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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설화와 애환이 깃든 죽령에서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 봉화군에 폭넓게 걸쳐있는 소백산小白山은 백두대간 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갈라 영주 분지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1987년 국립공원 제18호로 지정된 바 있다.
원래 소백산맥 중에는 희다, 높다, 거룩하다는 의미의 백산白山이 여럿 있는데 그중 작은 백산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신성시해온 소백산이지만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경계를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곁들여 많은 문화유산이 전해진다.
또 소백산은 자락마다 유서 깊은 천년고찰을 품은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주봉인 비로봉 아래에 비로사가 있고 국망봉 밑에 초암사, 연화봉 아래에는 희방사와 그 반대편에 구인사와 동쪽으로 부석사가 있다.
죽령 탐방안내소를 통과한 건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4시 반이다. 이번으로 세 번째인 소백산 탐방은 죽령에서 구인사까지 흔히 죽구 종주라 일컫기도 하는 산행코스를 택했다. 교통과 시간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며 이 코스의 종주 산행을 주저했었는데 마침 산악회에서 종주 일정을 잡아 흔쾌히 동승했다.
소백산은 하늘재(옛 계립령)에 이어 신라 초기 길이 열린 죽령(해발 689m)과 그 역사를 함께 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넘볼 때도 죽령은 넘지 못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그 후대인 장수왕 때이며, 그 후 신라 진흥왕 때 다시 신라에 복속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의 서쪽과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한강을 장악하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개통한 죽령은 문경새재인 조령, 추풍령과 함께 영남의 3대 관문으로 예로부터 나라 관리부터 보부상이 넘나들어 이곳의 장터는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죽령은 신라 때부터 산신제를 지내왔고 조선 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를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주관하다가 훗날 단양, 영춘, 풍기의 세 군수가 제주가 되어 관행제官行祭를 지냈으며 지금은 동민들이 매년 3월과 9월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경주 에밀레종의 주조 시기보다 100여 년 앞선 서기 725년(신라 성덕왕 24년)에 사찰의 범종으로 만들어진 무게 3300근의 동종銅鐘이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이 쇠퇴하자 안동도호부의 시간을 알리는 관가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종은 불교 형식으로 배열된 젖꼭지(종유) 36개가 돌출하여 은은하고 청아한 울림이 백 리까지 떨리며 퍼졌다고 한다. 이 종이 경상도 안동에서 강원도 오대산으로 옮겨가며 죽령을 넘어가게 된다.
조선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를 확장하여 임금의 원당 사찰로 만들면서 전국에서 가장 소리 좋은 종을 찾게 하였는데 이 동종이 선택된 것이다.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3300근의 종을 나무수레에 태우고 500여 명의 호송원과 100여 필의 말이 상원사로 옮기던 중 죽령고개를 10m 남겨두고 멈춰 섰다. 험준한 고개를 넘느라 말들이 힘이 빠져서 그렇겠거니 하였으나 닷새가 지나도록 온 힘을 쏟아도 종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100살을 못 사는 사람도 고향 떠나기를 아쉬워하는데 하물며 800살이 넘어 숱한 곡절을 겪은 범종이 오죽하랴.”
수송 책임자인 운종 도감은 종이 죽령만 넘으면 다시 못 볼 고향 떠나는 걸 아쉬워한다고 여겨 36개의 젖꼭지 중 한 개를 잘라 안동 남문루 밑에 묻고 정성껏 제를 올린 다음 죽령으로 돌아왔다.
“이제 길을 떠나시죠.”
그렇게 말하고 종을 당기니 그제야 움직여 단양, 제천, 원주를 거쳐 진부령을 넘어 상원사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조선 때 영남지방의 양반과 생원, 진사 대감의 행차 길이었고 영남지방에서 조정이 있는 한양으로 공물과 진상품을 수송하는 통로였던 죽령이 지금은 춘천과 대구를 연결하는 중앙고속도로가 생겨 교통이 더욱 좋아졌다. 연장 4.6km의 긴 죽령터널이 뚫리기 이전에 죽령을 앞두고 심하게 곡선을 그리며 굽이쳐 산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앙선 철도를 보면서 교통수단도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산임을 실감케 한다
백두대간 상의 죽령에서 스무 명 남짓한 일행들이 깜깜한 임도를 일렬로 헤쳐 나가는 새벽길이 무척 신선하다. 하늘에는 쏟아질 듯 수많은 별이 서로 재잘거리며 반짝거리고 있다. 헤드 랜턴 불빛을 비추어 걷는 길옆의 철쭉이 어둠 속에서도 진홍빛을 드러낸다.
