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과 바다, 고뎅이의 조화, 하얗게 눈 덮인 덕항산과 지각산
산 전체가 석회암으로 된 덕항산德項山은 삼척과 태백의 경계에 솟아있다. 옛날 삼척 사람들은 이 산을 넘어오면 화전을 일굴 평평한 땅이 많아 덕메기산이라 불렀다.
주변에 너와집, 굴피집, 통방아 등 많은 민속유물이 보존된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골말 일대는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니 이곳이 얼마나 오지인지를 실감하게 한다.
아무리 은밀한 곳에 은둔해있어도 아예 사람 발길 닿지 않는 곳이라면 오지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을 터. 지금은 다양한 관광 이슈로 외지인들을 불러 모은다.
이 근방의 지역을 대이리 동굴지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환선굴, 관음굴, 사다리 바위 바람 굴, 양터목세굴, 덕밭 세굴, 큰 재세 굴 등 6개소를 총칭한 동굴지대로 천연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심설 오르막 고뎅이가 무척 버겁다
이곳 대이리 골말에 이르니 불현듯 판도라의 상자가 떠오른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재앙이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쏟아져 나왔는데 딱 하나, 희망만이 상자 속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고대 그리스의 설화.
제우스신이 모든 죄악과 재앙을 상자에 담아 봉한 채로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에게 주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다. 그런데 판도라는 호기심이 동해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상자를 열고 말았다.
순식간에 상자 안에 가둬두었던 불안, 공포, 질시, 저주, 질병, 고통, 욕망 등 온갖 부정적이고도 악한 내용물들이 쏟아지고 만다.
딱 하나 남았다는 희망이 바로 이런 오지의 산은 아니었을까. 부정하고 악함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그런 게 없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희망과 동일한 게 아닐까.
해발 820m의 산 중턱에 있는 동양 최대 동굴인 환선굴幻仙窟을 오른쪽으로 두고 산길을 오르면서 내내 희망을 밟고 오르는 기분이다. 굴 입구까지 운행하는 초록색 모노레일을 보며 거긴 내려오다가 시간이 맞으면 들르기로 한다.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차가운 날에 이 먼 곳까지 혼자 왔다. 숨죽인 채 오롯이 숨은 덕항산을 오르고자 온 거니까. 오늘은 산이 먼저니까. 그런데도 혹여 환선굴을 관광 상품으로 과대 치장하여 여기 희망의 장소마저 잠식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정부가 그린벨트를 풀어 서민들을 위한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할 때도 판도라의 상자가 떠올랐었다. 자연보호의 명분으로 그나마 억지 춘양으로 지켜오던 그린벨트가 탐욕을 감춰두고 겉으로는 서민을 위한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과 생태의 허물을 벗겨냈었다.
그들 주체는 입으로는 희망을 말하고 상생을 논했지만 오랜 세월 그 터전을 대물림하며 살아온 원주민들을 도시 빈민으로 내모는 결과에 대해서는 겨우 보상금이라는 당근으로 입막음하려 할 뿐이었다.
욕망을 누르지 못함이 얻는 것에 비해 얼마나 큰 것을 잃는지 정책실시 이전에 숙고했어야 한다. 유일무이한 희망을 이곳 주민들에게서만큼은 빼앗지 않기를 학수고대하며 오르는 고뎅이가 무척 버겁다.
급경사의 언덕을 뜻하는 삼척 사투리 고뎅이, 백두대간 덕항산은 자락마다 고뎅이인데다 노상 안개가 그득 고여 있다고 한다. 골말에서 동산고뎅이까지 500m에 불과한데 고뎅이답게 상당히 급하고 거칠다. 동산고뎅이에서 장암목까지 다시 500m, 여기부터는 내린 눈이 겹겹 쌓여 사람이든 짐승이든 발자국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눈길이다.
안개 가득하여 절벽 타고 오르는 운무도 그 풍광이 그럴싸하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설분에 섞인 엷은 안개가 지워져 오를수록 맑아지기를 바라게 된다. 산정에 올라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동해까지 길게 펼쳐질 조망이 길을 나설 때부터 눈에 아른거렸었다.
