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의 슬픈 춤사위와 불꽃 바위들의 화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천관산의 가을
호남의 대표적 억새 명산인 천관산이 있는 장흥은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가장 남쪽에 있다.
많은 곳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한 지역에서 바다와 강과 호수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전라남도 장흥은 여름 바다의 깊은 낭만이 배인 득량만과 탐진강, 장흥댐 호수까지 물과 관련된 제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정남진 장흥은 맑은 바람과 속속들이 투명한 물, 초록의 명산이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예술의 고장이자 산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만든 친환경 참살이 먹거리인 무산 김과 청정해수에서 생산되는 매생이, 고품질의 정남진 장흥 한우가 군침을 돌게 하는 곳이다.
천관사지를 품고 있는 천관산天冠山은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내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에 속하고 두륜산, 조계산과 더불어 전라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기바위, 사자바위, 중봉, 천주봉, 관음봉, 선재봉, 독성암 등 하늘을 찌르는 수십의 기암괴석과 기봉들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처럼 보여 천관산으로 굳어졌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89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울창하고 깊은 산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천관산은 온 산이 바위로 이뤄져 봉우리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어 웅장함을 더한다. 산을 오르면 남해안 다도해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지고 계절마다 다양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봄에는 싱그러운 푸른 잎과 붉은 동백 숲, 가을에는 드넓은 억새밭이 특히 아름답다.
전라도의 산
얼마 전 갤럽은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 생활 중 으뜸이 등산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주말, 도봉산역이나 수락산역에 내리면 그 결과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많은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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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는 가을이 여물어 가는 9월 중순께 피기 시작해 10월 중순에 그 장관을 이루는데 햇살의 강도와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흰색이나 잿빛을 띤다. 가장 보기 좋은 흰색은 태양과 억새가 45도 이하를 이루며 역광을 받을 때이므로, 오전 9시 이전이나 오후 5시 이후에 태양을 안고 바라보아야 그 모습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소박한 빛깔로 산야를 하얗게 뒤덮은 억새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을의 심연으로 끌어당긴다. 청동 빛 가을하늘, 하늬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물결을 헤치며 걷는 천관산 가을산행은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억새의 아름다운 모습은 전국 곳곳에서 접할 수 있지만 장흥 지역에서는 다도해의 풍광과 기암괴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장흥 천관산이 으뜸이다.
암봉과 단애의 근엄한 위용
산은 그 지질 형태에 따라 보통 흙산과 바위산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 산 중 암봉과 기암으로 유명한 바위산들을 추렸습니다. 그런 산들은 대개 험산 준령이라든가 악산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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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흐느끼는 슬픔처럼 흐느적 일렁이는 억새의 춤사위를 따라
주차장에서 천자의 면류관을 높이 올려다보고 산으로 들어서서 도화교라는 작은 석교를 건너면 장천재를 먼저 접하게 된다.
장천재를 거쳐 조망이 가려진 숲길을 가파르게 오르다가 시야가 트이면서 정남진 해양낚시공원이 있는 장흥 앞바다를 보게 되고 진행 방향의 봉우리에서 멋진 바위가 반겨준다. 첫 번째로 접하는 봉우리 선인봉이다.
왔던 길 돌아보면 들판 너머로 부용산이 우뚝하고 그 우측으로 운봉산과 승주봉이 야트막하다. 장흥 곳곳을 눈에 담다가 오르는 등산로에는 조경 수석처럼 잘 다듬어졌거나 있는 그대로의 거친 바위들이 곳곳마다 즐비하다.
환희대로 오르면서 물드는 가을 산자락 위로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바위 군락의 풍광이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 고려 때의 기록 ‘천관산기’에 의하면 ‘산에 오르며 위험한 길 때문에 곤란을 겪다가 여기에서 기쁘게 쉰다.’라는 뜻의 환희대라고 한다. 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모양이라는 대장봉 정상의 석대이다.
빛을 따라 순광으로 바라보는 억새 무리가 가을빛 그대로 연한 갈색 물결을 이룬다.
한때 황금빛 약수에 효험까지 뛰어났다는 금강굴을 배꼼이 들여다보고 좁은 바위 통로를 빠져나간다. 금강굴을 지나 올려다보면 대세봉과 기암들이 늘어서 있다. 아무렇게나 솟아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며 대열을 갖춘 것처럼도 보이는데 신라 때의 금관을 연상케 한다.
화엄경에 여기 천관산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남방에 지제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 옛적부터 여러 보살의 무리가 그 속에 머물고 있었으며, 지금도 보살이 머물고 있는데 이름하여 천관 보살이라 한다. 그의 권속인 1천 보살의 무리와 함께 늘 그 가운데 있으면서 법法을 연설하고 있다.’
김여중의 ‘유천관산기遊天冠山記’는 보다 실감 난 찬사로 천관산을 표현하고 있다.
‘한 산이 남방을 진호鎭護하며,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있다. 세인의 전설에, 통령 화상이 가지산에서 오며 멀리서 이 산을 바라보니, 마치 기둥이 버티고 서있는 듯하여 지제산이라 불렀고, 가까이 다가갔더니 산정에 천자의 면류관을 드리운 것 같아 천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은 참으로 영선靈仙이 살고 있는 곳이다.’
