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유월, 대한민국이 거듭나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국가를 통째로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기겠다는 말로 그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마치 유산을 편애하는 자식에게만 상속하겠다는 투처럼 들렸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충성을 맹세한 꼬붕한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는 게 평화적 정부 이양이란 말인가. 기왕에 유치한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주권을 젖혀두겠다는 논리에 국민들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두환은 퇴임하면 국민들이 지 부하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는 할까.”
우리나라 헌정 사상 여덟 번째 개헌을 통해 출범한 5 공화국의 헌법은 간접 선거를 통한 7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의 지위를 갖는 게 주된 골자였는데 그 상태 그대로 노태우에게 넘기겠으니 토를 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정치 일선에서 강제 퇴출된 야당 정치인들이 5년 만에 대거 사면되면서 범야권 세력이 신한민주당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여 제1 야당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때였다.
“도대체 꽉 막힌 야당 놈들하고 대화가 통해야 말이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의 정점에 선 전두환은 임기를 마치기 전에 정부형태를 내각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퇴임 후에도 자신이 집권당의 총재가 되어 국회의원 공천권을 쥐고 있으면 군 시절부터 내내 뒷바라지해주며 반대급부로 충성을 보장받은 후계자의 머리 위에서 상왕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해왔었다.
그러나 야권은 오로지 직선제 개헌만을 주장했으므로 전두환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13대 대통령을 뽑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전두환이 최악의 자충수를 둔 거야. 이제 군부독재는 끝난 거나 다름없어.”
1980년 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국민들과 야권의 민주화 요구가 한층 거세지자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그해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부 독재에 질릴 대로 질린 국민의 민주화 여망은 더욱더 강하게 표출되었다. 그동안 톡톡히 효과를 보아왔던 밀어붙이기식 강권에 쪼그라들었던 국민의 태도가 이번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죽기 살기로 대드는 게 아닌가. 4월 13일 전두환의 담화문은 국민들의 민주화 갈증과 쌓였던 울분을 폭발시키게끔 하는 역작용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 수준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고 드셌다.
“지금의 수많은 폭력 시위는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북한을 돕는 일이다. 시위하는 놈들은 종북 빨갱이 일당으로 간주하고 모조리 잡아들여라.”
그렇게 5공 정부의 대응이 탄압으로 이어지며 긴박한 상황을 초래하던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체포하여 연행했다.
“그놈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네 몸만 축난다. 네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 수사관은 박종운의 소재지를 밝히라며 박종철에게 폭행을 일삼더니 전기고문에 물고문까지 가했다. 박종철은 그날 거기서 사망했다.
“책상을 치면서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더니 쓰러졌습니다. 곧바로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다음 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쇼크에 의한 심장마비사라고 발표했다.
“부검 결과에 의하면 단순한 쇼크사가 아닙니다. 온몸에 고문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언론의 의혹 제기와 부검의의 증언으로 사건 발생 5일 만인 1월 19일, 경찰은 고문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당시 고문을 가했던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두 명이 구속되었다.
“장관이랑 치안본부장 내보내는 선에서 수습해. 이 일이 더 이상 시끄러워지지 않게끔 하란 말이야.”
정부는 김종호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전격 해임하고 고문근절 대책을 마련하겠다면서 사태를 종결지으려 했다.
거짓의 끝은 진실이다
“모든 게 조작이고 은폐였습니다.”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한다.
치안본부 5 차장 박처원 등 대공 간부 세 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 가담 경관은 두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모인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은폐 조작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강권에 의하고 불의로 이뤄진 고리는 썩은 동아줄처럼 끊어지게 마련이다. 당시 고문치사 사건으로 수감된 조한경과 강진규는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순 감옥이 시끄러워졌다.
“저 사람들 왜 저럽니까?”
“박종철 고문 사건 주범들인데 지들이 다 뒤집어썼다고 억울하다는 겁니다.”
그들과 가까이 수감 중이던 재야 민주화 운동가 이부영이 교도관의 말을 듣고는 은폐, 축소에 대한 내용을 휴지에 기록해서 친분 있는 교도관에게 주었다. 이 쪽지가 결국 정의구현 사제단까지 전달되어 전 국민이 알게 된 것이었다.
영화 ‘1987’을 본 사람들이라면 지금까지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를 거란 생각이 든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 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은 전례 없이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이 사건으로 촉발된 정권 규탄 시위는 1987년 6월 항쟁의 계기가 되어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와 박종철 고문치사 및 축소 은폐 사건에 이어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은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얼굴에 피를 흘리며 몸이 기울어진 이한열을 다른 친구가 부축한 이 사진은 국민들을 더욱 자극했으며 훗날, AP에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으로 선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을 D데이로 잡아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날은 5공 정권의 여당인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예정된 날이었다.
나라 전체가 일촉즉발의 초긴장 상태에 휩싸이고
6월 5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대회 행동 요강을 발표하였다.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해 전 국민은 있던 자리에서 멈춰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남과 동시에 자동차는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전국의 사찰과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은 민주 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는 경우 전 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한다.’
