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둔 사가리, 삼재 불입지처의 거대한 산, 폭설의 방태산 러셀 산행
강원도 인제와 홍천에 걸쳐 국내 최대 면적의 자연휴양림 지대라는 방태산은 비록 겨울에 찾긴 했지만, 그 수림의 깊이가 즉각 피부로 느껴진다.
1200m가 족히 넘는 가칠봉, 구룡덕봉, 주억봉 등의 고산 준봉에서 널찍하게 뻗은 산자락을 보면 정감록에 왜 여기가 난亂을 피해 숨기 적합한 곳이라 기록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에 위치하여 홍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방태산芳台山은 북쪽으로 설악산과 점봉산으로 접해 있다. 산 아래 남쪽으로는 개인 약수와 북쪽의 방동약수를 품고 있다.
꼭꼭 숨어있던 오지, 살둔, 월둔, 달둔의 3둔, 적가리, 아침가리, 명지가리, 연가리의 4가리
방태산의 방대함을 화두로 삼으면서 삼둔 사가리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서운한 감이 없지 않다. 둔屯이란 농사짓기에 적당한 펑퍼짐한 산기슭이고 가리 또한 밭을 일굴 만한 땅을 뜻한다. 방태산 남쪽을 흐르는 미산계곡 주변의 마을인 살둔, 월둔, 달둔을 3둔이라 하며, 4가리는 방태산 북쪽을 흐르는 방태천 진동계곡의 주변 마을인 적가리, 아침가리, 명지가리, 연가리를 일컫는다.
정감록에서는 삼둔 사가리를 삼재 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 즉 물, 바람, 불의 세 가지 재난이 들지 않는 곳이라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이 지역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조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실패한 이들이 삼둔 지역에 숨어들어 터전을 만들었다고도 전해오는 걸 보면 이곳은 정녕 삶을 위한, 살기 위해 마땅한 곳이 틀림없나 보다.
“아! 여긴 만년설이었구나.”
산림문화휴양관을 지나 이단 폭포를 곁눈질하고 부지런히 걷지만 이후 속도가 붙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함께 온 일행들도 스틱에 의존해 근근이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깊숙한 눈밭에 박힌 발을 빼내고 또 빼내다 보니 걷는 속도보다 눈에서 종아리를 끄집어 올리는 게 더 큰 일이다.
첫 고지 매봉령을 앞둔 삼거리에 이르자 허벅지가 묵직하다. 오를수록 깊어지는 눈밭이 하체에 힘을 실리게 한다. 무릎을 넘어 때론 허벅지까지 빠지는 폭설 러셀 산행 중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이곳에 내리고 쌓인 눈은 봄이 온다 한들 녹기나 할까.
식물 섭생이 가장 좋은 산이 방태산이라고? 누가 여기를 노란 복수초로 시작한 꽃 피우기 향연이 철쭉으로 절정을 이루는 봄의 방태산이라 했는가. 구름 걷어내고 슬그머니 나타난 태양이 하얀 융단을 반짝이건만 적설에 눌린 식물들은 다시는 동면에서 깨어날 것 같지 않다.
하얀 설국에 들어서니 여긴 겨울뿐인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기 구룡덕봉과 주억봉에서 발원한 계류가 산 아래 휴양림을 관통해 흐르면서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시원하다는 말이 실감 나게 와닿는다.
큼지막하게 펼쳐진 하얀 신작로
아무것 없이 오직 백설만 널브러진 길
집착일까,
스스로에 얽힌 빗장일까
너무나 멀리 와서 온 걸음
되돌릴 수 없을 만큼인데
걷고 또 걸어 저울질할 것 없이
마냥 걷는 이 길에서
무얼 뿌리고
무얼 주워야 할까
깊은 바느질 자국처럼 길게 이어진 발자국도 뒷사람 진행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딛는 걸음보다 더 힘들고 더딘 것은 눈에 빠진 발을 빼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그만 내려가는 게 어떨까요.”
휴양림 들머리에서 2km 거리의 매봉령을 지나고 거기서 1.5km 떨어진 구룡덕봉으로 오르던 중 앞서 걷던 K 산악회 박 대장이 뒤돌아 제안한다.
