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억새산행의 명소 오서산을 미리 올라서서
예로부터 천수만 일대를 항해하는 배들에 등대 구실을 하여 서해의 등대로 불려 왔고 오서산烏棲山이라는 산 이름 그대로 까마귀와 까치들이 많이 서식해 까마귀 보금자리로 불리어왔다. 금북정맥의 최고봉이자 충남 세 번째 고봉이며 보령시와 홍성군 광천읍과 경계하여 위치해 있다.
정암사淨巖寺 중수기에는 오서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에 버금가는 호서지방 최고의 명산으로 수륙水陸의 기운이 크게 맞닿아 중천中天에 우뚝 여유 있게 솟아있다.’
단군조선에서부터 백제로 이어지는 동안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치는 산으로 인식되어 오산 또는 오서악으로 불리던 오서산이었다. 민족의 영산으로서 태양숭배 사상과 산악 신앙의 중심이 되어왔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까마귀산으로 비하되면서 영산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오서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약 2km의 주 능선이 온통 억새밭으로 이루어져 억새 산행의 명소이기도 한 데 아직 억새의 향연을 만끽하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주 능선에 이는 은빛 억새 물결은 아직 이른 시절이라…
정암사 아래에 위치한 간이주차장에서 우측 정암사를 가리키는 입구 쪽으로 들어섰다. 오서산 들머리는 이곳 정암사로 오르는 길 외에도 내원사, 자연휴양림, 성연 주차장 등이 있는데 오늘은 정암사를 기점으로 한다.
콘크리트 길을 따라 올라가다 상담마을을 지나면서 돌이 많이 깔려 울퉁불퉁한 흙길이 이어진다. 울타리에 수많은 리본이 매달려있다. 간이매점과 화장실이 있는 공터에도 자동차 몇 대가 세워져 있다. 내포 문화숲길이라 표시된 안내판에 오서산을 가리켜 백제의 혼불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설명하고 있다.
정암사와 오서산 정상으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정암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전형적인 시골 절이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사찰로서의 격식은 제대로 갖춘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다감해서 좋다. 불자는 아니어도 경내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절이 있다. 고즈넉하게, 또 꾸밈없이 가을에 흡수된 것 같은 이곳이 그렇다.
정암사의 창건이나 연혁에 대해서는 전혀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다녀갔다는 증거는 없어도 분위기만큼은 찾는 신도들이 속세의 번뇌를 떨어낼 것처럼 아늑하고 푸근하다.
정암사 경내 삼신각 뒤로도 옛길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지만, 일주문 옆의 1600계단을 통해 오르기로 한다. 긴 계단은 큼직한 바위가 막아서면 살짝 비켜서서 다시 시작되곤 한다.
경사가 심한 계단이 계속되는데 길이 거칠어 계단을 만들기 전에는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540계단 지점에 홍성군에서 착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무릎에 무리가 가고 옛길이 그리운 분은 계단을 이용하지 마시고 데크로드 옆의 옛 등산로를 이용하세요.”
그렇게 적혀있지만, 나머지 1060계단도 마저 걸어 오르기로 한다. 끝이 없을 것처럼 보이던 계단과 양옆의 숲은 오서정과 아차산으로 나뉘는 갈림길을 지나서야 트인 공간을 제공한다.
전망대에 이르자 서해안으로 펼쳐진 평야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히 서해의 등대로 불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나무 숲을 지나 문수골 갈림길을 지나면 우측으로 또 하나의 전망대가 있다. 조금 전 머물렀던 전망대와 그 아래로 아차산이 보인다.
바다는 더욱 낮은 곳에서 해안선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양 목을 뺀 천수만과 크고 작은 섬들이 무수히 떠 있음에도 서해는 고독해 보인다. 바다도 가을을 타는가 보다. 그런 서해를 조망하는 매력이 있어 오서산이 더욱 좋아지려 한다.
다시 정상을 향하니 펑퍼짐한 주 능선에 다가서게 된다. 오서산의 일몰 광경을 추켜 꼽는다더니 억새의 일렁임 사이로 떨어지는 해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는 직접 보지 않아도 환상적일 게 틀림없다. 덕숭산과 용봉산, 그리고 얼마 전에 다녀왔던 가야산과 눈을 맞추고 정상으로 눈을 돌리면 더욱 너른 억새 무리가 가득 눈을 채운다. 능선을 돌 때마다 억새밭은 또 달라진 풍경을 보여준다. 아직 덜 여문 억새들 틈으로 생긴 길에 또 다른 억새들이 휜 허리를 가누고 한껏 흔들어댄다.
