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정원을 초과 모집한 삼청교육대학교의 실체
조두순을 죽기 직전까지 고문했던 전두환
열아홉 살의 봉제공장 여직원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31살의 사내에게 마구잡이로 폭행을 당하고는 여관으로 끌려가 강간치상에 해당하는 성폭행을 당했다. 사내는 체포되어 서울 북부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강릉교도소에서 복역했다.
“한 사람 인생을 파괴한 파렴치범이 고작 3년을 살고 다시 사회로 나왔습니다. 우리 가족은 도저히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 가족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청원했다.
“이 청원 내용 검토해보고 타당하다 싶으면 이놈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려.”
1980년, 3년형을 마치고 나온 전과 17범의 사내는 대통령 지시에 의해 다시 삼청교육대에 잡혀 들어갔다.
“대충 끝내고 잠 좀 잡시다.”
삼청교육대에 입소한 첫날, 같이 분류된 수용자들과 함께 일석점호를 받다가 불평을 내뱉은 사내에게 돌아온 건 팔뚝만 한 몽둥이와 혹독한 군홧발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는 조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지만 거의 실신할 정도로 맞고 또 맞았다. 그 후로 사내는 퇴소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불평을 늘어놓거나 반항하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
이 사내가 바로 2020년 12월 13일 청송교도소를 출소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이다.
그가 출소하는 날에 맞춰 온라인 커뮤니티에 ‘조두순을 죽기 직전까지 고문했던 전두환’이라는 제목의 글이 떴다. 그리고 1995년 12월 22일 자 서울신문의 사회면 기사가 첨부되었다. 기사는 실명을 그대로 게재했다.
『경기도 안산경찰서는 1995년 12월 21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찬양하는 사람을 때려 숨지게 한 43세의 조두순 씨를 상해치사 혐의로 긴급 구속하였다. 조 씨는 이날 상오 3시쯤 안산시 신길동 부랑자들의 임시 거처인 희망자립원에서 친구인 임춘식 씨와 술을 마시다 합석한 60세 황지현 씨가 “노태우, 전두환 만세!”라고 외치자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려 숨지게 했다. 조 씨는 “5공 시절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는데, 황 씨가 두 사람을 찬양해 홧김에 일을 저질렀다.”라고 말했다.』
조두순을 화두로 삼으려는 건 아니다. 사회의 범죄자를 훈련시켜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하였으나 이 사례만 보더라도 삼청교육대가 얼마나 지독한 곳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곳에서 당초 설치 취지의 교화 목적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언급하고자 함이다.
조두순이 자신을 삼청교육대에 보낸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곱게 보았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그를 보더라도 교화는 고사하고 사회에 복귀해서도 살인과 특수상해 강간죄를 저질렀지 않은가.
“인간쓰레기들은 아예 사회에 발을 못 붙이게 해.”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는 사회보호법을 제정해 흉악범이나 특정한 죄를 연거푸 짓는 전과자에겐 형량 외에 별도로 7년 이내에서 보호감호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삼청교육대 수용자들에게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보호감호제가 적용됐다.
“국민적 기대와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 사회를 정화하고자 한다. 그 일환책으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한다.”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와 더불어 ‘삼청계획 5호’라는 포고령으로 시작된 것이 삼청 작전이다. 국보위는 이를 근거로 전국의 사회악을 소탕해 국가 기강을 확립한다며 전국 각지 군부대에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
5·16으로 권력을 쟁취한 3 공화국 정권이 깡패 소탕의 슬로건을 내걸고 당시 전국 주먹을 주름잡던 동대문파의 이정재, 임화수 등을 잡아들여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던 유화책을 베낀 것에 다름 아니다.
무고한 시민을 향한 합법적 테러
“폭력범과 사회풍토 문란사범을 일제 소탕할 것이니 일선 기관은 분발하기 바란다.”
당시 전국을 휩쓸던 양은이파, 서방파, OB파의 3대 깡패 조직과 그 외 다른 깡패조직을 소탕하여 민심을 얻으려고 기획되었으나 학생이나 무고한 민간인이 부지기수 연행되면서 삼청 작전은 출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포고령이 발령되기 사흘 전인 8월 1일부터 불량배 일제 검거가 실시되어 애초부터 불법이 자행되었다. 할당량을 지시받은 일선 관서에서 검거실적을 채우려고 마구잡이로 붙잡아 들였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극비리에 전과자 및 폭력배의 목록을 미리 조사한 뒤 20,022명의 수용인원을 정했는데 각 경찰서와 산하 파출소들 사이에 경쟁이 붙어 후에는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가 진행됐다. 어장의 고기는 한정되어 있는데 어부들은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이듬해 1월 25일까지 연인원 80만 명의 군경이 투입되어 영장 없이 검거된 시민들 수는 6만 755명이나 되었다.
