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야를 붉게 물들인 상사화 물결, 영광 불갑산에서의 가을 향연
성미 급하게 추색秋色을 드러내는 수목들에서
순환의 빠른 반복을 의식한다. 법성봉을 지나고
투구봉에 이르러 좀 더 멀어진
불갑사 일대를 내려다보면서 숨을 고른다.
전라남도 영광군은 굴비의 주산지로 유명하며 쌀, 누에고치, 소금, 눈이 많아 예로부터 4백四白의 고장으로 불렸다. 불갑산과 함께 서해의 해안 절경이 주요 관광자원을 이루는데 가마미 해수욕장으로 더 잘 알려진 홍농읍의 계마리 해수욕장은 약 4km에 이르는 백사장의 배후에 노송이 우거지고 간만의 차가 적은 데다가 해안 경사가 완만하여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호남 제일의 포구라고 일컫는 법성포는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영광군 홍농읍에는 1980년대에 건립된 한빛원자력발전소가 있는데 원전 건설의 기술자립을 통해 원자력이 국산 에너지원이 되게끔 그 기반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지역발전에 일조하였으나 온배수의 배출로 인해 개펄이 썩는 문제점이 발생해서 주변 지역 어민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꽃무릇과 호랑이, 서해 일품 낙조의 불갑산
영광에 소재한 불갑사는 고창군 선운사, 함평군 용천사와 함께 국내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이다. 불갑사가 있는 불갑산佛甲山은 본래 모악산의 일부였다가 백제에 처음 불교가 전래한 곳이라 육십갑자의 첫 자인 갑 자를 붙여 불갑산으로 정했다고도 전해진다.
봄 벚꽃, 여름 백일홍, 가을에 이르러 꽃무릇이라고 불리는 석산이 만개하여 상사화 축제가 열리는 9월에 불갑산을 찾았다. 엄밀하게 꽃무릇과 상사화는 차이가 있지만 초록 동색처럼 같은 류에 속하므로 상사화 축제로 명명한 듯하다.
불갑사 일주문을 지나자 붉은 융단처럼 화려한 꽃무릇 군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분홍의 배롱나무까지 이른 가을 창창한 햇살을 받아 그 화사함이 절정에 달한 분위기이다.
상사화 축제장을 지나 덫고개를 가리키는 방향이 불갑산 들머리가 된다. 정상인 연실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무량수전 왼편의 등산로 입구부터도 꽃무릇이 줄지어 피어있다. 덫고개까지 붉은 행렬이 이어진다.
1908년 농부가 놓은 덫에 호랑이가 잡혔는데 그때 잡은 호랑이의 표본 박제가 지금도 유달초등학교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안내문에 적힌 덫고개의 명칭 유래이다.
호랑이가 덫에 걸려 잡혔다니 그때만 해도 호랑이가 고슴도치 먹던 시절이었고, 여긴 동네 야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호랑이가 큰 바위산에서 살려니 먹을거리가 없어 야산으로 내려왔다. 먹이를 찾으려 어슬렁거리는데 고슴도치가 기어가는 걸 보고 덥석 물었다. 호랑이는 고슴도치를 삼키려다 가시가 입천장에 박혀 씹을 수도 뱉을 수도 없었다. 고통에 겨운 호랑이가 기진맥진하자 고슴도치는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와 둘 다 살 수 있었다.
이번에는 개를 잡아먹으려고 민가의 울타리 뒤에서 개를 노리고 있는데 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밤송이를 보고 고슴도치를 연상한 호랑이는 꽁지가 빠지도록 큰 산으로 내뺐다. 그 후로 야산에는 호랑이가 없어졌다고 했는데 덫에 걸린 호랑이는 밤송이의 매서운 맛을 모르는 놈이었나 보다.
계속되는 꽃길을 따라 올라가자 호랑이 동굴이 나온다. 그 앞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제 동굴을 지키고 있다. 1908년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었을 호랑이의 밀랍이다.
“너구리 잡으려고 놓은 덫에 네가 걸린 거야.”
몸무게 180kg에 몸통 길이 160cm나 되는 놈이 덫에 걸려 잡혔다는 게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넌 한국호랑이의 명성을 깎아내렸어.”
