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의 언저리 1 -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
로마의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는 옥타비아누스지만 로마의 기초를 다듬은 이는 그의 양부養父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기 이전의 로마는 약 400여 년 내내 공화제 정치를 통해 막강한 정치파워를 지닌 원로원元老院에서 입법뿐 아니라 행정권을 좌지우지했다.
그러한 체제의 말기 무렵, 피가 피를 씻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내란이 끊이지 않아 로마 전역이 혼란에 뒤덮였을 때, 이 혼란을 수습한 사람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가 로마를 떠나 갈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그의 정적政敵이던 폼페이우스는 그를 제거하려고 원로원과 결탁하여 카이사르의 지위와 그의 휘하 군대까지 빼앗으려 했다.
카이사르는 처음 유한 태도로 화합하기를 원했으나 외면당하고 만다. 그들의 요구대로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로마로 돌아가면 원로원이 장악한 재판을 받게 된다.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위협을 느낀 카이사르는 최후의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카이사르는 로마와 가장 가까운 갈리아의 라벤나 지방에 이르러 그곳의 장터를 돌며 풍물을 시찰했다. 또 건축 중인 무예 연습장도 돌아보았고 각종 연회에도 참석했다. 이러한 카이사르의 통치지역 시찰은 총독으로서의 관행처럼 비쳤으나 그건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했다.
정작 그의 뇌리에는 로마로의 진격만이 가득 차있었다. 해가 저물어 어둑해졌을 때 카이사르는 심복 몇 명만 데리고 자신의 본영으로 돌아와 병력을 점검했다. 겨우 5,000명 남짓한 군대. 비밀스럽게 로마로의 출격 준비를 마쳤을 때 모은 군사의 전부였다.
‘이들을 데리고 로마 정예군과 대적한다는 건….’
그건 누가 보더라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들을 이끌고 로마로 향하는 카이사르에게 온갖 회한이 뒤범벅되었다.
루비콘 강가. 결국 거기까지 갔으나 카이사르는 주저했다. 이 강을 건너면 바로 로마다. 그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군사들에게 말했다.
“아직 되돌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저 강을 건너면 모든 건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진군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크게 울렸다. 카이사르가 내린 명령이 아님에도 군사들은 강을 건너기를 원했던 것이다. 군사들은 하나같이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치는데 목숨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감동한 카이사르가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신이 현시하는 대로 부정이 만연한 적에게 가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
예기치 않은 기습이었다. 죽음을 불사한 항전에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 당파는 해외로 도피했다가 결국 파르사 로스 결전에서 괴멸하였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 veni, vidi, vici.”
내란이 완전히 평정되고 그가 로마에 개선했을 때, 저 유명한 3V의 표현이 나왔던 것이다. 그 후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공략했고, 시리아에서 소아시아의 폰토스 지방으로 쳐들어갔으며, 불과 네 시간의 격전 끝에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 뒤로도 아프리카 지역의 전승戰勝 축전이 차례로 올려졌다.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는 득의만만했다. 그들은 승리를 이끌었다는 사실보다 승리를 이끌어낸 속도가 너무나 빨랐기에 더더욱 자신감에 넘쳤다.
카이사르는 주변에 베풀기를 좋아하는 후한 성격 탓으로 젊은 시절부터 노상 산더미 같은 빚을 지고 살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재물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손아랫사람들을 사랑했다. 또한 포용력이 있어 지난 일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지 않았다.
반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배짱이 두둑하고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직선적인 면이 있어 주변에 많은 적들이 생기게 된다.
반대파에 있었던 자들의 복수심에 대해서도 카이사르는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주변에는 진정한 충복, 즉 세심한 충고자나 충성스러운 보좌역이 부족했다.
“아들이여! 너마저!”
결국 카이사르는 그가 철석같이 믿어왔던 사람들한테 배신을 당하고 만다. 대다수 카이사르 편에 섰던 이들은 기강이 문란해지고 공화 체제가 파괴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파와 손을 잡은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되풀이된다. 기원전 44년 4월 13일.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에게 쓰러진 폼페이우스 상 밑에서 손에 단검을 빼들고 덤벼드는 배신자들에게 카이사르는 둘러싸이고 만다. 로마 정복 때와 달리 카이사르를 구하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카이사르에게 최초의 일격을 가한 자는 원로원 의원인 카스카였다. 그에 이어 수도 없이 많은 칼날이 카이사르의 몸을 갈랐다. 목덜미에 가해진 단검 자국만도 스물세 군데. 카이사르는 옷자락으로 머리를 뒤집어쓰고 어렴풋한 신음을 내뱉을 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다만 친자식처럼 귀여워했고 보살폈던 브루투스가 검을 빼들고 덤벼들자 탄식처럼 말했을 뿐이었다.
“아들이여! 너마저!”
로마의 제 일인자가 이처럼 비참하게 쓰러지자 그다음 피의 항쟁은 옥타비아누스가 통일을 이룰 때까지 이어진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인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도 로마에는 오랜 혼란이 이어졌다.
36년간의 긴 식민지 생활에서 벗어나 1948년 7월 17일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다. 제헌절이 생긴 지 60년이 훨씬 넘었다.
로마 시저 Caesar의 흥망성쇠를 보며 우리나라의 60년 현대사가 반추되는 건 아마도 정치라는 괴물의 공통분모 탓인지도 모르겠다. 군사력, 쿠데타, 합종연횡合從連橫, 배신 등 가슴으로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어휘들….
초대 대통령의 오랜 통치 후 4.19 의거, 다시 5.16 군사쿠데타, 또 한참의 세월이 지나 마치 지난 시간을 답습하듯 12.12 사태, 5.18 민주화운동, 다시 6.29 선언… 그래도 양에 안차 20여 년 이상을 더 이어가며 동서東西로, 여야與野로, 청황靑黃으로 나뉘고 찢기어진 시간들이 아니었던가.
반갑지 않은 숫자들이 역사공부와 관계없이 뇌리에 박혀 고통과 분노에 섞여 기억되고 또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국민을 암울하게 만드는 지도자들을 연거푸 맞는 현세의 버거움이야 그러려니 스스로 위안해왔던 체념의 날들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책임질 이 없는 버거운 현실을 운명이겠거니 당연시하면서.
정치가 과학의 1,000분의 1만 쫓아갈 수 있다면….
이젠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나 통치자에 대해 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건 요원한 희망일까. 연료 없이도 자동차가 굴러가고, 컴퓨터 하나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시절이 되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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