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산에서 땀에 젖고 열두 폭포수에 젖어
경상북도 포항시와 영덕군에 걸쳐 있는 내연산內延山은 그 일대가 경북 3경에 꼽히는 경승지이다.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게 산세와 풍광, 생태적 가치로도 오는 이들로 하여금 푹 빠져들게 한다.
1970년대 포항 종합제철(현 포스코)이 들어서면서 세계적인 제철 도시로 성장한 영일만의 포항시 북서부 지역은 태백산맥 남단에 해당하는 산악지대로 동대산, 구암산, 자초산, 면봉산, 보현산, 운주산, 향로봉, 천령산, 침곡산, 비학산 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솟아있고 동해안으로 뻗어 내려가면서 점차 낮아진다.
내연산은 해안 가까이 솟아올라 있어 최고봉 710m의 해발고도에 비해 더 우뚝 높아 보인다. 신라 진성여왕이 견훤의 난을 피해 종남산으로 피신 왔다가 내연산으로 개칭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폭포에 맑은 소와 푸른 담을 이루며 40여 리를 굽이쳐 흐르는 청하골이 그윽하게 휘감아 돌고 있어 높이와 관계없이 명산의 반열에서 제외할 수 없는 곳이다.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내연산의 3층 폭포인 삼용추三龍湫를 화폭에 담고 금강산보다 아름다운 경관이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무엇보다 내연산이 탐방객을 끌어들이는 건 쌍생 폭, 보현 폭, 삼보 폭, 잠룡 폭, 무풍폭, 관음폭, 연산 폭, 은폭, 복호 1폭과 2폭, 실폭과 시명 폭 등 폭포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12 폭포가 있어서라고 할 수 있다.
경상북도 문호 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로 육로와 해상교통의 요지이기도 한 포항은 여름철에 종종 오곤 했는데 구룡포와 송도, 해맞이광장 인근의 동상 조형물 ‘상생의 손'으로 유명한 호미곶虎尾串 등 바닷가를 즐겨 찾았었다.
재작년에 이어 이번 여름에도 바다가 아닌 산을 찾아 일부러 왔으니 또 내연산에 오고 싶어서였다. 두 해 전, 내연산을 휘감아 도는 여섯 봉우리 천령산 우척봉, 삿갓봉, 매봉, 향로봉, 삼지봉, 문수산을 환종주 했었는데 이번 산행에는 그때 접하지 못한 열두 폭포의 폭포수에 푹 젖기로 하였다.
올라서서 포항 앞바다를 눈에 담는다
새벽 일찍 서울에서 출발하여 보경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탐방객이 모여들어 주차공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여름 휴가철을 끼고 있어서 계곡을 찾는 인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건강특화구역으로 지정된 내연산답게 진입로도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있다.
12폭을 품은 청하골은 천년고찰 보경사부터 시작된다. 보경사 일주문을 지나 매표소에서 거금 3500원을 지급하고 입장해야 하는데 사찰 입장료가 아니라 문화재 구역 입장료라고 적어놓은 걸 보니 아까운 마음이 조금은 덜하다.
경주 불국사의 말사인 보경사는 연륜에 비해 규모가 크지는 않다. 경내의 문화재도 고려 원진국사의 비석(보물 제252호)과 부도(보물 제430호)를 제외하고는 그 이름값만큼 딱히 내세울 건 없는 듯하다. 하지만 다수의 명찰처럼 화려하거나 호사스럽지 않고 내연산을 병풍 삼은 그윽한 풍광이 걸음을 멈춰 서게 한다.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골라 소승이 진나라의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 보경을 묻으십시오.”
“그건 왜 묻으라는 것이오?”
“보경을 묻은 자리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에도 밀리지 않고 결국 삼국을 통일할 것입니다.”
602년 진나라에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신라 지명 법사가 진평왕에게 이르자 진평왕은 그의 말대로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연못에 팔면 보경八面寶鏡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였으니 그렇게 세워진 사찰이 보경사이다.
일단 문수봉으로 길을 잡는다. 내연산의 정점을 지키는 봉우리들을 접한 후 내려오면서 열두 개의 폭포를 거치기로 했다. 적당히 고여 흐르는 맑은 계곡을 끼고 걷다가 숲길로 들어선다. 문수봉과 선일대의 갈림길에서 오른쪽 문수봉 방향의 돌계단을 밟자 한동안 오르막 구간의 연속이다.