한겨울 혹한임에도 박 대장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일행들 다수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멈칫거린다.
“얼마 안 남았어요. 남자분들이 앞에서 교대로 러셀 하시면 되잖아요.”
“맞아요. 조금만 더 힘내서 올라가요.”
과연 대한민국 아주머니들이다. 대한민국 아주머니들은 산에서도 여지없이 용감하다.
쭈뼛하던 남자들이 앞으로 나선다. 길을 내며 간신히 올라 구룡덕봉이 보이자 마치 매몰되었던 탄광에서 구조된 기분이다. 탄광 밖으로 나오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탄성이 새 나온다.
“포기하지 않길 잘했네.”
일행 중 한 사람이 해맑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뚜렷이 긴 마루금, 설악산 중청과 대청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펼쳐있다. 서북릉 귀떼기청봉까지 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구룡덕봉에 올라 까마득하게 무한한 공간을 둘러보며 시간 이동을 해 본다.
맑은 계곡물 흐르는 늦은 봄이나 여름에 왔더라면 원추리꽃, 함박꽃 등 온갖 야생화 만발한 자연 휴양림답게 신선한 신록을 무진장 만끽할 수 있었겠다.
쌓인 눈이 얼지도 녹지도 않아 걸음걸이 두 배, 세 배 힘들게 한 설산에도 싱그러운 햇빛과 하늘을 찌를 듯 정갈하게 뻗은 고목들로 펄펄 충만한 생명력을 느끼는데 하물며 분홍 봄, 초록 여름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정상 주억봉이 바로 지척이지만 거기까지 쌓인 눈만큼이나 많이 망설이게 된다.
“천 리 머나먼 곳을 보고자 누각을 한층 더 올라간다.”
구룡덕봉에서 정상인 주억봉까지도 새로 눈길을 내며 가야 하건만 여기서 가지 않을 수가 없더라.
더 가까이, 더 넓게 그 산들을 보려 한다. 당나라 시인 왕지환이 관작루에 오르려는 것처럼 결국 하얀 눈밭에 깊은 발자국을 내고야 만다.
구룡덕봉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의 하늘 맞닿은 능선은 지리산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지리산 스카이라인을 떠오르게 하더니 무룡산에서 동엽령, 중봉 지나 향적봉으로 가는 덕유산의 막바지 능선을 연상하게도 한다. 버겁기로 치면 가히 손꼽을 정도의 정상 접근 길이었다.
그 형상이 주걱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정상 모퉁이에 달랑 ‘방태산 주억봉 1444m 인제군’이라는 목판이 세워져 있다.
이미 장대한 방태산의 위용을 실감했던 터라 그 표지판에서조차 카리스마를 느끼고 만다. 넋 나간 듯 눈 덮인 설산들이 다양하게 층층 쌓인 겨울 산그리메를 감상하다가 하산을 서두른다.
아이젠에 스틱을 의지하고도 엉덩이를 눈밭에 밀착시켜 내려가길 여러 차례, 난도 높은 활강스키장을 휘청거리며 겨우 내려섰더니 온몸에 없던 근육이 박힌 듯하다.
역시 이번에도 변함없다. 클수록, 드넓을수록, 수고로울수록 산은 저마다 하나의 공통된 느낌을 준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 사랑하는 내 여인의 자궁. 그렇게 비교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세상 가장 편안한 공간에 들어선 느낌. 벗어나서도 가슴 울렁이는 넉넉한 풍성함을 지니게 하는 곳.
다시 오마, 신록 우거지고 맑은 물 철철 넘치는 초여름 기약하니 세차게 내리 뻗는 이단 폭포 물줄기, 잘게 쪼개져 흩어지는 물방울이 뺨에 부딪히는 것 같다.
때 / 겨울
곳 / 방태산 매표소 - 산림문화휴양관 - 이단 폭포 - 삼거리 - 매봉령 - 구룡덕봉 - 주억봉 - 삼거리 – 주차장
https://www.youtube.com/watch?v=1WScJNbmO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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