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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국립공원
지리산은 1967년 국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으로 우리나라의 상징적 산이자, 지리산 자체로서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사연 절절한 삶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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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대종주,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오고 나면 진작 왔어야 할 곳,
힘들고 지루해 다신 오지 않으리라 맘먹고 떠나 미안해지는 곳,
예정하고도 여기저기 들르느라 늦어
멀리 돌아온 듯싶어 고개 숙이게 되는 곳
8월 중순 오후 5시, 서울에서 출발하여 전남 구례 화엄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넘었다. 함께 산행하며 우정과 의를 다져온 네 사람, 친구 병소와 계원, 은수 두 명의 후배가 동행했다.
깜깜한 어둠, 화엄사 인근에 터를 잡아 준비해온 먹거리를 풀어놓고 저녁 식사를 한다. 정각 자정에 출발하기로 했으니 두 시간여 시간이 남아있다.
“여기 화엄사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각황전이지.”
조선 숙종 때인 1699년 공사를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되었는데 숙종은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계파 스님은 스승인 벽암 스님의 위임을 받아 장육전 중창 불사를 하고자 했는데 건축비 걱정에 밤새 대웅전에서 기도하였다.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절을 나서 길을 걷는데 간혹 절에 와서 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노파가 걸어오고 있었다. 스님은 난감하였지만, 간밤에 계시받은 대로 그 노파에게 장육전 건립을 위한 시주를 청했다.
“잘 아시다시피 밥도 구걸해 먹는 제가 어떻게……”
노파는 어이없었지만, 스님이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는지라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원했다.
“이 몸이 죽으면 다시 왕궁에서 태어나 큰 불사를 할 수 있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는 길옆 늪에 몸을 던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스님은 놀라 도망쳤다. 몇 년간 걸식하며 돌아다니다 한양에 나타난 계파 스님은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하던 어린 공주를 보게 되었는데 공주는 스님에게 다가와 반갑게 매달리는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꼭 쥐어진 한쪽 손이 펴지지 않은 공주였는데 계파 스님이 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 손바닥이 펴졌다. 그런데 그 손바닥에는 ‘장육전’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 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하여 장육전을 지을 수 있도록 시주하였다고 한다.
“최대 목조건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알았으니 출발하자.”
랜턴 불빛을 밝혀 이틀간의 여정을 최종적으로 점검한다. 도상거리 40km가 넘는다.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보약이 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들은 이미 보약 한 첩씩을 먹은 표정이다. 정각 자정, 장도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칠흑 어둠 걷어가며 하늘길 노고단을 오르다
지리산 화대 종주의 들머리 화엄사 탐방안내소에서 노고단 고개까지 7km, 성삼재에서의 비교적 편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천왕봉을 찍고 중산리로 하산하는 일명 성중 종주는 일행 모두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단일산 종주 코스로는 국내산을 통틀어 최장인 전남 구례의 화엄사에서 경남 산청 대원사까지의 이른바 화대 종주이다. 어디선가 읽은 글귀다.
‘화대를 염원하는 산객은 많지만, 화대를 품에 안은 산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고행길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말일 것이다. 과연 그걸 품을지는 지리산을 안아보고 지리산에 안겨본 다음의 일이다. 예로부터 구례는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곳이라 하였다.
지리산, 섬진강, 구례 들판이 삼대三大에 속하고 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을 삼미三美로 들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봄에 볍씨 한 말을 논에 뿌리면 가을에 예순 말을 수확할 수 있다’고 구례의 풍년 농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구례의 가파른 밤길 걸으며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성전星田이다. 칠흑 어둠 뚫고 화사하게 부서지는 별빛 받아 오르며 우리 네 사람 모두에게 의미 충만한 도전이며 행복한 결실로 마무리되기를 소망한다.
“이 근방 어디에 매천사가 있을 거야.”