문수암이라 적힌 돌비를 지나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수림 왼쪽 아래로 두 줄기 쌍생 폭포와 짙푸른 담을 내려다본다. 육신의 수고로움은 눈에 담는 객체가 무엇인가에 따라 쉬이 씻어지기도 하고 그 후유증이 길게 남기도 한다. 내연산에서 보이는 것들은 대개 지친 몸을 빨리 회복시켜주는 객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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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더욱 가파르고 잡목 우거진 너덜지대가 이어지지만, 이정표가 수시로 세워져 있어 길 놓칠 염려는 없어 보인다. 문수봉(해발 628m)에서 여러 산객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바로 삼지봉으로 향한다. 평평하고 널찍한 능선이라 문수봉 올라올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편안하다.
숲이 우거져 그다지 눈 돌릴 곳이 없다가 동해안 포항 앞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힘들여 올라와 펼쳐진 바다를 보는 건 큰 기쁨이자 후련한 속 비움이다.
은 폭으로 내려가는 삼거리 구간을 지나친다. 여기서 내려가게 되면 폭포 몇 개를 놓치게 된다. 오늘 산행 계획은 12폭 트레킹을 포함하므로 향로봉까지 가야만 한다.
안락한 숲길 따라 내연산의 주봉 삼지봉(해발 711m)에 닿았는데 여기도 향로봉을 찍고 왔거나 은폭을 거쳐 올라온 산객들이 꽤 많이 모여 있다.
https://www.bookk.co.kr/book/view/134523
https://www.bookk.co.kr/book/view/134524
여기서 향로봉까지 2.6km, 곧바로 그리 향한다. 능선의 고도가 지속해서 높아지지만 크게 힘든 길은 아니다. 오름길의 종점, 보경사 입구에서 7.9km 거리의 향로봉(해발 930m)에 도착해 하늘과 맞닿게 되자 땀은 흐르지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북에서 남으로 길게 이어진 동해를 내려다보면서 단전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그깟 심호흡으로 잘아지고 굳어진 돌이 원형을 되찾겠는가마는 그래도 내면을 정화하고 싶다.
너른 바다를 깊이 바라본다 하여 가까운 이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던 좁은 가슴에 너른 포용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신경림 시인의 ‘동해바다’는 잠시나마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 만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열두 폭포와 일일이 대면하다
반성의 시간까지 가지면서 어짊의 미덕을 곱씹었으니 이젠 너른 시야를 지니고 계곡으로 내려서서 열두 폭포를 만날 일만 남았다.
시명리 방향은 고메이등으로 내려서서 시명리를 거쳐 청하골로 통하는 내리막 코스이다. 한동안 급경사의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내려서서야 물소리를 듣게 된다. 물을 건너 수목원 삼거리에서 보경사 쪽으로 길을 잡아야 열두 폭포를 모두 만나게 된다.
하산 길이다 보니 열두 번째 시명폭포를 먼저 만나게 된다. 등산로에서 150m 아래로 벗어나 만난 시명 폭에 살짝 실망하고 만다. 열두 폭포 전부가 웅장한 물줄기를 쏟아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다음 11폭인 실 폭포로 걸음을 옮겼는데 실폭은 한술 더 떠 300m나 외떨어져 있다.
“이렇게라도 다 봐야 하는 게 옳은 일일까.”
망설이면서도 그쪽으로 가게 된다.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흘러내린다는 실폭 또한 보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만다. 10폭에 해당하는 복호 2폭과 그 아래의 9폭인 복호 1폭은 호랑이가 바위 위에 엎드려 쉬는 형상이라는데 어느 부분이 호랑이 머리인지, 꼬리는 어느 쪽인지 결국 분간 못 하고 돌아선다. 호랑이 닮은 폭포는 그 위로 올라서서 보았을 때 폭포로서의 미관이 더 출중하다.
다시 내리막길에 대단히 큰 애추崖錐를 보게 된다. 산악지대 비탈면에서 흔히 보는 암석 무더기들은 대부분 애추로, 동결과 융해가 반복된 풍화의 산물이라 대개 모서리가 날카롭게 각진 것이 특징이다.
‘너덜겅’, ‘너덜지대’, ‘돌서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한 온대 지방의 애추 대다수는 과거 빙하기에 형성된 것으로 지금은 활동을 멈춘 화석 지형으로 알려져 있다.
음지골 쉼터라고 적힌 정자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8폭으로 간다. 숨겨져 있다고 해서 명명된 은폭隱瀑 앞에 서자 짙푸르게 고인 소沼로 가지런히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은폭의 물길을 터준 기암도 볼만하다.
