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에서 쫓비산, 그리고 섬진강변 매화마을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 백운산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호남정맥을 완성하고 550리 섬진강 물길을 마무리한다. 광양시는 동쪽의 섬진강을 경계로 하동군과 접하여 도계를 이루고 있다.
광양제철소의 입지가 결정된 1981년 이전까지는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수온이 적당한 광양만을 중심으로 김과 조개류의 양식업이 활발했으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철강공업의 중심지이자 해외무역의 전진기지로 발전해왔다. 광양제철소 건설과 함께 태인도, 금호도 등이 매립되었고 개펄이 간척되어 광양만 내에 있는 섬들은 점차 육지화되는 추세다.
백운산은 전남에서 지리산 다음가는 높은 산임에도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한 지리산의 그늘에 가려진 데다 전국에 같은 이름의 산이 숱하게 많아 산세와 풍광에 비해 대중 인식이 약한 게 사실이다.
눈꽃 핀 겨울 백운산에서 봄으로 시간 이동하다
백운산 산행 들머리로 많이 찾는 곳이 진틀 마을이다.
“눈떠, 다 왔어.”
우리 산악회 일행이 탄 버스가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의 진틀 마을에 도착하자 호근이가 깨운다.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보니 깜깜한 어둠이다. 노천이도 눈을 비비며 크게 하품을 한다.
서울에서 밤 11시에 출발하여 다음 날인 주말 새벽에 백운산 초입에서 등산화 끈을 조여 맨다. 겨울에서 봄으로 시절을 건너뛰고 호남정맥의 한 구간에 자취를 남기려 가까운 친구인 호근과 노천을 포함해 스무 명 남짓한 산악회 일행이 멀리 남쪽 나라까지 왔다.
정상까지 3.3km라는 이정표를 보고 병암 산장을 지나 산으로 들어서자 헤드 랜턴 불빛들이 불놀이하듯 이리저리 춤을 춘다. 진틀 삼거리의 숯가마 터에서 첫 휴식을 취한다. 큰 돌을 쌓아 만든 숯가마 터는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50여 년간 전통방식으로 참나무 숯을 구워왔다. 보통 일주일 이상 불을 지펴 원목의 30퍼센트 정도가 숯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대단한 생활력이야.”
이 높은 곳의 경사지에서 힘들게 숯을 구워 내다 팔았다니 노천이 말처럼 대단한 생활력이 아닐 수 없다. 숯은 나무가 완전히 무기질의 재가 되기 전에 불을 꺼서 불완전연소를 통해 탄소만 남기는 화학적 원리에 의해 가공된다. 따라서 숯은 불에 타고 재는 다시 탈 수 없다.
“재가 되지만 않으면 다시 반짝할 수 있겠군.”
“하하하! 열정이 남아있으면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교훈을 숯가마 터에서 얻었네.”
숯가마 터를 지나자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늘 그랬던 것 같다. 산중에서의 여명은 탄생에 비유하게 된다. 붉게 서기 어린이며 동이 터오는 걸 보노라면 잉태했던 새 생명의 고귀한 출산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성스러움마저 느낀다.
곧 합류하겠지만 진틀 삼거리에서 좌측의 정상 오르는 지름길을 버리고 우측 신선대로 방향을 택한다. 잘 설치된 데크 계단을 올라가며 서서히 걷히는 운무를 보니 맑은 아침을 맞을 것 같다.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얼음길을 걸어 신선대(해발 1196m)에 도착해서 일출을 맞는다. 붉은 동전이 보이는가 싶었는데 성미 급한 태양은 아주 빠른 속도로 떠오른다. 해가 뜨면서 그리 멀지 않은 상봉도 상투까지 전신을 드러냈다.
“잘생긴 봉우리일세.”
우뚝한 봉우리 아래로 분칠한 것처럼 아직 하얗게 설분을 남긴 상봉 자락까지 초면이지만 낯설지가 않다. 훈훈하다. 지리산 쪽으로는 안개와 구름으로 아직 시계가 가려져 있다.