조선 후기의 우국지사 매천 황현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매천사梅泉祠(전남 문화재자료 제37호)를 말하는 것이다. 매천은 28세 때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떠밀리자 벼슬길을 마다했다. 5년 후 아버지의 권유로 생원시에 응시해 역시 장원으로 합격했지만 썩은 관리들의 행태에 질려 관직을 버리고 구례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온 정성을 쏟았다.
백발이 성한 나이에 난리 속을 만나니
이 목숨 끊을까 하였지만 그리하지 못하였네
오늘에는 더 이상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바람에 날리는 촛불만이 푸른 하늘에 비치도다
매천은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자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생가가 있는 광양에 매천 역사공원이 조성되었고, 이곳 구례에는 매천도서관이 있다더군.”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충직하고 올곧은 선비라고 들은 바 있어요.”
바람도 잠이 들어 고요하여 별빛 부서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만 같은 어둠을 뚫고 코재라고도 불리는 무넹기고개에 이르렀다. 출발지부터 5.9km의 가파름을 오르자 숨이 가쁘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배낭을 내려놓으니 역시 산은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거듭 느낀다. 힘들었다가 풀리고 풀린 듯싶으면 다시 버거운.
산에서 먹는 식사는 때와 장소와 관계없이 꿀맛이다. 이른 새벽 식사를 마치고 노고단 고개에서 대장정의 각오를 새롭게 다져본다. 오늘과 내일, 자신과 험한 투쟁이 되겠지만 이들 두 후배와 친구에게 평생 간직할만한 추억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리산 산신이자 한민족의 어머니라고 전해 내려온 노고 할미의 유래가 있는 곳, 막 올라온 화엄사계곡과 심원계곡이 발원되는 길상봉이 표고 1440m의 노고단이다. 700m 거리의 노고단까지 다녀오고 싶었지만, 오전 10시에나 출입할 수 있단다.
여기서부터 길고 지루한 능선이 시작된다. 많은 재와 령을 넘고 그만큼의 봉을 거슬러 올라야 천왕봉까지 닿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 육신의 힘과 강한 정신력을 주시어서 우리가 목적하고 고대한 종주 산행을 안전하게 마무리하도록 해주소서.”
헤드랜턴을 접어도 될 만큼 여명이 밝아오자 끝도 없는 바다에 파도가 출렁인다. 구름이 해일처럼 높아지는 곳에 잠기지 않으려는 봉우리는 작은 섬처럼 삐죽하게 꼭지만 보일 뿐이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노고 운해다. 좁은 능선에서 눈 돌리는 곳마다 큼지막한 신작로가 하얗게 펼쳐져 있다. 마루금마저 가려져 아무것 없이 구름안개만 널브러졌다.
노고단 일대는 그야말로 파도 넘실대는 바다였다.
그러나 가려졌어도 모든 걸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려짐 속에서 저처럼 확연히 드러나는 면모가 세상 어디엔들 있을까 싶다. 무언가를 보여주려 애쓸수록 하염없이 가려지기만 할 뿐인 인간사 허다한 행태와 너무나 다른 모습을 지금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원규 시인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에서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라고 했다. 이슬의 눈을 되뇌다가 고개가 숙어지며 가늘게 눈을 접고 만다.
“아직도 나한테 미련처럼 남아있지는 않을까.”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아직 남았다면,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아직도 다 스러진 게 아니라면 저 속에 모두 던져버리고 싶다. 여기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웠고 그런 것들을 저 속에 버리는 건 자연훼손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멧돼지가 많이 출몰해서 이름 붙여진 돼지령, 돼지 평전에서 겹겹 산산, 첩첩 골골 그득 담긴 운해를 바라보는 일행들의 모습이 아직 싱싱하다. 멧돼지라도 잡으면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표정들이다.
운해와 이들을 번갈아 보노라니 속세에서의 근심과 갈등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비단결 같은 포용과 살가운 배려, 자애로운 풍요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 역시 산은 자아를 돌아보게 한다. 특히 광활한 지리산 사방으로 뚫린 공백에서는 더욱 그렇다. 결국에는 집착이나 원망 따위의 하찮은 사고를 평화로 대체시켜주지 않는가 말이다.