이제부터 여러 폭포와 기암절벽을 동시에 전망할 수 있는 코스이다. 소금강 전망대로 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이 일대의 광경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초록 숲 사이로 드러난 절벽들의 깎아지른 모습이 그렇고, 우뚝 솟은 기암절벽 비하대와 학소대가 아래로 좁혀지면서 이루는 계곡의 형상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전망대에서 보는 맞은편 절벽의 정자 선일대가 아찔하게 느껴진다.
“옛사람들은 저기에 정자를 만들어놓고 얼마나 많이 와보았을까.”
저 자리에 정자를 세우겠다는 발상과 안목도 놀랍거니와 또 거기에 정자를 세웠다는 사실도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만은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또 내려다보는 관음폭포와 연산폭포도 지금까지 보아왔던 폭포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청하골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이 바로 여기서 보이는 관음폭과 연산 폭 주변을 에워싼 선일대, 신선대, 관음대, 월영대 등 천인 단애가 장성처럼 둘러쳐진 곳이라는데 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선대에 올라 휴식을 겸해 두루두루 주변 절경들을 눈에 담아두고 청하골에서 가장 규모가 큰 7폭, 연산폭포로 내려왔다. 역시 깎아지른 절벽인 학소대 밑으로 큼직한 물줄기가 굉음과 함께 쏟아지니 시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여섯 번째 관음폭은 쌍폭으로 물줄기 아래 못 옆에 커다란 굴이 있는데 관음굴이라 부른다. 몇몇 탐방객들을 따라 이 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입구 일부를 가린 채 떨어지는 폭포수 줄기가 색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연산폭포에서 내려서는 구름다리 적교도 관음폭포 쪽에서 보면 더더욱 이색적이다. 높이 30m, 길이 40m의 구름다리가 관음 직벽과 어우러져 눈을 즐겁게 한다. 연산 폭, 관음폭, 잠룡 폭포 아래의 소를 삼용추라고도 하는데 겸재 정선이 ‘내연 삼용 추도’를 그렸을 정도로 이곳에 반했던 모양이다. 이 세 폭포는 어디서도 한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겸재는 상상으로 그림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5폭, 무풍 폭포도 등산로를 거슬러 올라가야 그 앞에서 제대로 볼 수 있다. 계곡 깊은 곳에 고혹한 자태로 물을 흘리고 있다. 계곡을 떠받치는 암벽들은 잎 푸른 나무들까지 받쳐주어 자연미 가득 풍기면서도 소란스럽지 않게 수려하다.
그리고 잠룡 폭포, 4폭을 마주한다. 이 주변 계곡은 영화 ‘남부군’의 촬영 장소다. 남부군 대원들이 모인 지리산 계곡의 일부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3폭 삼보 폭포와 2폭 보현 폭포에 닿았을 때는 옷도 등산화도 흠뻑 젖고 말았다. 폭포 트레킹을 염두에 두고 왔는지라 멀찌감치 서서 바라만 보고 지나치는 게 싫어 서슴없이 물길을 건너고야 말았다.
“땀에 젖으나, 물에 젖으나 매일반 아니겠나.”
강원도 삼척의 덕풍계곡 기나긴 물길을 건너고 또 건너 응봉산에 오를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물길 트레킹에 비하면 강물과 실개천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폭포이자 12폭 중 첫 폭포인 쌍생 폭포에 다다르자 많은 산객들을 보게 된다. 기화소 절벽과 어우러진 맑은 기화담은 깊이를 재기 어려울 정도로 검푸른 빛을 띠고 있다. 우람하여 큰 물살을 쏟아내는 건 아니지만 폭포의 두 줄 물길이 나란히 단아하게 떨어진다.
모두 접하고 나자 제작기 개성을 지닌 열두 폭포가 차례대로 뇌리를 스친다. 내연산 세 봉우리와 열두 폭포를 모두 만나고 보경사 주차장으로 내려설 즈음엔 기력이 많이 소진된 걸 느끼지만 열두 폭포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된 겸재의 화폭을 떠올리노라니 여느 명산을 내려섰을 때처럼 새로운 에너지가 대체되는 걸 느끼게 된다.
“내가 원해서 왔고, 원했던 대로 취했으니까.”
때 / 여름
곳 / 보경사 주차장 - 보경사 - 문수봉 - 삼지봉 - 향로봉 - 시명리 - 청하골 12 폭포 - 원점회귀
https://www.youtube.com/watch?v=FbmT0WvXL3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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