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손자를 왕으로 만들고자 가야산 자락으로 아버지 묏자리를 옮기다
충청남도 예산군과 서산시에 접한 가야산伽倻山은 1973년 덕숭산과 함께 덕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갯가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산을 ‘개산’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개산이 위치한 지역은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불교문화 같은 선진문물이 먼저 유입되었었다.
그 결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석가모니가 깨달음大覺을 얻은 곳, 즉 붓다 가야 근처에 있던 가야산의 이름을 빌어 우리나라의 개산들 역시 불교식 명칭인 가야산으로 표기하게 된다.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백제의 중흥기를 말해주듯 백제 땅이었던 가야산에는 개심사, 일락사, 보덕사, 원효암 등 백제 때 사찰이 산재해 있다.
경남 합천의 가야산(해발 1432.6m)이나 전남 나주의 가야산(해발 190m)도 해안가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산이며, 충남 서산에 우뚝 솟은 가야산 또한 이 지역 어디에서건 시야에 들어온다. 서산의 개산이 가야산으로 불리게 된 연유라 할 수 있겠다.
내포 문화숲길과 아라메길에서 이어지는 가야산
서해를 향해 당당하게 위세를 드러내는 금북정맥 상의 가야산을 가기 위해 서해안고속도로를 탄다. 해미 IC에서 빠져나와 45번 국도를 이용하여 목적지인 덕산면 상가리의 도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소금기 묻은 봄바람이 상큼한 감촉으로 피부에 와닿는다.
주차장에서 임도를 따라 걸어 오르면 금세 가야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는 옥양봉도 올려다보이고 조금 더 걸어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인 남연군묘를 보게 된다. 남연군은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흥선대원군의 부친인데 살아서보다 죽어서 자신의 무덤 때문에 유명해졌다.
고종 5년 때인 1868년, 두 차례에 걸쳐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담보로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묘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만행으로 국내의 반서양 의식과 대원군의 쇄국주의가 더욱 굳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가야산 정상이 한눈에 잡히는 이곳은 본래 가야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대원군이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풍수가의 말을 믿고 사찰을 태운 뒤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남연군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아들 고종에 이어 손자 순종까지 재위했으니 그 풍수가가 용한 사람이네. 물론 대원군이 사찰을 불태울 거라는 것도 예견했겠지.”
최적의 위치에 잔디까지 곱게 자란 너른 묏자리지만 그다지 고운 시선으로 보게 되지 않는다. 풍수에 능하다고 천기까지 내다볼 수는 없었으리라. 그 2대를 마지막으로 50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린다는 걸 예측했더라면 절을 태워가며 이장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또 걸어 물결 잔잔한 상가리 저수지에 가야산이 그대로 잠겨 데칼코마니로 비치는 걸 바라본다. 지역의 진산을 담은 수면이 버거운지 일렁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저수지 주변의 흐드러진 벚꽃들은 산자락을 타고 오르며 봄기운을 한껏 뿜어내는 중이다.
능선에 이르면서 서해 쪽으로 서산과 태안, 천수만이 펼쳐진 걸 볼 수 있다. 충남 서해안 태안반도 남단에 있는 천수만은 예로부터 민어, 도미, 농어, 숭어 등 고급 어종의 산란장이자 다양한 어류의 서식지였다.
국내에서 가장 큰 철새도래지였던 곳으로 1980년 대규모 간척사업에 따라 총 15500ha에 달하는 간척지가 조성되고 방조제가 건설되었다. 내륙으로는 예당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면적 99㎢에 달하는 평야 대부분을 예산과 당진이 차지하므로 그 이름을 따서 예당평야라 부른다.
충남지역의 해안과 내륙을 번갈아 살피다가 고개 돌리니 활짝 핀 배꽃이 하얀 웨딩드레스의 장식을 떠올리게 하고 노란 민들레가 고개를 쳐들어 제 시절이 왔음을 확인시킨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오르막 경사가 가파르게 솟구친다.
중계소 아래의 바위 너덜지대에서 우회하여 정상인 가야봉(해발 678m)에 닿았다. 주봉인 여기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 옥양봉, 일락산, 수정봉 등의 연봉이 이어지고, 연두색 신록 너머로는 서해에 눈을 담글 수 있다. 편서풍을 타고 서해를 스쳐온 기류가 이들 연봉에 깔리는 운해는 가야산 경관 중 최고로 손꼽는다고 한다.
