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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커튼 엷게 드리운 가을 강천산
며칠 동안 무언가에 콱 막힌 느낌, 사방이 환하게 트였는데도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는 기분. 그럴 때면 가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무모해진다. 그래서 홀로 찾아가게 된다. 이번엔 호남 세 군데의 산을 정했다.
그 산들이 거기 있으므로 날씨나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 가서 막힌 가슴을 뚫고 또다시 엮인 속세와의 고리를 잠시나마 단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
“산 하나를 오르면 금맥 하나를 발견하는 거와 같아.”
함께 산행하는 친구가 그렇게 말했었다. 전적으로 공감하며 금맥 셋을 발견하러 남도로 향한다.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속속 기봉이 솟아있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고이 지닌 깊은 계곡과 계곡을 뒤덮은 울창한 수림을 이루는 강천산剛泉山은 1981년 전국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강천산을 첫 번째 금맥으로 정했다.
단풍 빛깔과 햇빛, 물빛까지 모두 고운 날이다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에 전국적 명소가 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지나 제1 강천 호수를 끼고 순창 옥거리로 들어서면 강천산 매표소가 나온다. 서울에서 비교적 일찍 출발했는데도 정오가 훨씬 지났다.
좁은 진입로엔 토속 특산물 행상인과 행락객들이 빼곡하게 길을 막고 있다. 살짝 거부감이 이는 행락객으로 치부되기 싫어 걸음을 빨리하여 번잡한 공간을 빠져나간다. 더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간 단풍과 엷게 홍조 머금은 주황 단풍들이 맑은 개울물에 숱 많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머리를 감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도선교와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병풍바위에 얇은 망사 같은 물 자락이 흘러내리는데 눈을 떼지 않으면 위로 타고 오르는 것처럼도 보인다. 병풍바위의 큰 폭포는 높이 40m, 그 오른편의 작은 폭포는 30m의 높이로 인공 조성되었지만, 전혀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병풍바위 밑으로 지나가면 그동안 지은 죄도 깨끗이 씻어진다는 설이 있어 몇 번을 오가며 사진을 찍었지만 지은 죄가 커서일까. 지나면서도 거듭 죄를 짓는 느낌이다.
초입에 길게 늘어선 단풍나무 아래로 지은 죄를 씻어내고픈 맑은 계류가 흐른다.
“물에 씻길 거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죄라는 건 그 값을 치러서도 제대로 씻기는 게 아닐 것인즉 그저 속죄양처럼 지낼밖에. 금맥 대신 낙엽이 반기는 산길이지만 역시 산은 자유의 터전이다. 가도 가도 길이 있어 아무 데건 발 내디디라 하니 풍요한 행복이다. 아무도 없어 한산한 길이나 살갑고 그리운 이 누구라도 거기 있으니 엄청난 축복이다.
늘어선 풀잎마다 맺힌 이슬 햇빛에 녹거나 붉다만 잎사귀 서둘러 떨어뜨려도 갈바람 땀 식혀주니 감미로운 희열이다. 그런 행복, 그런 희열을 마냥 느낄 수 있어 이산 곳곳마다 신선의 텃밭이다. 단풍 빛깔과 햇빛, 물빛까지도 모두 고운 화창한 계절,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을 밟노라면 가을은 이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또 낮게 숙여가고 있다.
강천산은 단풍 고운 지금뿐 아니라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와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이 산 계곡의 맑은 물을 찾아 인파가 몰려든다고 하니 소금강의 호칭을 듣기에 모자람이 없는 담양의 명소이다.
강천문을 지나 강천사 경내에 들어선다. 삼각 꼭짓점 선명한 신선봉이 우뚝하고 그 오른쪽으로 전망대가 보인다. 천연기념물로 보호 중인 느티나무는 굵은 가지들을 이리저리 휘감아 뻗어 머리카락처럼 잔가지들을 늘어뜨리고 있다.
“살고자 하면 옳지 않음을 따지지 말고, 거듭나고자 하면 그르다고 판단되는 것에 맞서라.”
강천사 맞은편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의 삼인대三印臺가 있다. 조선조 폭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반정에 성공하자 공신들은 왕비인 단경왕후 신 씨를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출하고 장경왕후 윤 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10년이 지나 장경왕후가 죽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 담양 부사인 박상과 무안 현감 유옥은 관직으로부터의 추방과 죽음을 각오하고 폐출되었던 단경왕후의 복위 상소를 올리면서 소나무 가지에 직인職印을 걸었다. 그 뒤 이곳에 비각을 건립하고 삼인대라 하게 된 것이다.
수줍음 띤 조선 여인의 자태를 뒤로하고
울긋불긋 낙엽에 휘덮인 통나무 계단을 올라 물씬한 가을 정취에 젖어 걷다 보면 구름다리가 나온다. 50m 높이에 길이 75m의 산악 현수교에 많은 이들이 건너간다. 대다수 단풍 행락객이 다리를 건너 전망대로 향하는데 구름다리는 눈에만 담고 왕자봉으로 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본격 등산로에 접어들자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자 구름다리가 다시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정상인 왕자봉(해발 583.7m)에 도착하게 된다. 역시 자연은 위대하다. 홀로 산행, 먼 길이지만 한결 맘이 가벼워진다. 왕자봉에서 단전 깊숙하게 맑은 숨을 들이마시자 강천산 조망권이 모두 내 집 앞마당처럼 느껴진다.
전북 순창과 도계를 이루는 전남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죽세공품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울창한 대나무 숲인 죽녹원에 가면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죽풍이 청량감을 불어넣어주는데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등 죽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총 2.2km의 산책로에서 대나무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강천산 내공을 담고 깃대봉으로 향하며 왜 가슴이 탁했던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바라는 마음이 깊이 고이면 서운해지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다 내려놓았다 싶었던 욕구의 꼬랑지가 손 닿지 않아 더 가려운 등허리처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잖은가. 모서리 진 저 바윗길 모퉁이에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집착 덩어리를 훌훌 떨쳐버리자.
여름에 비해 스산한 산죽나무 오솔길을 벗어나자 바로 깃대봉이다. 왕자봉에 왕자가 없듯 깃대봉에도 깃대가 없다. 깃대봉 삼거리 부근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지 못한 봉우리들에 눈길만 던진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깃대봉에서 필요와 욕심의 경계를 철저히 구분 짓기로 맘 다져보지만 글쎄, 얼마나 버틸는지.
무얼 내던져도 찰나에 사라질 듯한 고개 위에서 살아 꿈틀거리던 욕구와 남아있는 집착 한 덩어리를 힘껏 패대기 치고 그것들이 추락하는 걸 묵연히 바라본다. 오늘은 이 정도로 산행을 마치기로 한다. 벌써 해거름 깔리는 저녁나절이다. 내일 추월산과 무등산까지 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담양으로 가는 버스에서 뒤돌아보니 고운 한복으로 단장한 여인이 노을 속에서 배웅한다. 강천산의 마지막 모습은 수줍음 띤 조선 여인의 아리따운 자태였다.
때 / 가을
곳 / 강천산 매표소 - 금강문 - 병풍바위 - 강천사 - 현수교 - 왕자봉 - 깃대봉 - 병풍바위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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