바람고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기읍에 불을 밝히며 일찌감치 하루를 여는 곳이 보인다. 곧이어 백두대간에 붉게 동이 터오다가 어김없이 둥근 해가 떠오르니 벅차고도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소백산은 여명이 밝아오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르다. 풍광도 그러하지만, 적막강산이었다가 기운 넘치도록 새벽을 여는 분위기는 그때 거기 머물러있는 이한테 옹골찬 힘을 지니게 한다.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다.”
조선 선조 때 천문 교수이자 역사상 뛰어난 예언가인 격암 남사고(1509~1571)는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절하며 그렇게 말하였다. 그는 전국의 숱한 명당 가운데서도 유독 소백산을 길지 중의 길지로 꼽았다. 풍기를 비롯한 소백산 주변에 풍수상 명당 길지인 십승지의 상당수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있다고 하였다.
아침이 밝은 제2연화봉(해발 1357m)에서 바로 위의 기상관측 레이더 기지로 올라가서 보이는 곳마다 눈길을 던진다. 제2연화봉에서 바라보는 월악산 영봉의 살짝 비튼 고개가 더욱 영험하게 느껴진다. 드문드문 자락과 자락 사이에 고인 물처럼 청풍호가 은빛을 반사한다.
“저기가 함백산이지요?”
“네, 그 옆 자락이 태백산이구요.”
손가락으로 함백산과 태백산을 가리킬 수 있는 기상상태가 다행스럽다. 골마다 운해가 깔린 첩첩 산그리메는 산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광인데 그런 그림을 낱낱이,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가야 할 주 능선을 길게 바라보고 다음 봉우리인 연화봉으로 향한다. 연홍 철쭉이 만발한 길을 따라 다다른 소백산천문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체관측소로 1974년 국립천문대로 설립한 후, 1986년 소백산천문대로 개칭했는데 별의 관측을 위해 주변 불빛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은 거라고 한다.
제2연화봉에서 한 시간 가량 걸어 연화봉(해발 1376.9m)에 도착하여 남으로 우뚝 솟구친 도솔봉과 묘적봉에 먼저 눈길을 준다. 그 반대편으로 비로봉 너머 함백산과 태백산이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를 편안하게 바라본다.
월악산 영봉까지 주변의 내로라하는 산봉들도 여기서 볼 때는 연화봉을 군계일학으로 떠받드는 닭 무리처럼 여겨진다. 주체하기 어려운 연화봉의 정기가 그들 산으로 뻗쳐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잠시 연화봉의 강한 주체성에 빠져들다가 양쪽으로 늘어선 철쭉꽃길을 걸어 제1연화봉(해발 1394m)에 닿았다. 제1연화봉에서 비로봉 쪽으로는 철쭉 개화가 늦어 아직 꽃잎을 활짝 벌리지 못하고 있다.
주목 관리초소에서 차도 한 잔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수년 전 겨울, 이곳 주목 군락지의 눈꽃은 참으로 화사하고도 풍성했었다. 소백산의 겨울 풍경을 높이 사는 것은 연화봉과 비로봉 사이의 이곳 주목 지대가 겨울 이미지로서 큰 몫을 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천둥 갈림길을 지나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해발 1439m)에 도착하였다. 그해 겨울 혹한의 칼바람 몰아치고 잔설까지 끌어모아 휘날리던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정상이다.
광활한 초지는 너무 푸르러서 어느 한 지점에 눈길이 머물지 못한다. 울창한 활엽수림 지역의 소백산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계곡과 음이온이 풍부해 청정한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치유효과까지 극대화할 수 있는 곳이다.