가야산 일대의 예산, 당진, 서산, 홍성 등 열 고을을 일컬어 내포라고 하는데 지세가 산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큰 길목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이곳에는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며 땅이 기름지고 넓으므로 여러 대를 이어가는 사대부 집안이 많았던 지역이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면 풍수에 문외한에게도 남연군묘는 명당 중의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주변이 평화롭고 아늑하여 죽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산 사람도 편히 쉴 수 있는 푸근한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저 자리에 묘지보다는 절이 있는 게 훨씬 나아.”
가야봉을 내려와 석문봉으로 진행하며 해미면 방향으로 산수저수지와 옥계저수지를 구분할 수 있다. 탁 트인 능선을 따라 주봉인 석문봉에서 옥양봉,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크지는 않아도 까칠해 보이는 599m봉을 지나고 거북바위, 사자바위를 스쳐 지난다. 돌탑이 있는 석문봉(해발 653m)은 유난히 가야산의 기가 몰려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많은 등산객이 머물러있다. 석문봉에서 바위 너머로 지나온 가야봉과 그 뒤로 살짝 내려앉은 원효봉을 돌아보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내려와 솔숲을 지나 군데군데 야생화가 고개를 내민 사이고개는 금북정맥 상에 있는 해발 435m의 고개인데 산악자전거를 타고 온 몇몇 동호인들이 땀을 훔치고 있다. MTB 클럽에서 안전 기원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이곳이 산악자전거의 주요 주행코스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황락저수지와 일락사가 있는 산 밑에 눈길을 두었다가 돌탑이 쌓여있는 곳에 이르면 일락산日樂山 정상(해발 521m)이다. 볕을 즐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상목 옆에 정자가 있는 일락산은 일악산日岳山이라고도 부르는데 행정구역상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속한다.
여기서 서산과 당진의 넓은 평야를 훑어보고 하산로에 접어든다. 송신 철탑을 지나 전망대가 있는 갈림길에 이르자 내포 문화숲길과 서산 아라메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내포 문화숲길은 현재 충청남도 서산시, 예산군, 당진군, 홍성군의 4개 시·군이 조성하는 생태문화체험 숲길로 충남 최초이자 총길이 330km에 달하는 최대 장거리 트레킹 코스로 ‘원효 깨달음의 길’, ‘백제 부흥군길’, ‘내포역사 인물길(동학길)’, ‘천주교 순례길’ 등의 숲길 테마로 구성하고 있다.
바다를 의미하는 우리말 ‘아라’와 산을 뜻하는 ‘메’를 합쳐 바다와 산을 통해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대화와 소통의 트레킹 코스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서산 아라메길은 2010년 1구간이 준공된 이후 현재는 6구간까지 준공되어 있다.
이정표를 보니 지금 이 두 길을 번갈아 걷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산을 다니다 보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러한 자연테마의 숲길을 조성하는 걸 자주 보게 되는데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생뚱맞은 사견이겠지만 이러한 숲길을 완주하고 명산, 둘레길을 종주하는 이한테는 외부효과적 관점에서 건강보험료 할인 정도의 혜택쯤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산 다니면서 병원 신세 진 적이 없는데 말이지.”
구시렁거리며 개심사 삼신당을 지나 개심사 경내로 들어선다. 개심사는 작은 절이지만 충남 4대 사찰에 속할 정도로 고풍스러움이 돋보인다. 백제 의자왕 때 혜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주변을 덮은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벚꽃까지 만개하여 선경 속의 사찰처럼 착각이 들게 하곤 한다.
상왕산 개심사라고 적힌 개심사 일주문을 지나 시골의 작은 장터처럼 옹기종기 늘어선 가판들이 정겹고 구수하다.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소재한 개심사 주차장에 닿으면서 서해안 조망 산행을 마무리한다.
때 / 여름
곳 / 상가리 도립공원 주차장 - 상가리 도립공원 – 상가리 저수지 - 가야산 - 석문봉 - 사이고개 - 일락산 - 개심사 – 개심사 주차장
https://www.youtube.com/watch?v=Qtnqib8Rw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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