장암목에 이르도록 창창하게 바뀌는 날씨 덕분에 심설 오르막이지만 버거움이 반감된다. 역시 삼척 앞바다가 지척이다. 뛰어내리면 풍덩, 바닷물이 튀어 오를 것만 같다.
덩치 큰바람이 몸을 흔들어댈 정도로 사납게 몰아붙이기도 하지만 조바심과 뒤엉켰던 기대감, 두근거리던 설렘이 후련하게 트인다. 위로도 아래로도 통하니 몇 번이나 고속국도 바꿔 타며 수고롭게 찾은 덕항산이 명절에 고향 닿은 만큼이나 벅차다. 먼 산에 갈수록 간절함이 크기 때문일까, 그렇게 찾은 산은 대개 산객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 같다.
장암목부터는 덕항산이 얼마나 가파른지 속속 보여준다. 926개의 철 계단이 그렇고 능선의 낭떠러지 팻말들이 그러하다. 대이리 골말에서 올라온 방향, 즉 덕항산 동쪽인 삼척 방향은 급사면의 기암절벽이다. 반면 그 반대편의 태백 쪽은 비교적 부드럽고 완만하다. 비대칭성 단층운동에 의해 형성된 경동지괴傾動地塊형의 산답다.
해발 1071m의 산에 변변한 정상석도 없이 정상임을 표시한 철제 팻말만이 눈밭에 나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문패나 간판의 화려함?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산정에서 바다를 함께 본다는 게 얼마나 큰 호사스러움인가.
하늘과 해안선의 경계마저 얼었는지 그 선이 뚜렷하지 않은 겨울 바다의 낭만을 한껏 즐기는 중이다. 공기 푸르고 바람 시린 정상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동해를 내려 보다가 등 돌려 내륙 쪽으로 시선 던지면 그야말로 알프스에 온 듯 착각에 빠진다. 첩첩 마루금들이 세상엔 온통 산 뿐이라는 걸 각인시킨다.
지금처럼 퍽퍽하게 눈 쌓인 날이 아니었다면 백두대간 종주 리본을 단 많은 이들이 이쯤에서 중첩된 산마루와 탁 트인 동해를 보며 심신의 피로를 훌훌 털어냈을지도 모르겠다.
비워도 버거운데 채우면 오를 수나 있으려나
아홉 남편과 살았으나 모두 요절했다는 어느 아낙의 기구한 운명에서 비롯된 구부시령, 여기 덕항산 정상에서 채 한 시간 거리가 되지 않으므로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남편 아홉 명이든 그들의 부인이든 위로의 말 한마디쯤 건네고 되돌아왔으면 싶지만, 주제넘은 오지랖이란 생각에 그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린다.
여기 정상을 기준으로 구부시령 반대편 백두대간 큰 재로 이어지는 지각산에서 환선굴 방향으로 하산하는 게 처음부터의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눈 덮여 지워진 길을 앞서간 이가 길 내주니 함께 가지 않더라도 그들은 같이 하는 동반자다. 그래서 산은 혼자 걸으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내내 흐트러짐 없는 하얀 눈밭이었다가 큰 재가 가까워지면서 발자국들이 보이더니 이내 눈길이 생겼다.
때론 고독한 걸음이 될 수도 있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를 깨닫게 하고 새삼 바른길이 무언지, 옳은 길이 어딘지를 가늠케 하니 눈길은 윤리학 강의실이다.
산에 오면 이처럼 제멋대로 해석해도 뭐라는 이 없으니 사람은 신선이 되고 산은 무릉도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머리를 하얗게 비운 상태에서 하얀 눈밭 다지며 닿은 곳이 환선봉, 해발 1080m의 지각산 정상이다.