왔던 길을 내려다보니 채색되는 계절에 맞춰 각양각색의 옷차림이 줄을 잇고 있다. 누렇게 익은 평야와 마을에서 바다로 흐르는 실개천이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다시 위로 오르며 눈을 돌리니 능선에 늘어선 아홉 개 바위를 총칭해서 명명되었다는 구정봉九頂峰(해발 685m)이 보인다. 아래부터 삼신봉, 홀봉, 신상봉, 관음봉, 선재봉, 대세봉, 문수 보현봉, 천주봉이며 그 끝으로 대장봉이라고도 하는 환희대까지를 일컫는다. 흰 구름이 푸근히 감싸고 있는 기암 지대이다.
산과 산을 잇고 또 나를 잇다
1967년 지리산이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 스물 두 곳의 국립공원이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산들을 찾다 보면 그곳이 국립공원이고,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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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대에서 가늘고 여린 허리를 흔드는 억새들의 춤사위,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몸을 맡긴 유연한 몸놀림은 마치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참한 처세술을 보는 것 같다. 약 1km 거리의 억새 능선을 걸으며 거기서 다양한 무리의 정연한 어우러짐과 그들만의 돈독한 결속을 보게 된다.
가을 천관산은 바위와 억새, 어떤 게 갑이고 을인지 알쏭달쏭하다. 억새로 이름난 산에 멋진 바위들까지 수두룩하여 많은 산객을 끌어 모으니 그 둘은 멋진 하모니에 듣기 좋은 화음을 생성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성성한 수염 흩날리는 백발노인들 같은 억새군락 틈새로 수직으로 뻗어 하늘을 찌르는 바위들도 그렇거니와 두툼한 뭉게구름을 퍼뜨린 파란 하늘을 유영하며 아래로 걷는 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패러글라이더들까지 거리낌 없이 잘 어울리는 풍광이다.
정상인 (해발 723.1m)에는 억새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모였다. 연대봉烟臺峰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듯 연기를 피워 왜구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대가 있던 곳이다.
면류관처럼 보였던 정상 일대의 바위 군락은 올라와 다가서서 보면 천자를 지키는 호위대처럼도 느껴지게 한다. 말을 붙여도 완고하게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흐트러짐이라곤 전혀 없을 듯하다.
하늘은 드높고 청명하여 억새 축제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천관산 억새제는 매년 10월 중에 그 행사를 개최하는데 이곳 정상 지대인 연대봉에서 환희대에 이르는 억새능선이 행사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다.
가시거리가 좋은 날에는 여기서 다도해의 시원한 풍경은 물론 멀리 제주도 한라산까지 육안으로 관측이 가능하다는데 오늘은 그만큼 맑은 날은 아니다. 대신 담양 추월산과 인사를 나눌 수 있어 좋다. 먼 산들에서 시선을 당겨 천관산 사면을 타고 정상 쪽으로 고개 숙인 억새 물결에 눈길 멈추자 계절마저 심하게 일렁이는 것만 같아 현기증이 인다.
천관산의 슬픈 억새 울음을 들으며 글공부했던 소설가 한승원은 억새 울음에서 영감을 받아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탈고한다.
또 이청준의 ‘이어도’, ‘당신들의 천국’은 장흥을 문향의 고장으로 새겨지게 하였다. 저 아래 해안마을이 이들 두 소설가가 태어난 곳이다. 그들은 장흥 포구에서, 천관산에서 많은 문맥을 창조해냈으리라.
하산은 황금색 평야와 바다를 앞에 두고 걷게 된다. 바위 부스러기부터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능선 주변에 늘어서서 오가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한다.
넓적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듯한 정원암을 지나자 높이 15척에 이르는 양근암이 나타난다. 거대한 남근 형태의 양근암이 음근암이라 할 수 있는 건너편 금강굴과 마주 보고 서 있으며 이런 자연의 조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쓰인 팻말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 바위를 지나면서 경사가 급하게 꺾인다. 야트막한 산을 담벼락처럼 끼고 황금 들녘을 앞마당 삼은 장흥 읍내가 다소곳이 평화롭다.
산에서 내려서면 우람한 효자송의 자태가 걸음을 멈춰 서게 한다. 곰솔 혹은 해송이라고도 부르는 효자송은 커다란 파라솔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높이가 9m이고 줄기 밑동의 둘레가 3.8m, 윗부분 너비는 동서 20m, 남북 26m에 이른다.
높이에 비해 수평으로 넓어 반송盤松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마을에 살았던 위윤조(1836년생)라는 사람이 밭농사를 많이 짓는 부모님의 휴식처로 삼기 위해 심었다니 수령 150여 년은 족히 되었을 거로 추정하게 된다. 많은 것들을 보여준 천관산이다.
때 / 가을
곳 / 탑동 주차장 - 장천재 - 선인봉 - 금강굴 - 환희대 - 천관산 연대봉 - 정원암 - 원점회귀
https://www.youtube.com/watch?v=1GBD8sbxvh4
나의 산행기_ 도서 정보
산과 산을 잇고 또 나를 잇다 https://www.bookk.co.kr/book/view/135227종이책 산과 산을 잇고 또 나를 잇다 1967년 지리산이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 스물 두 곳의 국립공원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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