국보위 지침상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 우려자, 사회풍토 문란사범, 사회질서 저해사범’ 등의 검거대상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잡혀 들어왔다.
“저놈, 잡아들여. 아까 목욕탕에서 보니까 등짝에 문신을 했더라고. 뱃가죽에 자상 흔적도 보이고 말이야.”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감히 공권력에 맞서?”
“도박하는 놈이나 구경하는 놈이나 똑같아. 전부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려.”
대학생들 중 전두환과 군대, 국보위를 비방하는 낌새가 보이면 여지없이 잡아들였다. 순화 대상자들 중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노동운동을 한 근로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악의를 품은 고용주들이 이들을 반 정부주의자나 불온 선동자로 신고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아무 죄 없는 부녀자들을 윤락업소 여성으로 몰아 할당량을 채운 경우도 있었으니 삼청 작전은 그야말로 국민 간의 소박한 정서를 깨뜨리고 서로에게 한을 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막바지에 전남 도청에서 붙잡힌 시민군들을 무장폭도로 분류하면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지휘부 외의 인원은 삼청교육대에 입소시켰다.
정치범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마구잡이식 수용
“난 받아들일 수 없소. 언론까지 침해할 생각은 마시오.”
“그래? 시범 케이스로 맛 좀 보겠다 이거지?”
언론인 중 충주 MBC 유호 사장은 계엄 당국의 보도검열을 거부하고 언론인 정화대상자의 해직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524번의 번호를 달고 수용되었다. 거기 그치지 않고 첩을 두었다는 오명까지 씌워 언론분야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삼청교육대는 공직자 숙청, 언론인 해직 및 언론 통폐합과 함께 내란죄의 일부에 해당되며 정권 창출을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에 대해 이렇게 단정하며 전두환 정권 초기의 무자비한 인권탄압 사례로 꼽았다.
또 삼청교육대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아오지 탄광처럼 활용한 사례도 없지 않다. 명실상부 신군부의 최고 실력자가 된 전두환은 국보위까지 설치한 1980년 8월, 협조를 구하기 위해 선배인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육사 8기)을 불렀다.
“선배님, 우리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마당에 아예 정국을 주도해나갈까 하는데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전두환은 정권찬탈 의지를 드러내며 선배의 의향을 물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그의 면전에서 이미 드러낸 집권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건 살기 싫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오랫동안 군에서 이 나라를 통치해 왔습니다. 이젠 문민정치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강창성은 문민정치의 필요성을 개진하며 적임자로서 신현확 총리를 거론하기까지 했다. 전두환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음날 강창성은 서빙고 분실로 잡혀갔다가 해운항만청장 시절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3년의 실형 선고를 받게 된다.
수감생활 중 강창성은 당뇨병이 생겨 체중이 30㎏ 가까이 빠지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안에서 죽건 말건 내버려 둬.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야.”
강창성은 병보석마저 허락되지 않아 힘겨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전두환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강창성을 순화교육의 일환으로 네 번이나 삼청교육을 받도록 지시한다. 진작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강창성은 쇠약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흉악범들에 섞여 봉체조와 PT 훈련 등을 견뎌내야 했다.
정치 보복 치고는 치졸하고 궁색하고도 역겹다. 과연 그가 군복을 입었다고 군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과거 박정희 정권 때 윤필용 사건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에 의해 군내 사조직이 적발되어 자신을 포함해 하나회 전체가 제거당할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군인이 후배 정치군인에 의해 좌절당하는 역설을 경험한 강창성은 2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후 온갖 상념이 소용돌이치는 회한 속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은인자중 하며 일본과 한국의 군벌軍閥을 연구했다.
‘군인에게 있어서 정치는 아편이다.’
군벌 정치는 아편처럼 끊지 못하고 또 다른 숙주를 잉태하며 악의 축으로 뻗어나가게 되어있다..
“군벌을 연구하면서 내린 저의 결론입니다.”
강창성은 이 땅에 다시는 정치군인이 발붙이지 않기를 소망했다.