종담마을 갈림길을 지나 넓은 데크에 도달하니 여기가 오서정이 있던 자리이다. 월터 저수지가 발밑에 있고 가까이 오서산 정상 아래로 오색의 내포 문화숲길이 이어지는 걸 볼 수 있다. 전망도 좋고 데크가 넓어 백패킹 장소로 많이 활용되고 있는 곳이다.
오늘 거치는 길은 아니지만, 처녀 능선길이라고도 하는 지척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맛깔스럽게 전해진다.
오랜 옛날, 이 산 아랫마을에 홀어머니와 딸, 단 두 모녀가 서로를 의지하며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딸의 미모가 상당히 출중했었나 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양귀비보다 예쁘고 마음씨도 비단결처럼 고와 동네 촌닭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다니 말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완쾌를 기도하며 수많은 날을 보냈지만, 오히려 병세만 악화하자 처녀는 온갖 산짐승이 우글거리는 오서산으로 약초를 구하러 갔다. 온종일 산을 헤맸어도 약초는 구할 수 없었고, 비를 피해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산신령님! 우리 어머니 병환을 고칠 수만 있다면, 제 육신을 기꺼이 바치겠사오니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산삼 한 뿌리만이라도 내려주세요.”
간절하니 통했을까. 기도 중에 무지개를 보고 그곳을 향해갔는데 바로 거기 천년 묵은 산삼이 처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 산삼을 캐려는데 오서산 산신령이 나타났다.
“고약한지고! 처녀가 여기까지 와서 내 보약을 훔치다니 고개를 들어라.”
처녀가 고개를 들고 산신령에게 절을 올리는 순간 처녀의 미모에 넋이 나간 산신령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처녀가 어머니의 위중함을 호소하며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산신령은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대신 이 산삼을 주면 네 육신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느냐.”
“어머니 병만 낫는다면 그러하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처녀가 산삼을 달여드리자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건강을 확인한 처녀는 산삼을 캔 자리로 다시 와 산신령과 천년 해로를 같이하기 위하여 처녀 바위로 변했단다.
“이거야말로 윈윈 아닌가. 어머니도 살고 산신령 신랑도 얻은 데다 산신령은 겨우 산삼 한 뿌리로 최고의 미인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처녀 바위 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겨 광천시에서 해발 791m 지점에 세운 오서산 안내석을 지나고 다시 평탄한 능선을 걸어 쉰질바위 갈림길을 지난다.
내원사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지나고 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갈림길도 지나 오서산 정상(해발 790.7m)에 닿았다. 보령시에서 정상석을 세웠다. 국내 5대 억새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는 오서산은 올라와 보니 만추 산행으로 제격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멀리 홍성, 청양, 보령 땅을 모두 내다볼 수 있다. 서해안을 따라 어디쯤인지 대천과 무창포도 있을 것이다.
저만치서 달려오고 있는 초가을 숲의 가파름은 푹신하고 포근하다
하산 길, 정상에서 통신 중계소로 향하는 능선 외길에서도 억새 무리의 배웅을 받는다. 또 지나가면서 아래로 오색 숲 자연휴양림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서고 전망 바위를 지나면서 길이 가파르다. 초가을 숲의 가파름은 봄의 조심스러움이나 겨울 미끄럼과 달리 푹신하고 포근하다.
임도를 건너 넓은 흙길을 지나면서 작은 암자 월정사를 거치게 된다. 대나무 군락을 보게 되고 자연휴양림을 흐르는 명대계곡을 지나 야영장에 이르면서 가을 오서산의 가붓한 탐방이 벌써 저만치 지나가는 계절 흐름과 함께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오서산 자연휴양림으로 내려서면서 가을 초입의 오서산 등반을 마무리하는데 가을은 한걸음 성큼 다가선 듯 느껴진다.
때 / 초가을
곳 / 상담마을 간이주차장 - 정암사 - 전망대 - 오서정 - 오서산 - 통신 중계소 - 월정사 - 오서산 자연휴양림
https://www.youtube.com/watch?v=55zX6NN3Y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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