‘6·10 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파손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 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 세력으로 규정한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식’을 열며 시위 물결이 넘실댔고,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 추방 국민대행진이 이어지면서 사태는 도미노처럼 번져나갔다.
이후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6월 10일에 범국민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와 별도로 전국의 재야 지도자 2,200여 명은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 쟁취 선언’을 발표하였으니 바야흐로 6월의 한국은 벼랑 끝에 배수진을 친 채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막아, 무조건 막아. 무장병력을 더 증강해.”
6월 내내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작전명령 제87-4호’가 군에 하달된다. 수도권 및 후방에 특전사령부를 배치하여 발포를 허용한다는 게 내용의 골자였다.
상황은 급박해졌다. 이제 대통령 명령 한 마디면 내전상태로 번지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민병돈 특전사령관은 그 즉시 육사 동기인 고명승 보안사령관을 만났다.
“군이 출동하면 다 망해버리는 거야. 내란으로 번질 우려가 농후해.”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하네만.”
“자네가 각하를 만나 명령 취소를 건의하게. 만약 누가 반대하느냐고 물으면 내 이름을 대게.”
고명승이 대통령과 독대했다.
“각하! 군 출동을 재고해달라는 군내 여론이 높습니다.”
“누구 생각인가.”
“민병돈 특전사령관입니다.”
“뭐야, 민병돈이?”
전두환은 민병돈의 인품을 잘 알기에 평소부터 아껴왔었다. 자기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군인의 길을 걷고 있으므로 해서 그에게서 대리만족을 느껴왔는지도 모르겠다.
“군 출동은 엄포용이었어. 내가 아무리 막 나가도 국민들에게 실탄을 발사하겠는가.”
어쨌거나 5·18 때처럼 군대가 나서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휴우, 천만다행이야.”
민병돈은 만약 대통령이 군대로 밀어붙이려 했다면 즉시 휘하의 707대대를 앞세워 청와대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이미 시뮬레이션도 마쳤고 대국민 성명서도 준비했다. 가까운 후배들이 지휘하는 수도권 부대의 동조를 얻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대한민국 장성으로서, 그리고 작전을 하달받은 특전사령관으로서 돈독한 의를 지녔던 군 선배이자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보다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 먼저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민병돈은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한다면 자결할 각오를 지니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현역 시절 ‘민따로’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했던 소신 있는 진짜 군인 민병돈은 퇴임 후 일체의 공직 제의를 뿌리친 채 서울 양천구 목동의 자택에서 중풍에 걸린 아내를 수발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군대 동원 방안을 접은 채 거대한 국민저항에 부닥친 정부는 6·10 국민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원천 봉쇄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았다.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령을 발동하는 한편 6월 7일부터 주요 대도시에서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유인물 인쇄를 사전 차단하려는 경찰의 경계와 수색도 심해졌다.
“버스와 택시에 경음기를 떼어버려.”
운수업체에 경음기를 떼어내도록 강제하더니 심지어 행인들의 애국가 합창을 막기 위해 오후 6시에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중단시켰다.
또 대회 전날인 9일부터는 민주 인사들의 외출을 막았고 전국 대부분의 대학을 점령하여 학생들의 움직임을 사전 차단하려고 동분서주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정신없었지만 이미 심지에 붙은 불꽃은 붉은 화염을 피워 올리면서 번져가기 시작했다.
나라의 운명을 뒤바꾼 그날의 해가 솟았다
6월 10일 오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노태우 대표가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채문식 전당대회 의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치의 벗어남도 없는 수순 그대로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노태우 후보와 손을 잡고 연단으로 걸어 나가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예정된 권력 승계, 예정된 결과를 끌어낸 그들끼리의 잔치였다.
바로 그 시간, 딱 정오가 되자마자 그들만의 축제가 벌어진 잠실체육관 밖의 성공회 대성당에서 종이 울렸다.
곧이어 종탑 꼭대기에 지선 스님과 여류 소설가 유시춘이 모습을 드러내며 6·10 국민 대회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국민 합의를 배신한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오늘 우리는 전 세계의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 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그날 오후 6시에는 도심 곳곳에서 구호가 터졌고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종철이를 살려내라.”
“뇌사상태에 빠진 한열이를 살려내라.”
선두에 나선 학생들 후미로 시민들이 속속 따라붙었다.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날인 9일,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는 불 섶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검고도 붉은 화염을 솟구치게 했다. 시내버스와 택시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밀리면 안 된다. 아무리 쪽수가 많아도 상대는 비무장의 민간인이다.”
시위대와 경찰의 밀고 당기는 공방전으로 거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이날의 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참여하는 질풍노도의 가두시위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화염병만으로 경찰의 무력에 맞대응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경찰의 강경진압에 밀려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삽시간에 명동성당을 진압대가 에워쌌다.
“수녀들이 성당에서 나와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신부들이 있을 것이며,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나를 먼저 밟고 신부들을 밟고 또 수녀들까지 밟아야 성당 안의 학생들을 잡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나서서 시위대를 잡아들이려는 경찰들을 막아섰다.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명동성당을 강제 진압한다는 건 세계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비칠 수 있는 데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세계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 참가를 거부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성당에 경찰을 투입할 경우 서울 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다.