환선幻仙, 맘 다지고 노력한다 해서 될 수 있는 게 신선이던가. 산에 와서 신선이 되었다가 환속還俗해서 다시 먼지 쌓이면 또다시 산에 와 털어내면 되는 거 아니겠나. 심산 깊이 들어서면 그렇지 아니하던가. 언제 어느 때건 넉넉한 풍요로 다가오는 자연의 존재감에 경외심을 느끼지 않던가.
그래서 자연 벗어나면 얼마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자연을 찾게 되지 않던가. 오지에서 은빛 발산하는 덕항산과 지각산에 오니 아직 가보지 못한 대자연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사실에 부자가 된 기분이다.
신선이 되려고 맘먹으면 되레 사람의 속성마저 잃는 것은 아닐까. 비워도 버거운데 채운들 오르겠는가. 채우려 해서 차면 그 무게로 내려앉게 되는 게 세상 이치 아니던가. 세월 먹어갈수록 할 수 있지 않은 걸 하려 들지 말자.
시소처럼 바닥에 닿는 무게를 지니지 말자며 방향을 잡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 자암재 팻말이 보인다.
큰 재 쪽으로 향하면 황장산까지 쭉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데 거긴 다음으로 미루고 예정대로 환선굴 쪽으로 꺾어 내려간다.
가파른 절벽에 겨우내 내린 눈이 들러붙어 고드름이 되기도 하였고 부스럼이 되기도 하였다. 바위 봉우리마다 뻗어 내린 몸통은 다부지고 날카롭다.
그런 봉우리들을 끼고 내려서다 또 하나의 자연 동굴을 보게 된다. 참으로 동굴이 많은 곳이다. 들여다보니 야영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그리고 다시 제대로 된 큰 굴을 찾아 내려선다.
주 통로 3km, 연장 8km 이상으로 알려진 환선굴은 약 5억 3천만 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그 크기가 동양 최대라고 한다.
아직도 정확한 총연장이 파악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데 동굴 내부에는 수많은 휴석, 유석 등이 멋진 경관을 이루며 성장하는 중이고 종유관, 산호 등의 생성물이 힘차게 흐르는 동굴 수와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지금까지 내부에서 발견된 동물만도 47종이 되고 연중 11도 정도의 기온이 유지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별천지의 세상이 거기 존재하는 셈이다.
지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게 무색하지 않은 환선굴을 쭉 돌아보고 원점 회귀한 골말에서 석회암 봉우리를 올려다본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
붉은 가운 훌훌 벗어던지고
지루하리만치 하얀 세월을
여느 해보다 강한 근력으로 버티다가
이제야 두꺼운 적설 부서뜨린다.
툭툭 털어내 바다까지 날려 보내려는데
괜한 허전함 몰려들더니
막바지 한기를 느끼게 한다.
바위틈 비집고도 굽힘 없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재 너머 잽싸게 날아든 까마귀 한 마리가
이제 큰 숨 내쉬고 그만 아쉬워하라,
흰 여백에서 벗어나라
더더욱 딱딱하게 겨울을 다진다
집 문 열고 떠나와 그 산에 들어오면 왜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였을까 하며 갸웃거리게 된다. 가보지 않고 스스로 평가해버린 다음에 잊어버리면 결국 그 산의 멋진 면면을 놓치게 된다.
“역시 잘 왔다가 갑니다. 즐거웠습니다.”
진달래 곱게 물든 곳곳 고뎅이를 연상하며 그윽한 덕항산 미소를 기대했는데 한나절 가까이 품속에 안겼던 이에게 그는 무뚝뚝한 모습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미소라도 한번 머금어주면 다시 찾으마고 약속이라도 하겠건만.”
때 / 겨울
곳 / 대이리 동굴 관리소 - 골말 - 동산고뎅이 - 장암목 - 사거리 쉼터 - 덕항산 정상 - 사거리 쉼터 - 지각산 정상(환선봉) - 자암재 - 제2 전망대 - 제1 전망대 - 천연동굴 전망대 - 환선굴 - 신선교 - 골말 – 주차장
https://www.youtube.com/watch?v=Stfb3SWt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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