또 10·27 법난으로 끌려온 승려들도 있었다. 1980년 10월 27일 계엄사령부는 불교계 정화를 내세워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인 월주스님을 비롯해 승려 및 불교 관련자 153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이어서 포고령 위반 수배자 및 불순분자를 검거한다는 구실로 전국의 사찰 및 암자 등을 샅샅이 뒤져 1,776명을 추가로 연행했다. 이때 삼보스님 등 일부 승려가 삼청교육대에서 순화교육을 받았다.
사회 각계의 반대 세력을 탄압해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다지던 때에 종교계에서는 불교 쪽이 된서리를 맞았던 것이다. 전두환은 불교신자였음에도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전방의 군인에게 경계 근무 대신 고문 기술을 가르치고
삼청 작전으로 체포된 사람들은 군과 경찰, 검찰의 등급 분류심사를 통해 A, B, C, D 4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중범에 해당하는 A급은 군사재판에 회부하거나 검찰에 인계하였고,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에 처하며 C급은 순화교육을 받은 후 사회에 복귀시키고, D급은 훈방 조치되었다.
A급 3,252명과 D급으로 훈방된 1만 7,761명을 제외하고 B급과 C급의 3만 9,742명이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되었으며 이들 가운데는 학생이 980명이었고 여성이 319명이었다.
이들 교화 대상자에 대한 순화교육은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1일까지 전후방 26개 부대에서 11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들을 수용한 부대는 육군 21사단, 3사단, 12사단, 33사단, 특전사 등 대부분 전방 산간지역에 소재한 부대였다.
기간은 원칙적으로 4주간이었으나 죄질 및 순화교육을 받는 태도에 따라 2주 훈련 후에 조기 퇴소를 시키기도 하였다.
“악질 불량배들이니까 처음부터 혹독하게 다루지 않으면 오히려 조교인 너희들이 당할 수 있다. 무조건 후려치고 까부셔서 설설 기게 만들어야 한다.”
조교들은 참나무로 만든 단단한 몽둥이를 시도 때도 없이 휘둘렀다. 역시 교육받은 그대로 수용자들은 설설 기었다.
“여기서 죽어봐야 아무도 모른다. 동정할 사람도 없다.”
연병장 둘레에 집총 군인을 배치하여 엄중한 감시 속에서 주로 고된 육체훈련을 실시했다. 교육 중 구타와 얼차려가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지시 불이행자나 태도 불량자는 별도로 설치된 특수 교육대에서 모질게 시달려야 했다.
협박과 욕설, 구타로 시작해 원산폭격, 한강철교, 쥐잡기 등 온갖 방식의 얼차려를 반복했다. 이러한 생활이 매일 반복되었으니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출을 감행하다 총살당한 사람도 상당수였다고 전해진다.
1980년 12월 15일, 28사단에 수용된 31세의 임근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땅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다가 조교들한테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칼자루를 쥔 갑의 입장에 있었지만 조교들도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였다.
“순화교육이 시행되기 두세 달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지요. 대개가 수용자들을 제압하기 위한 준비교육이었어요.”
“몽둥이 다루는 법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게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 일색이었습니다.”
수용 교육 지침에도 수용자를 흉악범과 동일시하여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이런 식으로 조교들에게는 제압하지 못하면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주입하여 극한 대립의 입장에 서게끔 했던 것이다.
5·18 광주 민주항쟁 때 시민군들을 북한 사주를 받은 폭도로 규정하여 공수부대원들에게 주입시켰던 정신교육을 그대로 답습한 거였다.
수용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온화하게 대하거나 가혹행위를 가하는 걸 거부했다가는 상명하복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조교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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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겠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
‘알맞게 먹고 헛되게 버리지 말자!’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
삼청교육을 실시했던 모 부대의 식사 구호다. 이런 구호를 외치고도 변변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수용자들은 군인들이 먹다 버린 잔반통을 뒤지기 일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나 보다.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겠다.’는 게 수용자들 생활수칙 중 하나였으니까.
“고통 없이는 너희들 정신상태가 개조될 수 없다.”
훈련은 신병교육대처럼 목봉체조와 PT체조를 기본으로 똥통에 들어가게 하거나 깨진 유리병 밑에서 낮은 포복을 시키는 등 고문에 가까운 방식으로 수용자들을 다스렸다. 훈련 후의 내무 생활이라고 편할 리 없었다. 억압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점호를 취했다.