산 중턱에는 서울대학교의 연습림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한라산 다음으로 많은 900여 종의 희귀한 식물들이 자생한다고 한다. 분재처럼 멋지게 휜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박은 채 가지를 뻗어내고 있는 걸 본다.
“보기 좋은 모습이야.”
“확연히 다른 것들끼리도 이리 사이좋게 잘 지내는데 트럼프랑 정은이는 왜 자꾸 삿대질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이 바위나 소나무만 하겠어?”
“오래도록 사이좋게 잘 지내게나.”
신선대에서 내려와 상봉으로 향할 즈음엔 낮게 깔린 구름마저 멀리 사라지는 중이다. 저만치 억불봉도 존재감을 드러내 백운산의 식구임을 증명한다.
상봉으로 향하는 북사면 그늘 지역엔 눈꽃이 창창하게 피어있다. 햇살 넘나드는 낮이 되면 뚝뚝 눈물 흘릴지도 모르지만, 티 없이 깨끗한 백색의 순수를 잃지 않으려는 양 꼿꼿하게 제 소신을 지키는 중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수도 없이 접했던 눈꽃임에도 오늘 특별히 정겨운 건 왜일까. 눈 깜짝하면 다시 다가올 겨울인데 작별의 아쉬움이라도 생긴다는 말인가.
봄이 오는 길목 백운산에 겨울이 녹는다.
햇볕 든 곳마다 새순 움틀 것만 같다.
바위틈 계류도 힘차게 흘러 살얼음 깨부순다.
동상마저 굳게 한 한파 견뎌내고
야생초 이파리 새살 돋는데
아아, 가슴이 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끄트머리가 의식되는 건 노회해진다는 거겠지?”
“더 젊어지는 게 아닐까.”
“맞아, 감성이 살아있으니까 계절도 의식되는 걸 거야.”
친구들 말에 큰 위안을 받으며 바윗길로 올라선다. 상봉 일대는 가파른 바위 구간이다. 지금까지 올라오면서도 그랬지만 백운산 정상인 상봉(해발 1218m)에도 우리 일행들뿐이다. 억불봉을 향해 요철처럼 굴곡져 이어지는 능선은 거대한 용이 금세라도 용트림하며 승천할 것처럼 보인다.
북쪽을 바라보면서 살짝 아쉬움이 고인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지리산 능선을 감상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도 장애물이 있어 푸른 물결을 볼 수가 없다. 억불봉 뒤로 잔상처럼 흐릿한 장면들은 점점이 이어졌을 섬들인 한려수도일 텐데 가시거리가 짧아 시원스럽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
백운산 조망의 최고매력을 최고봉에서 감상하기엔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정상에 오르긴 처음이지만 4년 전 여름, 피서를 겸해 심산유곡을 찾아 여기 백운산에 온 적이 있었다. 저 아래로 울창한 원시림을 끼고 굽이 흐르는 명경지수의 백운산 4대 계곡은 잘 알려진 피서지이다. 성불계곡, 동곡계곡, 어치계곡, 금천계곡이 그곳인데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떠오르는 계곡 중 한 곳이다.
“또 이동하세.”
정상 바로 밑의 삼거리에서 3.6km 거리의 매봉으로 걸음을 옮긴다. 1.3km를 걸어와 내회로 내려가는 삼거리에서 편안한 능선이 이어진다. 드문드문 보이던 잔설도 모두 녹아버려 길은 습하지만, 행보에 불편은 없다.
삼각점과 나무에 매단 표식이 있는 곳에서 여장을 풀고 식사하기로 한다. 매봉(해발 865.3m)의 평평한 공터에 둘러앉으니 일행들 얼굴에 화기가 돌고 모처럼 환한 웃음소리도 들린다.
“산을 찾는 묘미 중 하나가 바로 먹는 거 아닐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사실이 그렇다. 힘이 부쳐 혹은 입맛이 떨어져 먹을 걸 소홀히 한다는 건 불행일 수도 있다. 허기 때문에 산행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산에서 먹는 맛의 느낌을 놓치는 건 분명한 불행이다.
쫓비산은 매화 만발한 완연한 봄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향한다. 항동마을 방면으로 조금 가다 보면 다음 목적지 쫓비산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에 8.8km라고 적혀있다.