이들이 산에서처럼 영원히 선후배 이상의 우정을 새길 수 있기를, 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하게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산에 존재하므로 현재의 순간들이 중하고, 머문 공간마다 귀함을 깨닫게 된다.
사람 변하고
세상 바뀌어도 저 깊은 골 푹신한 운해는 늘 거기 그대로 있을 것이다. 사람이 변해 속상하거든, 세상 바뀌어 어지럽거든 우리 오늘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지리 운해 떠올리며 지혜로이 풀어 가세나.
유순한 동물의 등짝만큼이나 아늑한 능선에서 진정 바라는 걸 염원하고 소망하며 걷다 보니 임걸령이다. 표고 1320m의 임걸령은 주변에 큰 나무들이 많이 늘어서서 녹림호걸들의 은거지로 삼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의적 두목 임걸林傑의 본거지라 불린 명칭이라고도 한다. 10m쯤 아래의 임걸령 샘은 한겨울 눈이 펑펑 내리고 얼음이 꽁꽁 얼어도 물이 콸콸 나온단다.
다시 고개 돌리면 저 아래로 피아골이다. 인위적으로는 도저히 빚어낼 수 없는 현란한 색상의 단풍, 양력 시월이면 산이 붉게 타고, 물도 붉게 물들고, 그 가운데 선 사람까지 붉게 물든다는 삼홍三紅의 명소이자 지리산 10경에 속하는 피아골이다. 설악산 천불동이나 흘림골의 단풍과 비교하라면 쉽사리 답을 낼 수 없을 만큼 극도의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다.
“6.25로 인해 피아골이라고 불린 거죠?”
6․25 한국전쟁 때 피를 많이 흘려 ‘피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명칭은 와전이다. 피아골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그렇게 불렸었다. 피아골의 ‘피稷’는 논밭에서 자라는 1년생 볏과잡초로 어원상 피밭골이 변해 칭하게 된 지역명이라는 게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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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흔쾌히, 마고할미 만나러 반야봉으로
아침 햇볕이 따가워지면서 머리와 이마에서 땀방울이 솟기 시작한다. 지리산 주 능선의 구간들을 하나씩 둘씩 거쳐 가는 게 흥미로움보다 지루함이 먼저 앞서면 힘에 부치고 있음이다. 아직은 다들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걸음걸이가 가벼워 보인다.
노루가 지나는 길목이라는 설도 있지만,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쪽으로 가파르게 흐르다가 잠시 멈춰 노루가 머리를 치켜든 형상과 흡사하여 명명된 노루목. 삼거리에서 가던 방향인 삼도봉 쪽으로 직진해서 체력을 아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오르막 좌회전 신호를 받고 만다.
노루목에서 1km의 거리지만 천왕봉에 이어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해발 1732m)인지라 녹록지 않을 것이다. 해발 1875m로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중봉보다 낮지만, 반야봉은 높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리산 이인자로 자리 잡았다. 반야봉 오르는 것이 시련이라면 그걸 사서라도 우린 해내련다. 다들 그런 마음이다.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쉽사리 오기 힘든 곳이다.
본래 천신天神의 딸이었다가 지리산에 머물게 된 마고할미와 혼인한 도사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라 하여 명명된 곳이다. 또 우리나라 제일의 반야 도량이라고도 하는데 여길 100번 오르면 득도의 경지에 오른다고 한다.
“우리가 득도할 일 있겠나.”
한 번 오르고 무겁게 지닌 허황한 보따리 있거들랑 내려놓으면 그만 아니겠나. 단지 더 지혜로울 수 있다면 만족하는 거지.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에서 지혜 또는 밝음을 뜻한다.
“이 봉우리 아래로는 환란幻蘭이라고도 부르는 풍란이 꽤 많이 자생한다더군.”