점호 후에도 특별한 이유 없이 새벽에 불려 나가 기합을 받고 추운 겨울에 속옷 차림으로 나무에 묶여 매미 흉내를 내게 하는 등 수도 없는 가혹행위를 견뎌내야 했다고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하루 24 시간 중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잠을 자면서도 목봉 체조를 하고 원산폭격을 했으니까.
“지금까지도 그 지옥 같은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가위에 눌려 깨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도대체 플러스 영향으로 남은 게 없다
순화교육을 마친 후 교화 대상자들은 계엄사령부의 지침에 따라 사회복귀자와 근로 봉사자로 재분류되었다. 미 순화자로 분류된 B급 1만 16명은 순차적으로 9차에 걸쳐 전방 20개 사단에 수용되어 근로봉사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1980년 9월 8일부터 1981년 1월 16일 사회보호법에 의해 보호감호 처분 결정이 날 때까지 군사도로 보수, 벙커 구축 및 보수공사, 자재 운반, 통신선 매설 등의 작업에 동원되었다.
‘상습범은 형기를 마친 후에도 바로 사회에 복귀하는 걸 차단시킨다.’
사회 복귀를 원천 차단해야 된다고 분류한 수용인원을 계속 감금하고자 특수 교도소 설립을 추진하면서 1983년 청송감호소라는 명칭으로 경북 청송에 교도소가 생겼다. 보호감호제의 근거 법률인 사회보호법은 기본권 침해와 이중처벌 논란으로 2005년이 되어서야 폐지된다.
삼청교육대는 5·16 군사정변 직후의 국토건설단을 대거 모방한 짝퉁 정화시설에 가까웠다. 1960년대 초 개발도상국 시절의 국토건설단은 그나마 강제노동으로 경제 성장에 보탬이라도 되었으나 산업화가 정착될 무렵의 삼청교육대는 어떤 의미조차 부여하기 어려운 결함 덩어리이자 모순의 결정체였다.
신군부가 의도했던 바와 달리 반란으로 불법 탈취한 정권 이미지를 더 깎아내렸을 뿐이다. 교화 대상자의 수용에 따르는 비용 부담에 더해 엄청난 피해자를 양산함으로써 사회적 비용만 가중시키고 말았다.
한마디로 삼청교육대는 국민들에 대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과도기 사회를 통제하고 반대파 숙청을 위해 세워진 시스템이었기에 국가 사회에 이바지한 면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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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학교 수료증과 그 후유증
‘본 수료증은 항시 휴대하여야 한다. 본 교육 수료자가 재범 시에는 엄중 처단된다.’
수용자들은 군인들도 감내하기 힘든 극강의 훈련과 조교들의 가혹행위로 지옥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수료증을 받는다. 드디어 지옥을 벗어난다는 안도감 외에 달리 감회가 있을 것인가.
삼청교육대를 수료한 이들에게는 다른 수료증 소지자처럼 플러스 스펙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삼청교육 이수자라는 부정적 낙인만 따라붙을 뿐이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주민등록 등초본 상단에도 ‘삼청교육 순화교육 이수자’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긴 시간 순화교육에 근로봉사를 하고도 정작 더 힘들었던 건 삼청교육대 이수자로 살았던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었습니다.”
1988년 정기국회에서 순화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가혹행위는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국방부에서는 교육 중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는데 지나가던 개가 콧방귀를 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그마치 4만여 명에 달하는 삼청교육대 이수자들의 명단은 어디 감춰두었단 말인가.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피해자 숫자를 어떻게 파악한 것인가. 수용되어 들어간 인원 기록은 있으나 몇 명이 나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말이다. 수료증을 받고 나온 사람이 나오지 못한 사람보다 많을 수는 있겠지만 사망자 54명이라는 숫자는 줄여도 너무 줄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003년 제16대 국회에서 ‘삼청교육대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국방부 산하에 관련 위원회를 설치하고 피해보상 신청을 받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보상 규정으로 인해 39,000여 명의 피해자 중 신청자는 4,600여 명에 불과했고, 보상금액도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금전적 보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억울하게 순화 대상자가 되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은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신군부가 나라를 통째 삼킨 것만으로도 빼앗긴 세월이 억울해 미칠 지경인데 하물며 그들의 집권을 위한 희생양이 된 이들은 그 속이 어떻겠는가.
전두환과 노태우, 그들 두 축이 지금 이 세상에서 사라지긴 했어도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소홀함이 있어선 안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억울한 희생자들도 끌어안고 살아온 원과 한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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