측 자소봉으로의 직등 길로 진입한다. 오르면서 연화봉과 그 오른쪽으로 향로봉이 바짝 밀착해 있다. 오마도 터널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금탑봉과 낭떠러지 위의 밀성대가 아찔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정표에 김생 굴이 머지않다고 표기되어 있다. 금탑봉 왼쪽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직각 암벽 밑에 움푹 들어간 굴 앞에서 멈춘다. 통일신라 때의 서예가 김생은 이 굴에서 9년이나 서도書道를 닦았다.

 

“이만하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명필의 반열에 올랐을 거야.”

 

9년이 지나 김생은 자신감을 갖고 산에서 내려갈 채비를 하는데 젊은 여인이 나타나 엉뚱한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도령이 이 산에서 서도를 닦은 것처럼 소녀도 길쌈을 수련해 왔사옵니다. 그동안 서로가 닦은 기량을 견줘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 솜씨를 겨루어봅시다.”

 

김생은 자신의 실력을 자부하고 있던 터라 선뜻 수락하였다. 김생과 여인은 굴속에서 불을 끄고 각자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불을 켜고 살펴보자 여인이 짠 천은 올 하나 삐뚤지 않고 고르게 짜였는데 김생의 글씨는 여인의 천만큼 고르지 못했다. 

그제야 김생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1년을 더 학습하여 십 년을 채워서야 세상에 나와 명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어머니의 떡 써는 솜씨에 밀린 한석봉의 이야기처럼 명필에게 따라다니는 설화는 비슷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젊은 남녀가 불 끄고 할 일이 그런 게임밖에 없었던 거야?”

“하하하, 진관이 다운 의문일세.”

“싱숭생숭해서 글씨가 제대로 써질 리가 없지.”

 

비가 많이 오면 굴 입구로 떨어지는 빗물이 폭포수처럼 보일 것 같은 김생 굴과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의 여덟 개 굴을 청량산 8 굴이라 일컬어 줄곧 보존 유지하고 있다. 또 청량산에는 총명수, 청량 약수, 감로수, 김생 폭의 네 개 우물이 있어 자연미를 높여준다. 

자소봉(해발 855m)에서 지척의 탁필봉(해발 820m)을 지나 연적봉(해발 846.2m)에서 다시 두 봉우리를 돌아보고 축융봉의 널찍한 능선도 눈에 담는다. 

청량산은 가파른 계단도 많고 유난히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굴곡 산행을 하게 된다. 봉우리가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근접해 있어 지루함은 덜한 편이다.

그리고 하늘 다리에 이르렀다. 2008년 완공 당시 길이 90m, 폭 1.2m, 지상에서의 높이 70m로 국내 최장의 산악 현수교였으나 지금은 파주 감악산, 원주 소금산 등의 규모가 큰 산악 교량에 밀려 이 정도의 숫자로는 명함을 내밀기가 쑥스러울 정도이다.

다리를 건너 뾰족하게 솟은 선학봉을 내려다보고 청량산 최고봉인 장인봉(해발 870m)에 도착한다.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입산수도한 곳이라고 하여 의상봉으로 불리다가 주세붕이 중국 태산 장악의 장인봉에 비유하여 그대로 바꾼 이름이다.

굽어보면 산 아래로 빼어난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늘어섰고 원근 수 백 리의 크고 작은 산맥과 하천들이 장관을 연출한다는 장인봉이지만 지금은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로 인해 조망이 막히고 말았다. 장인봉에서의 하산 계단은 경사가 더욱 급해 난간을 붙잡지 않을 수가 없다. 

금강대는 아래쪽 절벽을 철제 난간으로 둘러쳐 놓았다. 난간 위쪽의 큰 소나무와 아래쪽에 조금 작은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마주 잡듯 가지를 뻗고 있다. 

이곳 청량산 아래 금실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하루는 병들어 누워있는 남편을 대신해 약초를 캐러 간 아내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남편이 청량산으로 찾아 나섰다. 

 

“아니, 왜 거기 매달려 있는 거요. 내 손을 꼭 잡아요.”

“안돼요. 환자인 당신이 무슨 힘이 있다고.”

 

헤매고 또 헤매다가 금강대 절벽에 매달려 있는 아내를 발견하고 간신히 아내 손을 잡았으나 힘이 부쳐 노부부가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을 닮은 소나무 한 쌍이 자라게 되었는데 훗날 이들 소나무를 할배할매송이라 부르고 있다.

 

“쯧쯧, 약초를 왜 이런 데서.”

 

진관이 말대로 아무리 둘러보아도 금강대엔 약초가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할머니가 길을 잃었었나 보다. 안타까운 마음에 두 소나무 기둥을 쓸어보고 나머지 길을 내려선다. 청량폭포를 거쳐 원점으로 회귀했을 때는 다리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다. 청량산의 복잡다단한 산세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만다.

 

“그래도 이 산에 케이블카 같은 게 있으면 안 돼.”

 

지금도 자연 휴양지로 손색없는 청량산이지만 소백권 및 주왕산 관광지와 함께 지속해서 개발이 추진된다니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더욱 일취월장한 청량산을 기대하게 된다. 단지 자연훼손을 동반한 개발이 아니기를 염원하면서.  

 

                  

때 / 초여름

곳 / 청량산 박물관 - 청량지문 - 축융산 - 오마도 터널 길 - 밀성대 - 산성 입구 주차장 - 산꾼의 집 - 청량사 - 자소봉 - 탁필봉 - 연적봉 - 하늘다리 - 장인봉 - 금강대 - 청량폭포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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