소백산의 속살을 파고들면 남사고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언급한 걸 몸소 실감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떠올리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소백산 능선 곳곳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영토 확장을 위한 단골 싸움터였다. 소백산맥 정상 일대에 소백산성, 죽령산성, 남천성골산성, 온달산성 등이 축성된 것만 봐도 이곳에서 죽어간 군사들이 엄청났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도 남는다.
언어소통이 가능한 한민족임에도 목숨을 건 싸움으로 일관했던 건 이해가 앞서는 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합을 통한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를 의식하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해보다가 소백산의 주봉과 작별하고 국망봉 쪽 데크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간다. 길 좌우로 초지가 푸르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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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망봉 일대의 철쭉 군락지는 더더욱 개화에 인색하다. 우람한 바위들을 쌓아놓은 국망봉(해발 1420m)에 도착하니 휑하게 이는 바람이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진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통곡했다는 유래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 회복에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베옷麻衣 한 벌만 걸치고 이곳에 올라 멀리 옛 신라의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너무나도 슬피 울어 뜨거운 눈물에 나무가 다 말라죽어서 국망봉에는 나무가 나지 않고 억새와 에델바이스 등 목초만이 무성할 뿐이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큰 나무는 없고 풀만 무성하다. 천년을 이어온 나라에 종지부를 찍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 있으랴마는 이곳에서 통곡하고 금강산까지 향하는 마의태자의 긴 여정은 아마도 지옥 불을 걷는 심정이었으리라.
수백 년 후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퇴계 이황은 이곳 국망봉에 올라 술 석 잔을 마시고 일곱 수의 시를 쓰고 다음 날 하산하였다고 한다.
길고도 먼 하룻길
상월봉 갈림길에서 슬쩍 지나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마의태자의 무거운 걸음과 이퇴계의 무박 산행을 떠올리고는 상월봉을 찍고 가기로 한다. 상월봉(해발 1372m) 전망 바위에서 가야 할 신선봉에 눈길을 머물다가 다시 내려와 늦은목이재까지 와서 호흡을 진정시킨다.
여기서 비율 전 방향으로 내려가면 중간 합류 지점으로 지정했던 어의곡 탐방안내소로 하산하게 된다. 늦은목이재에 함께 도착한 일행 중 세 명이 어의곡으로 내려가고 여섯 명이 다시 신선봉으로 향한다.
늦은목이재에서 고치령 방향으로 가다가 신선봉 쪽으로 줄을 넘어서면 은방울꽃과 앵초 등의 야생화가 오롯이 제 색을 드러내고 숲은 더욱 우거져 혹여 길을 놓칠세라 신경을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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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표식이 없는 신선봉(해발 1389m)에서 곧바로 움직여 민봉을 향해 나아간다. 약 1km를 더 걸어 삼각점이 있는 널찍한 초지에 이르렀는데 이곳이 지도상의 민봉(해발 1362m)이다. 죽령에서 19km에 이르는 거리이다. 사방이 시원하게 열려 국망봉과 연화봉 등 지나온 소백산 주 능선을 뒤돌아보게끔 한다.
“멀리 와서 볼수록 지나온 산은 더 애틋한 거 같아요.”
끝까지 함께 걸어온 일행 중 유일한 여성 등산객의 여성적 감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름방학 때 외갓집에 손자들이 우르르 갔다가 늙으신 외할머니를 홀로 두고 나설 때의 기분이라면 어색한 비유일까. 어쩌면 산은 이별을 연습하고 작별을 훈련하는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민봉에서 내려와 갈림길에서 오른쪽 경사면으로 올라서면 길은 더더욱 한적하고 을씨년스럽다. 이정표도 없어 나뭇가지의 리본을 살피면서 걷게 된다. 너덜 바윗길을 비좁게 통과하고 등로를 확인하면서 올라 나뭇가지에 구봉팔문 제4봉 뒤시랭이문봉(958.3m)이라 적힌 표식이 달린 걸 보게 된다.