마고할미는 천상에서 지리산에 왔다가 한눈에 반한 반야와 결혼하여 천왕봉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딸만 여덟 명을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느끼고 반야봉으로 떠난다.
“도를 깨우치면 바로 돌아오겠소.”
그러나 반야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감감무소식이었고 마고할미는 그리움을 견디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돌아오면 입힐 옷을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마고할미가 늙어 딸들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전국 8도에 한 명씩 내려보내 무당이 되게 하였고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야를 원망하며 정성껏 만든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을 거둔다.
천왕봉에서 찢겨 날린 옷 조각들은 반야봉으로 날아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風蘭으로 되살아났다.
이후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이 봉우리를 반야봉으로 지칭했고, 8도로 내려간 마고할미의 딸들은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수많은 무속인이 마고할미(천왕 할머니)의 제를 지내기 위하여 몰려들고 있다.
“우리가 엄청난 곳에 올라와 있는 거로군.”
“엄청난 곳이지. 여인네의 엉덩이 위에 올라와 있으니.”
반야봉은 지리산의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여인네의 엉덩이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갑자기 조심스러워지는데요.”
“하하하!”
지리산 제3경인 반야 낙조는 시간대가 맞지 않아 접할 수 없지만, 저 아래 만복대와 정령치 쪽을 내려다보노라면 해넘이의 장관이 얼마나 멋질지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내려가며 둘러보면 한쪽은 운무가 피어오르고 다른 쪽은 마루금이 선명하다. 지리산은 한순간에도 온갖 다양한 모습을 창출한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 탐방기와 산행안내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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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걸령 지나 노루목에서 방향 틀어
반야봉 오르는 가파른 고갯길
만복대에서 정령치로 운무 가득 고여
산자락 바다 되어 포말처럼 물결 일고
진초록 녹음은 가을 향할 기약 없이
폭염 막아주는데
그려, 계절이 무슨 상관이랴
지리산 길고 지루하나 우리 네 사람
한데 어우러져
마냥 호기롭고
무르팍 아직 싱싱하기만 한데
오고 나면 진작 왔어야 할 곳, 힘들고 지루해 다신 오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떠나 미안해지는 곳, 예정하고도 여기저기 들르느라 늦어 멀리 돌아온 듯싶어 고개 숙이게 되는 곳. 둘러보면 그간의 삶 부끄럽게 다그치는 곳이다. 내려가서 세상 찌든 삶에 허접스럽게 섞이노라면 다시금 마음 추스르게 하는 곳이다.
지리산은 그래서 어머니의 품이고 내 친구의 우정이며 내 내일의 멘토이다. 여러 번 왔었지만 올 때마다 그런 생각 들게 하는 곳이 지리산이다. 그런 지리산을 그저 걸어 종주하는 장소로만 여긴다면, 그건 어리석다.
또 가자. 칠선봉 넘고 영신봉 넘어 세석으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접경인 삼도봉을 지나고 꽃이 활짝 핀다는 고갯마루, 화개재에 이르렀다. 지날 때마다 느끼지만 여기서 물물교환의 장터가 열렸다는 게 좀처럼 실감 나지 않는다. 뱀사골 입구의 반선 마을과 목통 마을에서 올라온 짐들을 여기 풀어놓고 서로 흥정하며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참으로 가공할 생활력이군.”
“도대체 얼마만큼의 짐을 이고 왔을까요?”
“적어도 우리 배낭보다는 무겁지 않았을까?”
“어휴, 내려갈 때도 그만큼의 짐을 지고 내려갔을 텐데.”
큰 산 너머 이질적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과 애환을 풀어 갔던 시절을 떠올리다가 문득 조선 건국에 대한 설화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지리산을 불복산이라고 불렀다더군.”
고려 말 이성계가 뜻을 펼치고자 전국 명산을 찾아 기도드렸는데 지리산에서만은 태우려는 종이에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반역을 의미하는 불복산不服山으로 불렀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한테 국사를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에게 불복하고 반역을 꾀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계기가 되었군.”