“만만치 않은 거리네.”
“매화마을에 도착하면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렇게 거들면서 힘을 부추겼다. 쫓비산에서 내려가며 보는 매화마을의 신비스러운 풍광을 이들과 같이 느끼고 싶었다. 홍매화를 입에 올렸던 호근이와 봄 산행을 즐기는 노천이랑 동반함으로써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고자 했는데 둘 다 흔쾌히 따라나섰다. 여섯 해 전, 매화 축제 때 쫓비산을 산행하고 보았던 그 넓고 풍성한 매화군락의 풍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간간이 봉오리를 펼치지 못한 진달래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조금 이른 시기에 봄의 전령사를 남쪽 산중에서 마주하니 보통 반가운 게 아니다. 관동마을과 매화마을로 갈라지는 능선 삼거리인 게밭골에 이르자 많은 리본이 달려있고 관동마을에서 올라온 다른 산객들을 만나게 된다.
게밭골에서 사각 나무계단을 딛고 올라 환히 열린 지리산을 바라본다. 거긴 아직 겨울이다. 갈색 산들 너머로 지리산 주릉과 천왕봉은 하얗게 덮여 빛을 발하고 있다.
갈미봉에 세워진 정자에서도 시선은 지리산의 겨울을 향하게 된다. 오늘 새벽 저곳에서 천왕 일출을 보았을 산객들은 지금쯤 주 능선을 종주하거나 중산리로 혹은 중봉을 지나 대원사 쪽으로 하산을 하고 있을 거였다. 떨어져 있는 낯선 이들한테서도 진한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섬진강의 수수한 흐름, 짙푸른 섬진 청류를 보니 가슴이 저며 오는 것만 같다. 보고팠던 이와의 해후가 이런 기분일 거란 생각이 든다.
물개바위를 지나 쫓비산이 가까워지면서 진달래가 잎을 펼치며 여긴 진작부터 봄이었다는 걸 속삭인다. 쫓비산 정상(해발 537m)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 주변은 완연한 봄이다.
“와아~”
“우와! 대박!”
내려가면서 바라보는 청매실농원 쪽은 역시 예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보는 이마다 절로 탄성을 터뜨린다. 매화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다들 걸음을 멈추고 입을 벌린 채 카메라를 꺼내 든다.
간간이 홍매화가 피어 매화군락은 더욱 화사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마을 뒤로 길게 횡선을 그은 섬진강까지 캔버스엔 구도와 채색이 완벽하게 잡혀 화가는 거침없이 붓질을 해댈 수 있을 지경이다. 조선 중종, 명종 때의 문신이자 문인인 송강 정철도 여기서 매화와 대나무를 노래하지 않았을까싶다.
매화 한그루 반만 남은 가지
설월 속 의연한 그 품격
못쓸 곳 뿌리내렸다 말하지 마라
매화 그 심사야 대나무竹가 아나니
마을로 내려가 직접 대하는 홍매화는 참으로 예쁘고 아름다워 황진이나 서시, 아니면 한창때의 브룩 실즈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설렌다. 거기에 더해 활짝 핀 동백을 가까이하면서 설레던 가슴은 요란한 진동을 일으킨다.
팔각정으로 올라가 매화마을의 또 다른 구도를 잡아보고 넓은 장독대에 꽉 찬 항아리들을 바라보자 절로 풍성해지고 여유로워진다.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거야?”
“2500개 정도라지.”
“항아리마다 다 채워진 거야?”
“가서 일일이 열어봐.”
“청매실을 담아 오래오래 발효시키고 숙성한다는데 아마 매실 엑기스도 담겨있고 매실 장아찌도 있겠지.”
겨울 백운산에서 봄 쫓비산으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해가며 매화에 취하고 섬진강 변에서 채취한 벚굴도 맛보면서 보낸 하루를 추억의 한 장으로 살포시 덮어놓게 된다.
때 / 초봄
곳 / 진틀 마을 - 신선대 - 백운산 상봉 - 매봉 - 게밭골 - 갈미봉 - 쫓비산 – 삼거리 능선 - 매화마을 -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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