신선봉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리던 능선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면서 아홉 개의 능선에 여덟 골짜기를 이뤄 구봉 팔문이라 칭한다. 1봉 아곡문봉, 2봉 밤실문봉, 3봉 여의생문봉, 4봉 뒤시랭이문봉, 5봉 덕평문봉, 6봉 곰절문봉, 7봉 배골문봉, 8봉 귀기문봉, 9봉 새밭문봉을 일컫는데 득도의 문이라고 하는 구봉 팔문을 온전히 걸으면 도를 깨우친다고 전해진단다.
소백산 주 능선에서 150~400m의 고도 차이가 나는 아홉 봉우리가 정렬한 것처럼 쭉 늘어서 있는데 각 봉우리 간 거리는 800m~2km에 이르며 부챗살처럼 뻗은 능선을 따라 걷는 총거리는 약 33km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4봉에 올라서서 그 구봉 팔문을 눈여겨 살피게 된다.
“다시 또 올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을 읊조리면서도 구봉 팔문의 종주에 대해서는 쉬이 판단이 서지 않는다. 지리산 7 암자 순례길이 떠오르고 설악산 용아장성이 뇌리를 스치는데 여기 뒤시랭이문봉을 올라오면서 고약스럽게 거친 길을 경험하니 그다지 득도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는 않는다.
“득도의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가서…….”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고 구인사를 향해 길을 내려선다. 구인사로 하산하는 길도 험하긴 마찬가지다. 거칠고 가파른 길을 내려와 임도에서 가로질러 다시 산길을 오른다. 봉우리 하나를 지나고 또 다른 봉우리인 수리봉(해발 709m)에 올라서니 이곳이 구봉 팔문 전망대이다. 아홉 봉우리를 하나둘씩 헤아리며 살펴보지만 여기서는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등산로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원효대사는 저길 걸었을까.”
당대 최고의 알피니스트였던 원효대사는 구봉 팔문을 종주하면서 득도한 걸까. 이처럼 심오하게 엉뚱한 생각은 때때로 험산 준봉을 걸을 때 피로를 덜어주기도 한다. 피로를 덜어내고 전망대에서 내려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인사 적멸궁이 나타난다.
구인사는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이다. 천태종은 594년 중국의 지자 대사가 불교의 선과 교를 합하여 만든 종파로 고려 숙종 2년에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들여왔다. 구인사를 창건한 상월조사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는다며 미리 묫자리를 잡아놓았는데 이 적멸궁이 바로 그의 묘소이다. 화장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에서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사리까지 그대로 묻혔겠네요.”
“그렇겠죠.”
일행 간의 뜬금없는 대화도 가끔은 산행의 지루함을 덜어준다. 적멸궁에서 구인사로 내려가는 계단 양옆으로 밧줄 울타리를 만들어 좌로 꺾이고 다시 우로 꺾이며 한참을 내려간다. 계단길이 끝나면서 구인사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데 화려하고 웅장한 규모에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1946년 상월조사가 칡덩굴로 얽어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자리에 현재의 웅장한 사찰을 축조했다고 한다. 경내에는 초암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900평의 대법당, 135평의 목조 강당인 광명당 등 50여 동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일시에 5만 6000명에 이르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찰이란다. ‘억조창생 구제 중생 구인사’라는 사찰 명답게 치병에 영험이 있는 사찰로 이름나 하루에도 수백 명의 신도가 찾아와 관음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긴 내리막길을 지나 일주문을 빠져나가는데 대국의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궁궐을 나가는 기분이다.
노을이 짙게 물들 무렵 주차장에 이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한 이들이 서로의 수고로움을 악수로 나누며 죽령에서 구인사까지의 긴 하룻길을 마감한다.
때 / 봄
곳 / 죽령 – 연화 제2봉 - 연화봉 – 연화 제1봉 - 비로봉 - 국망봉 - 상월봉 - 늦은목이재 - 신선봉 - 민봉 – 구봉 팔문 전망대 - 구인사 - 주차장
카카오 뷰 '국립공원의 비경을 찾아서' 채널 추가 요청드립니다.
http://pf.kakao.com/_YxiJxj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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