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지만 전혀 높게 느껴지지 않는 곳, 선자령에서 배우는 낮춤의 미학
영동과 영서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 대관령과 곤신령 사이의 선자령은 고개라기보다는 산이라고 해야 옳다.
대관령(해발 832m) 북쪽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우뚝 솟은 선자령은 산 이름에 산이나 봉이 아닌 재 령嶺자를 쓴 유래는 알 수 없는데, ‘산경표山經表’에는 대관산,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에는 보현산이라고 적혀있다.
보현사는 신라 때 낭원 국사 보현이 직접 창건한 사찰로 경내에는 낭원대사오진탑(보물 191호)과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 192호)가 있다. 대관령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옆에는 대관사라는 사찰과 산신각, 강릉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선자령 자락에 있는 보현사에 대해 기록한 ‘태고사법’에는 만월산이라 적혀 있는데,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과 같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자仙子, 신선을 일컫거나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므로 아마도 능선의 굴곡이 그처럼 아름다워 붙여진 쪽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선자령의 해발고도는 1,157m로 꽤 높지만 산행 기점인 구 대관령휴게소가 해발 840m에 자리하고 선자령까지 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등산로가 평탄하고 밋밋하여 쉽게 오를 수 있다. 그 때문에 전 구간은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높다. 단지 눈이 많이 내려 쌓이면 걷기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고, 고도가 높아 저체온에 유의하여야 한다. 몇 년 전에 겨울산행을 하던 노부부가 이곳에서 저체온으로 목숨을 잃은 적이 있었다. 선자령에서 북쪽으로는 오대산의 노인봉과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구 대관령 휴게소를 통해 능경봉과 연결된다.
정상에서는 남쪽으로 발왕산, 서쪽으로 계방산, 서북쪽으로 오대산, 북쪽으로 황병산이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강릉시내와 동해까지 내려다보인다. 산행 중 한쪽으로는 바다를 보고 다른 한쪽으로는 대관령 목장의 경관을 보게 되는 곳이다. 게다가 선자령은 겨울산행에 걸 맞는 요소를 거의 모두 갖추고 있는데 능선의 눈꽃이 특히 아름답고 탁 트인 조망이 일품이다.
횡계리 목장 일대 등 대관령 풍력 발전단지 49기의 발전기 프로펠러는 대관령과 선자령을 넘나드는 세찬 바람에 의해 일정하게 돌아간다.
풍력발전기는 먼저 바람의 운동에너지를 기계 에너지로 변환시킨 뒤 다시 전기에너지로 바꿔 전기를 생산한다. 풍력 발전단지로 최적의 장소인 이곳에서 생산하는 전력량은 연평균 약 23만 MWh에 이르는데 강릉시 전체 가구 수의 절반인 50,000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겨울 설경이 그만인 선자령이지만 맑은 물 흐르는 계곡, 유순할 정도로 평탄한 한여름의 초록 능선도 군데군데 야생화 물결까지 더해 그 정취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겨운 곳이 여기 선자령이다. 드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정상지대는 겨울이면 항상 그렇듯 하얀 눈밭이 되었다.
정상에서의 일품 조망이 조금만 더 맑은 날씨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래도 오대산, 계방산과 황병산이 낯익은 산객을 반겨준다. 선자령에서 보는 일대의 산들은 삼각으로 우뚝 솟은 여느 산에서 보는 풍광과 달리 높거나, 멀거나, 크다는 감각이 덜어진다.
몸을 낮추면 하늘은 더욱 높아 보이고 하늘과 땅의 공간은 더욱 넓어 보인다. 사고의 펑퍼짐한 합리일 수 있겠지만 선자령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가 보다. 그래서 선자령에 오면 가뜩이나 낮은 몸이 더욱 낮아진다.
명예에 치중하나 명예로운 면이 없는 자가 사력을 다해 얻는 게 있다면 실제로 그건 명예가 아닌 명성일 게 뻔하다. 그런 사람이 그걸 얻고자 한 노력은 땀과 열정이기보다는 탐욕의 표출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여불위의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지혜롭게 보이려 애쓰는 지도자는 나라를 망치기 쉽고, 충성스럽게 행동하는 신하는 나라를 말아먹을 위험이 있다고 한다. 진정 명예를 귀히 여기는 이는 몸을 드러내거나 소리를 높여 자신이 지닌 탁월한 재능과 충심을 돋보이려 하지 않는다. 기교로 덧붙여 생색낼 일도 없다.
높지만 높게 느껴지지 않는 곳, 평야처럼 아늑한 선자령을 돌며 두루 사위를 조망하다 보니 문득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은 물론 재벌 사업가들도 진정한 명예의 의미를 깨우쳤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 마음마저 지나친 탐심이니 그냥 덮어버리라는 양 대관령 반정으로 하산하는데 하얀 눈송이가 나부낀다. 선자령은 다녀오고 나서도 눈발이 나부끼면 떠오르는 곳 중의 한 곳이다.. 느닷없이 배낭을 짊어 메고 훌쩍 다녀오면서 속에 먼지처럼 남아있던 세상살이 앙금들을 툭툭 털어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때 / 겨울
곳 / 대관령휴게소 - 양떼목장 - 풍해 조림지 - 샘터 - 선자령 정상 - 국사성황당 – 대관령 반정
https://www.youtube.com/watch?v=rHLrgkaA7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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