곶감이 호랑이 천적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보니 밤송이도, 덫도 호랑이가 겁내는 천적 중의 천적임을 알게 된다.
“그래도 가죽 값은 했군.”
이 호랑이는 죽어서 논 50마지기 값에 팔렸다고 한다. 호랑이를 사 간 일본인이 박제를 만들었다가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했다는 팻말 글을 읽고는 고도를 올려 걷는다. 조금 더 오르다가 등로 오른쪽으로 비켜있는 바위 봉우리 노적봉(해발 343m)에서 초록이 갈색으로 변하는 산야를 바라볼 수 있다.
불갑사 입구 도로변에 길게 주차한 관광버스들 위로 불갑사와 그 위의 저수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보고 또 보아도 최적의 명당에 터전을 마련한 불갑사다.
“벌써 가을이야.”
성미 급하게 추색秋色을 드러내는 수목들에서 순환의 빠른 반복을 의식한다. 법성봉을 지나고 투구봉에 이르러 좀 더 멀어진 불갑사 일대를 내려다보면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긴 나무계단을 오르는데도 주변에 꽃무릇이 초록 줄기 위로 붉은 꽃잎을 내밀고 있다.
장군봉과 임도로 나뉘는 갈림길인 노루목에서 안전한 길과 위험한 길을 나눠 표시하고 있다. 굳이 위험한 길을 택해 돌계단을 올라 시원하게 조망이 트인 바위 지대에 이르렀다. 가야 할 연실봉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낮은 구릉지를 넘어 영광 일대가 온화하게 펼쳐있다.
“살맛 나는 풍광일세.”
저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다가 긴장감 넘치는 바위 구간을 조심스레 통과한다. 또 경사진 돌계단과 참된 진리를 찾아 오른다는 108개의 나무계단을 올라 불갑산 정상인 연실봉(해발 516m)에 이르자 이곳도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다. 토함산의 일출과 비견하여 일품 서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멀리 광주 시내와 무등산, 담양 추월산이 가늠되고 서해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드높은 하늘 아래 연실봉에서 남도의 초가을을 마냥 느끼다가 구수재로 하산 길을 잡는다. 내려가면서도 거의 막힘이 없다. 뜨거운 불볕더위를 견뎌낸 평야와 저수지에 시선을 던지고 천천히 걷는다.
불상 바위를 지나 다시 꽃무릇 물든 구수재에서 내려선 동백골 돌밭에도 돌보다 꽃무릇이 더 많이 피어있다. 한국호랑이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호랑이가 자주 물을 마셨다는 곳에 호랑이 폭포를 만들었다. 호랑 이입에서 뿜어 나오는 물과 물웅덩이가 살가운 경관을 꾸민다.
우리나라 산에도 다시 호랑이가 포효하고 곰과 여우, 담비 등이 생태계를 형성하는 초자연 상태로 회귀되면 좋겠다는 요원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불현듯 생명 종 하나하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지구 전체에 얼마나 커다란 플러스 파급효과를 제공하는지 뒤늦게라도 깨닫고 대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작은 나비 한 마리가 꽃을 찾아 날갯짓하자 바람이 일고 결국 태풍을 일으키고 말았다. 호랑이 밀랍을 거듭 보게 되면서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즈의 나비효과까지 연상된 것이다.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함을 알면 항상 평안하다 事能知足 必常安’
불갑사 저수지에 이르자 작은 팻말에 적힌 글귀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산에서 내려오면 대개 평안한 건 만족한 산행을 했기 때문인가 보다.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연실봉과 불갑산 능선이 무척 정겹고도 아쉽다.
불갑사를 지나 진달래 동산을 끼고 걸어 불갑사 일주문에 이르자 아쉬운 마음에 또 돌아보게 된다.
때 / 초가을
곳 / 불갑사 - 덫고개 - 노적봉 - 법성봉 - 투구봉 - 노루목 - 불갑산 연실봉 - 구수재 - 불갑사 저수지 - 원점회귀
https://www.youtube.com/watch?v=DS48fnpbk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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