“역성혁명을 반대한 호남지역의 정서를 반영한 설화이기도 하겠지.”
그 옛날 장날의 화개재를 상상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느닷없이 지리산 반쪽이 운무로 덮인다. 왔던 길이 흔적 없이 가려졌다. 연평균 강우량이 1200mm가 넘고 연중 맑은 날이 100일도 되지 않는다는 지리산답다.
아마 지리산 일대 주민들이 불교보다 하늘을 믿고 하늘에 운명을 맡기는 민간신앙에 치중했던 건 지역에 따라 심한 기온 차와 강우 등 급변하는 기후조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나와 바라보는 봉우리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다가갈 봉우리들은 멀고도 높다. 체력소모를 체감할 만큼 걸었다.
“여기서 쉬었다 가자.”
숲속 개울물 줄기가 구름 속에서 흐른다고 하여 명명된 연하천烟霞泉은 그 명칭만큼이나 아름답고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허기진 배를 채운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거기서 얻어낸 극복의 진가를 맛보는 것. 평생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행복의 개념을 잘 모르듯 달콤한 초콜릿처럼 고행 후의 휴식 중에 그늘과 양지가 반복되는 장점을 사고해본다.
형제봉 지나 벽소령에 이를 즈음 언제 그랬냐 싶게 꾸물거리던 운무가 말끔하게 걷혔다. 시오리 지나 급살 맞은 봉우리 또 올라서면 발목 시큰해도 보이는 것마다 황홀경이다. 굽이돌고 또 굽이돌아 허리 뻐근해도 내려다보아 눈에 박히는 곳마다 무아지경이다. 안개가 걷혀 산그리메 수려하거늘 한여름 더위는 더욱 뜨겁게 내리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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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달빛에 드리운 그림자
새벽 햇살이 걷어내니
벽소령 고목은 속살까지 투명하다.
햇살 피해 숨어있던 작은 실바람이
부러지고 찢긴 나뭇가지에 불었더니
검붉게 멍든 생채기도 참하게 아물었다.
그래도 아직 먼 여름
폭우에 젖었다가 폭염에 버티려면
지리산 능선만큼 요원하기만 하다.
태고의 정적 속에서 고사목을 비추는 벽소령의 밝은 달빛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양 시리도록 차갑고 푸르다고 하는데 지리산 10경 벽소 명월을 표현한 말이다. 하늘을 흐르는 은하수와 함께 창백하게 뜬 보름달을 바라보노라면 얼마나 신비스러울지 그림이 그려진다. 벽소령대피소를 떠나 선비샘에 이르러 목을 축인다.
“지금은 서서 물을 받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고개를 숙여야 물을 받을 수 있었다더라.”
산 아래 상덕평 마을에 평생 가난하여 사람들한테 천대만 받으며 살아온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은 죽어서라도 사람들한테 인사를 받아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후에 노인이 죽자 아들들은 이곳 선비샘 위에 아버지를 묻어 많은 사람이 샘에서 물을 뜨려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도록 함으로써 아버지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
“똑똑하고 효자인 아들들을 둔 노인이었네.”
덕평봉에 이르렀을 때는 수분이 모두 빠진 것처럼 땀으로 축축하다. 칠선봉과 영신봉을 지나 세석에 이르는 약 4km 길만 견디면 오늘 행군을 마치게 된다.
덕평봉에서 둘러보는 첩첩 산마루도 편안하고 아늑하다. 지리산이 종종 설악산과 비교되는 건 화려하진 않지만, 도저히 자기주장이라곤 없을 듯한 광활한 품새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 자식에게도 회초리를 들 것 같지 않은.
세석평전이다. 철쭉 대신 희열이 만발한 고원이 너른 품을 벌린다. 5~6월 저기 안갯속에 결코, 호사스럽지 않게 피는 연분홍 철쭉의 목가적 풍치 또한 지리산 10경이다. 실제 도보거리 30km가 넘는 오늘 하루의 강행군을 세석대피소에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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