그날 저녁 명동 성당에서는 8백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6월 10일 밤부터 시작되어 15일까지 5박 6일 동안 진행된 성당 내에서의 투쟁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시민들은 성당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을 위해 십시일반 성금을 거두었고 빵, 음료수, 의약품 등을 전달하며 성원을 보냈다. 점심 먹으러 나왔던 회사원들은 그 자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남대문 시장 상인들은 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에게 옷을 제공했다.
실로 절실했기에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을까.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투쟁의 심지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는 반전이 일어났다.
이렇게 명동 성당에서의 농성 투쟁이 6월 민주화 운동의 불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운동본부는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군대 동원의 가능성에 대한 정부의 경고에도 굽히지 않고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이라는 조직된 시위를 주도하여 백만여 명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시위가 확산되면서 경찰들의 체력도 떨어지고 사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최루탄이 바닥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최루탄이 떨어지자 당국은 곤혹스러웠다. 공장을 풀가동했지만 생산량은 엄청난 소모량을 따라잡지 못했다. 최루탄까지 바닥난다면 경찰의 힘으로도 시위대를 감당해내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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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우리가 졌다.”
마침내 전두환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뼈아픈 결단을 내리고 만다.
“이제 와서 나보고 직접선거에 출마하란 말입니까.”
“그러지 않으면 어쩌겠나. 저 난리를 수습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말이야.”
대통령 자리의 9부 능선까지 족히 올랐다고 여겼던 노태우는 황당했지만 인계자인 전두환의 말처럼 체육관에서 편안하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개헌을 약속합니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한다. ‘국민 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 선언’이라고 명명한 이른바 6·29 선언이다.
국민들의 거대한 결집력에 꼬리를 내린 5공 정권은 직선제 개헌 및 폭넓은 민주화 조치 등을 보장하며 백기 투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로 눈물겨운 승리였다. 속절없이 당하고 무너지기만 했던 독재에 항거에 감격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학생들의 입에서 6월의 노래가 하염없이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부르며 목이 메었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고 목이 쉬도록 6월을 부르짖고 또 찬양했다.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하나 된 소리
민주와 해방의 나라 이뤘다.
아 우리들의 수난 우리들의 투쟁
우리들의 사랑 우리의 나라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손 맞잡은 우리 전진하는 우리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투쟁하는 우리 사랑하는 우리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6·29 선언의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8년 평화적 정부 이양, 언론 기본법 폐지 및 언론 자유 보장, 지방 자치제 및 교육 자율화 실시, 정당 활동 보장 등을 담아 구색을 맞추려 했으나 대통령 선출 방법을 직선제로 바꾸겠다는 것만이 핵심 노른자였다.
6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전개된 명동성당 농성투쟁, 18일 최루탄 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 쟁취 대행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연인원 5백여만 명이 참여하였다.
특히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33개 도시를 중심으로 100만여 명이 참가해 6월 항쟁 중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다른 민주 혁명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이 평가받는 시민 항쟁이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서면 대개 공권력의 폭력이 동원돼 폭동이 일어나거나 내란으로 번져 유혈사태가 생기는 경우가 흔하지만, 6월 항쟁은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많았어도 치안 부재로 치닫는 현상은 생기지 않았다.
6월 항쟁은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시민들의 힘 People’s Power로 민주화를 쟁취한 사례에 꼽힌다.
직선제 개헌으로의 국민 여망을 이뤄내면서 민주화를 달성한 최종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이로 말미암은 제9차 개정 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총유권자의 93.1%가 찬성하여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제6공화국의 개정된 헌법체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6월 항쟁은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군의 장례식을 대미로 장식한다. 처음 연세대 교정에서 군중 10만 명으로 시작해 신촌 로터리 노제에 30만 명이 모이더니, 시청 앞에선 100만여 명이 운집했다. 이한열군의 장례식은 정부 수립 이래 최대 인원이 모인 집회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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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그 후
“나, 노태우는 보통사람입니다. 보통사람으로 국민 여러분께 다가서겠습니다.”
6·29 선언으로 노태우는 정치군인의 이미지를 벗겨내려고 노력하며 일약 대중적 정치인으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1987년 12월 16일, 새로운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좌절되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으로 북풍의 영향이 일면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들이 피 흘려 밥상 차려줬더니, 쯧쯧.”
“지들끼리 반찬 욕심내다가 홀라당 노태우 입에 넣어주고 말았어.”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 나라만 분열시키고 말이야.”
김종필 공화당 후보까지 포함해 1노 3김의 선거구도는 후보자들의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감정을 악화시키며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치닫더니 노태우가 역대 최저 득표수로 밥상을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
여소야대 상황에 직면한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감행함으로써 이러한 국면을 타개했다. 6 공화국이 출발하였지만 기존 5공 정권의 색채가 그대로 묻어나며 그다지 달라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6월 항쟁을 가리켜 ‘절반의 성공’이라면서 아쉬움을 표출하기도 했다. 군부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절반의 실패가 너무나 크게 자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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